시사/인터뷰

귀여운 며느리는 55세

모과 2006. 5. 6. 17:11

 

 

증조 할아버지 제사에 참석하려고 며칠 일찍  시댁에 갔다.

 

그동안은 직장 생활과 가게 일로 인하여  남편만 참석 하였다.

 

대부분의 형제, 친척이 대전에 살고 있고 우리만 부산에 살기때문에  모든 경조사에 우리가 빠지는 일이 많았다.  그 동안 우리가  사업에 실패하여 생활이 넉넉 하지 못했던 것이 더 큰 이유이다.

 

이제 실패만 거듭되던 남편이 사업을 접고  남들은 퇴직 할 나이에 취직을 했다.

 

10여년을 나의 조그만 가게로  생활을 하기엔 매일의 삶이 너무 벅찼다.

 

아이들은 방학 마다 아르바이트를 해서  용돈을 벌었고 학기중에는 장학금을 타기 위하여  공부에  열중했다.

 

이제 큰아이는 대학을 졸업하고 대기업에 취직을 했고 작은 아들은 2학년에 복학을 했다.

 

남편과 나는 둘다 교편 생활을 했었고 장사에는 익숙치 않았다.

 

남편은 대형 할인마트에 식품을 납품하다가  빚만 지고  말았다.

 

평생을 빚이 없이 살던 우리는 이자  갚기에도 전전 긍긍하였다.

 

시댁에 경조사에  일일이 참석 할 수가 없었다

.

 

내가 하던 가게도 사양 길에 있어서 적자를 겨우 면 했으나 남는 게 없는 장사였다.

 

10여년동안 쉰 날은 2-3일 , 몸이 많이 약해졌고 마음도 황폐해져 갔다.

 

 

생각 끝에 가게를 그만 두고  일단 쉬기로 했다. 




그 동안  사랑만 받아 온 시부모님께 죄송하여 쉬는 동안 만이 라도  시댁 일에 빠지지 않고 열심히 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비 만 오면  큰 수술을 한 세쩨며느리인 나를 위해 꼭 전화를 주시는 84세의 아버님.

사업에 실패한  우리가 시댁에 참석 하는 날이면 만면에 웃음을 지으시며 좋아 하시는 아버님.

집에 압류가 들어와 다급해 하는 며느리에게 미안해 하시며 방 두칸은 얻어주시겠다고  전화로 위로 해주시기도 하셨다.




형제들은  냉정하게 대해 주었지만 부모님은 다르시다.


늦은 나이에 자기의 적성에 맞는 일을 하게된 남편은 피곤 한 줄 도 몰라한다.


직장일로 남편이 대전에 머므는 동안  나도 시댁에 있었다.

남편일을 도와 하루 종일 서서  있었더니 온 몸이  아팠다.

 

다음 날 출근 하시던 아버님께서  잡초가 무성한 화단을  보시며,

"에미야! 너 오늘  화단에 풀 좀 뽑아라." 하셨다.

"싫어요. 어머니와 유성에  목욕하러 갈거예요, 내일 할게요."

"허 허 허 ."남편과 아버님이 웃으셨다.

그날은 큰 형님 차로 유성에 가서 온천 목욕을 하고 오는 길에 유명한 중국집에서 점심도 먹고 돌아왔다.

 

다음날은 일주 일에 한 번 파출부 아주머니가 오는 날이다.

어머니도 연세가 많으신데 파출부 아주머니도 69세에 꼬부랑 할머니였다.

어머니는 치매가 귀엽게  와서 당신이 하신 말씀을 곧 잊으시고 같은말씀을 열번 정도 되풀이 하신다.

드라마를 좋아하시는 데 내용을 잊어버려서 늘 새롭게 보시는 것 같다.

드라마를 같이 보면 똑같은 질문을 평균 10번이 넘게 하신다.

나는 처음 듣는 질문인 것 처럼 정성껏 대답 해 드리곤 했다.

"어머니 머리 속에 지우개가 생겼나봐요." 하면 "얘 는." 하시며 아기같은 모습으로 웃으신다.

파출부 아주머니가 집안 일을 하는 동안 나는 화단에 풀을 호미로 모두 뽑고,고추와  가지, 호박, 방울토마토 모종을 사다 심었다.

 

일찍 퇴근 하신 아버님이 "잘 했구나"하시며 흐뭇하게 웃으셨다.

큰 병을 여러 차례 앓은 나는  오랫동안  계속해서 일을 못 한다.

피로를 빨리 느껴서 충분한 수면을 취해야 하는 체질이 되었다.

아버님은 우리가 머물고 있는 방에 있는 컴퓨터로 바둑을 두고 계셨다.

그 방의 황토 전기매트가 잠을 자고 나면 몸을 개운 하게 해 주었다.

"아버님! 저 여기서 조금만 잘께요.'

"그려"

얼마를 잤을까? 손길이 느껴져서 눈을 뜨니 아버님이 전기 스위취의 온도를 낮추고 계셨다. 내가 땀을 흘리고 자는 모습을 보시고 조심스레 스위치를 만지고 계셨던 것이다.

" 아버님! 저 버릇이 없지요?"

"아녀. 귀엽더라."

아마도 태어나서 처음으로 귀엽다는 말을 들은 것 같다.

나는 전혀 귀여운 타입이 아니다.

키도 크고  지금은 체중도 많이 늘어서 스스로 모과라고 별명을 지었다.

아버님은 평생을 교직에 몸 담고 계시다 정년 퇴직하셨고 어머니는 사범학교를 나오시고 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계시다 결혼 후 그만 두셨다.

시댁 식구들은 대부분 교편 생활을 하시거나 공무원이시다.

 

결혼 후에 시집식구들 누구도 큰 소리로 언성을 높이는 것을  보지 못했다.

전형적인 충청도 양반 기질이 많은  말소리도 조용조용  대화도 별로 없는 조용한 집안에

목소리가 크고 덜렁대고  집안일은 잘 하지 못 하고 바른 말은 잘 하는 씩씩 한 세째 며느리인 나.

결혼 전 부터 남자 중학교에서 교편생활을 시작하여 8년을 근무하면서 전형적인 ㅇ형인 성격은 조금 더 터프 해 졌다...아들 둘을 키우며  조금 더  솔직해졌다.

 

12년 동안 남편이 하는 일 마다 실패하고 빚도 많이지게 되는 동안 삶은 때로는 견디기 힘든 고통으로 다가왔다. 착하다 못 해 우유부단하기까지 한 남편은 나를 화병이 날지경으로

나의조언을 무시하고 일을  하더니 여러번 사기까지 당하였다.

아침에 눈을 뜨면 심장이 견디기 힘들 정도로 불안하게뛰었다.

산다는 일이 죽는 것보다 힘이 든다는 경험도 여러 번 겪었다.

 

두 아들은 성실하고 공부도 잘 했으며 군대에 다녀 온 후로는 엄마를 마치 "여동생"처럼 보호하였다.

아버님과 손위 시누이님,고모님 네 분.....

간혹 남편과의 이혼이생각이 날때면

"이혼을 하면 이렇게 좋은 분들과도 이별이구나."하는 생각이 제일 먼저 떠 올랐다.

 

이제 내가 서 있는 지점은 터널의 입구가 환히 보이는 곳 ..행복의 문이 열리고 있다.

삶에서 고통은 누구나 치루어야 할 숙제이고 모양만 다르게 온다는 것도 깨달았다.

고통이 오면 조용히 견디며 지나기를 기다리는 일 밖에 없다.

고통으로 인하여 가족이 더욱 소중해졌으며  서로 사랑하고 부모님이 우리의 인생의 축복임을 알게 되었다.

내 시간이 허락하는 동안 부모님에게 최선을 다 하리라.

아버님이 99세까지 살다 가신 할아버님께 효도 하시는 모습을 나는 시집 온후 29년을 보아왔다.우리 부부도 이제는 걱정을 그만 드리고 기쁨을 드리는 자식이고 싶다.

아버님이 할아버님께 하신 만큼은 어렵겠지만.

어버이날을 맞아서 더욱 더 부모님께 고개 숙여 감사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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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고령화 시대에 접어들어 우리가 뿌린 삶의 씨앗은 우리가 모두 거두고 간다는 사실을 여러 사람의 인생을 보고 알았다.
 오늘도 사랑의 씨앗을 뿌려야 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