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인터뷰

90세 이상 건강하게 사는 시집의 장수 비결.

모과 2009. 7. 28. 02:02

시할아버님은 99세 까지 건강하게 사시다가 한 달 편찮으시다 돌아 가셨다.

할머님은 할아버지 보다 3살 연상이셨는데 93세 에 점심 진지 드시고 쓸어 지셔서 일주일 잠만 주무시다 돌아 가셨다.

할아버지는 혼자 9년을 사시다 돌아 가셨다.

 

충남 예산군 덕산면 외나리 시골집이 본래 본가인데 130년이 넘었다.

 

1. 육체적인 고단한 노동을 규칙적으로 한다.

 

할아버지는 평생을 농부로 사셨다.

술,담배는 하지 않으시고  가을에 추수를 하면 농토를 조금씩 더 사시는 것이 낙이었다.

아버님과 작은 아버님을 모두 교육자로 정년퇴직할 수 있도록 뒷바라지 하셨다.

해마다 대전으로 추수한 쌀과 농작물을 보내주셨다.

대전의 집을 모두 사주셨다.

손주들의 교육에 최선을 다하도록 격려하셨다.

 

아버님이 국가에서 주는 교육문화 훈장을 두번이나 타실수 있었던 것도 모두 시할아버님이 계셨기에 가능한 일이 었다.

할머니가 돌아 가시고도 시골집에 시고모님과 함께 사시다가  건강이 악화되서 대전집에서 치료 받으시다 돌아 가셨다.

시골집에 계시며 지게에 도시락을 얹어서 지고 매일 선산을 둘러보시고 산소옆에서 한잠 주무시고 내려 오셨다.

선산은 이곳 저곳에 있고 길이 나있지 않아서 길을 만들며 올라가야 하는 산중에 묘지가 있다.

할아버님의 조상 에대한 정성은 존경과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마을 입구부터 동내까지의 길은 박씨 문중에서 만들었다고 보건지소장님이 말해 주었다.

 

마을 어귀에 있는 수덕 초등학교 : 74세 된 시고모님,부터 이학교를 다니셨다.남편,큰시누이 형님, 막내 고모님이 다닌 학교이다.

 

 

 이번주에 대전  시댁의 마당에 있는 [서광]을 새벽에 뽑아서 시골집에 남편과 큰시누이형님이 심었다.

 

 시골집  앞의 밭 을 사이로 있는 이웃집: 현대식으로 편리하게 지은 집이 많이 있다. 집집마다 자가용도 다 있다.

 

 사랑방과 바깥채, 강남콩을 심었다 추수한 밭 : 4년이 넘게  매주 내려가서 형제들이 합심해서 집을 새로 고치고 ,가구도 만든 시골집

 

 

큰집 종손녀와 둘째 손녀딸 : 모두 4대가 모였다. 큰집 둘째 조카의 아들 백일을 서울서 하고 할아버지 뵈러 모두 내려 왔다가 자고 갔다. 두손녀딸들은 8월 2일 증조할아버지 제사때 종손이 내려와서 데려 간다. 이어서 둘째 아들 손자를 보게 된 큰형님. 맞벌이라서  시어머니가 봐주기로 했다..

 

 

 

 부모님 방에 있는  T V를 올려 놓을 장식장을 만들고 계신 큰 아주버님(67세)과  감독하시는 아버님(87세) 오른쪽의 집에서 남편이 태어 났다.

 

 뒷켵의 장독대 앞의 잡초를 뽑고 있는 큰형님(65세)

아버님의 제자인 큰형님, 고3때 담임을 한 인연이 이어져서 종부가  됐다.

 돌담아래로 심은 연산홍 2,000그루의 사이에 난 잡초를 뽑고 있는 큰 시누이 형님(62세)과 남편(60세), 내가 힘들 때 늘 정신적으로 위로를 많이 해주신 형님. 우리 시댁은 딸들이 며느리보다 건강하고 마음도 더 넓다.

 

 담뒤의 풀밭을 기계로 제거하고 있는 안산 아주버님(큰시누이 형님 남편:65세)시댁 밭인데 그냥 놀리고 있다.

 

건축에 솜씨가 없어서 매주 힘든일만 하는 박씨 아저씨 (남편^^): 일당은 덕산막걸리  한병

계속 되는 사업 실패로 아버님 걱정을 많이 시켜드렸다고 ...부산 살 때부터 매주 대전에 들려서 부모님을 모시고 시골집을 다닌 남편, 고단하지만 자기가 할 일은 그것 밖에 없음을 늘 안타까워 한다.

 

 * 이집에서 태어나신 시아버님(87세),아주버님과 남편형제들.....작은 거인 조용한 카리스마 ^^ 아직도 중소기업을 운영하신다.대단한 건강과 경제력이다.

피부과에서 피부나이 70세로 판정을 받으시고 웃으셨다.

 

 

농업 학교를 나온 안산 아주버님(65세) 는 몸이 빠르고 손재주가 많아서 일을 많이 하신다. 시골집에 오시면 [커피담당]이다.

지난주에 [커피당번] 사표를 냈는데 아버님이 수리하지 않았다.^^

7월 30일에  [허리 수술]을 하시는데 서서 하는 일이라 괜찮다고 하루 종일 일했다.

 

황토방의 주방모습, 벽의 황토는 남편과 우리집 막내가 다 발랐다.

표시나는 일을 한게 너무 없다고 우리 막내가 아빠와 함께 하루종일 투 룸의 안벽와 바깥벽을 황토로 발랐다.

남편은 주로 돌덩이 치우기,양탄자 태우기, 풀뽑기등 표가 안나고 힘든 일만했다 우리 막내가 우리도 표시나는 일을 하자고 제 아빠에게 부모님께서 거주 하실 방의 벽과 천장을 황토로 바르자고 해서 두고두고 친척들에게 웃음 거리를 주었다.

완성된 T V 받침대 : 큰아주버님은 건축과를 나오셔서 시골집의 옷장, 신발장, 사립문, 목침, 등을 다 만들었다.. 안산 아주버님은 모기장 창문과 창고를   모두 만들었다.

남편이 13만원주고 인터넷에서 사온  T V,  이곳에서 [찬란한 유산] 27회를 봤다..

 

 아주버님이 만든 이불장과 남편과 막내가 바른 황토벽....^^

왼쪽 문이 화장실: 더운 물이 늘 나온다.

 

 

 

큰형님이 풀을 뽑은 자리: 매주 가는 편이지만 다 뽑을 수가 없다.자라는 속도가 더 빠르다.

 남편과 큰시누이가 뽑은 자리 연산홍만 남아서 보기 좋다.^^

위의 연산홍도 형제들이 다 심었다. 처음에 1,000그루,잡초가 더 잘 자라서 나중에 1,000그루 더 심었다.

 

 봄에 광주의 조선대학 [장미 축제]때에 사온 36그루의 장미중에 화단에 심은 장미, 줄장미는 돌담에 심었다.

조선대학교에 책팔러 갔을 때, 남편이 생활협동조합 직원들과 의논해서 예산 땅에 맞는 장미를 36포기 사다 심었다.

나는 남편의 효심을 존경한다.

 

소나무 옆의 사립문도 큰아주버님 작품이다.

 

2. 6,6,6 식사법과 채식 을 주로 한다.

 

시댁 할아버님과 아버님은 매일 아침 6시, 오후 12시, 저녁6시에 식사를 하신다.

99세까지 장수한 할아버지는 여름에도 식사후에는 팔팔 끓인 맹물을 드셨다.

영양제나 병약이나  식후 30분후에 드셨다.

시계를 들고 보시고 정확히 30분에 드시던 모습이 기억이 난다.

시골집이 깡촌이라서 주로 채식위주의 식생활을 하셨다.

 

3. 평생 화를 내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결혼을 하고 32년이 지났지만 시댁 어른들 누구도 얼굴을 붉히고 화를 내는 모습을 본적이 없다.

아버님부터 대단한 효자라서 퇴근 후  바로 할아버지 방에 가셔서 늘 듣는 족보, 종가에 대한 말씀을 두시간씩 듣으셨다.

할아버님이 돌아 가실 때까지 변함 없이 그랬다.

큰아주버님도 남편 형제들은 모두 그렇게 했다.

가끔 할아버지 방에 들어 가서 절만하고 빨리 나오는 경우도 있었다.^^

 

할머님은 더 좋으신 분이다.

빨래를 하고 있는 내게 고무신을 조심스럽게 내주시며

" 이것도 닦아 주겠니?"하시며 웃으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4. 형제 간에 자주 모이고 시골집에 가서 함께 일을 한다.

 

할아버님이 돌아 가시고 15년을 비워 두었던 시골집에 혼자 머물면서 일꾼들과 함께 집을 고치신 큰 아주버님.

정년퇴직을 하시고 아버님의 의견에 순종해서 모든 집안의 가구와 사립문,신발장등을 손수 만들었다.

남편은  매주 대전에 와서 아버님을 모시고 시골집에 내려 가서 힘을 보탰다.

나는 주말에도 근무하는 직장이라서 가끔 동행을 할 수 있었다.

 

안산에 살고 있는 시누이 형님 내외 분도 매주 내려 와서 식사 당번을 하고 일에 동참했다.

땀을 뻘뻘 흘리고 나서 덕산 막걸리와 소박한 안주로 저녁을 먹고 장작으로 불을 지핀 사랑방에서 푹잔다.

 

5.뒷담화의 고수들,그러나 정면충돌은 피한다.

 

어른들의 말에 순종하지만 우리끼리 모이면 가끔 부당함을 말한다.

형제들의 문제점도 말한다. 없는 사실은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정면에 두고 충고같은 것은 하지 않는다.

처음에 나는 시댁식구들이 이중인격들이 아닌가 생각을 한적도 있다.

그러나 그사람에 대한 애정이 깔린 뒷이야기이고 정면 충돌은 지혜로운 일이 아닌 것을 깨닫게 됐다.

 

왜냐하면 문제가 없는 사람도 장점이 없는 사람도 없기 때문이다.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지만 나와 다름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6.할머니가 돌 가실 때 생긴일

 

대전에 살고 있는 시고모 네분과 큰형님이 조를 짜서 식사 빨래 당번을 정해서 교대로 일했다.

할머니는 일주일간 깊은 숨을 쉬면서 잠만 주무시며 계속 오줌을 누셨다.

그리고 자손들을 다 보시고 돌아 가셨다.

수덕사 스님들이 어려울 때 지극정성으로 하셔서 [환희대] 주지 스님인 법성 스님과 세여스님이 장례를 인도 하셨다.

2박 3일 동안 목탁을 두두리며 정성껏 불경을 낭독하시는 모습에 감동을 받았다.

여관에서 자면서 밤과 낮으로 불경을 읽어 주었다.

고향 집에서 가까운 선산에 모시고 위폐는 수덕사에 모셨다.

불자셨던 할머님을 위하고 개신교 권사이신 어머님에 대한 아버님의 배려였다.

 

7.종교를 떠나서 합심한다.

 

시댁은 종교를 떠나서 단결을 한다.

유교, 개신교, 천주교, 불교,무교, 관계없이 협력하고 배려한다.

한  사람에게 일이 생기면 아버님의 소리 없는 지휘아래 밀양박씨 규정공파 26,27,28,29데손이 뭉친다.

타인의 종교에 대해서 입에 담지도 않는다.

 

이번에 은행에 다니는 아들이 청약통장을 부탁했는데 한 달 된 29대 손주부터 87세된 아버님까지 모두 들었다.

시고모,시누이들도 모두 가족들이 들었다.

아들은 14,000명중에 100등안에 드는 실적을 냈다.

입사후 신용카드 가입 실적도 그랬었다.

 

 

**어머님은 퇴행성 관절염이 심해서 사진에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발목이 아파서 풀은 뽑지 않고 식사 준비때 조수 노릇을 했습니다.

58세의 제가 제일 나이가 적어서 어머님의 웃음조 입니다.

어머님은 제가 가야 시골집에 간다고 해서 저를 기쁘게 하십니다.

요즘 어머님의 머리속에 지우개가 생겨서 아버님이 많이 힘이 들고 ,가족들이 안타깝습니다.

큰 시누이형님은 [노인 요양사]자격증 까지 취득했습니다.

내년쯤 시골집으로 이주하는게 아버님의 희망입니다.

 

**상대방에 대한 배려, 단결, 협동, 그리고 사랑이 ,절제된 생활이 장수의 비결이라고 생각한다.

  시댁에서 내려오는 보이지 않는 [찬란한 유산]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