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인터뷰

기약 없는 망각의 시간을 어쩌나!

모과 2014. 4. 23. 15:33

 

제 나이 25세 때 45세의 젊은엄마는 교통사고로 그자리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니는 120살 까지 살아서 우리 집 앞의  이층집을  꼭 살거라고 했었어요. 집의 실제 가장 역할을 했던 어머니의 갑작스런 죽음은  가족을 깊은 슬픔에 빠지게 했고   공황상태로 만들었습니다. 

 

어머니는 시외버스 터미널 앞에서 작은 음식점을 했어요.  몸이 늘 피곤하고 아파서 가게 앞의 난전에서 할머니에게   익모초를 사다가  정차해 둔 시외버스가 저절로 굴러내려와 그자리에서 5명이 죽었습니다 .

 

저는 시골 중학교의 교사로  수업 중에  소식을 들었습니다. 교무실로는 사망으로 연락이 왔는데 교감선생님은  제가 충격을 받을 까봐  그냥 교통사고라고 전하게 했습니다.

 

눈물범벅이 되서 교실문을 열고 소식을 전해준 대학후배의 모습에서 저는 불길한 생각이 들었으나  최악의 상태는  생각하고 싶지가 않았습니다.  신기한 것은 수업 중에 잠시 멍해져서 학생들에게 가르치던 내용이 전혀 생각이 나지 않았던 순간이 있었는데 그때가 어머니가 돌아가신 시간이었습니다.

 

  60이 넘어서야 돈이 소중하다는 것을 알았다는  아버지 나이가 53세 때입니다. 아버지는 백내장 수술로 한 쪽 눈이 실명한 상태였고,  한달 후에 다른 쪽 눈을  수술해야하는데 그 눈도 어쩌면 실명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6.25때 월남해서  가족이 거의 없었습니다. 어머니의 친정은 너무 가난해서 장례식에 나설 사람이 없었습니다. 제 인생에서 가장 절박했던 시간이  왔을 때입니다. 아버지는 장례식을 마치고  한달 후 수술에 성공해서 실명은 안했습니다.

 

설상 가상으로  한살 아래 여동생도 병원에서 퇴원한지 며칠 안됐고 큰 남동생은 군에 간지 3개월 , 막내남동생이 고2였습니다.  어머니가  9월29일에  돌아가셨는데 국군의 날 행사 때문에 관보가 잘 전달이 안됐어요. 결국 외삼촌이 큰동생을 면회가서 데리고 왔습니다.  큰 남동생이 와야 어머니를 확인해야 장례식을 치룰 수 있기  때문이지요. 외삼촌은  남동생을  데리러 가면서 제게 교통비를 달라고 했습니다.

 

저는 7번 기절하면서  어머니가 다니던 교회의 교회장으로 장례식을 마쳤습니다. 그때는 몰랐는데  영안실도  마련하지 못하고  냉동실에 모셨던 어머니를 입관하고 다니던 교회에 들려서 기독교인 공원묘지에 모셨습니다. 모두  하얀 소복을 입었던 성가대원들과 장례식까지 동행한 많은 교인들에게 감사하다는 말도  

제대로 전하지 못했던 것이 후회됩니다. 

 

그후 한번도 효도를 못하고 어머니를 보낸 것이  깊은 상처로 남았습니다. 힘들게 대학까지 가르친 딸년이 졸업 전부터 심하게 아파서  마음 고생을 많이 시킨게 죄송해서 어머니를 가슴에 안고 살았습니다.

 

어머니를 잊게 된 세월이 10년이 넘게 걸렸어요. 꿈에 입관 때 본 모습인   온몸을 뭉대로 감은 어머니가 나타나더니 어느날은 방 한귀퉁이에 어머니가 서 있는 환상이 보였습니다.  제가 결혼을  하게 된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결혼을 하고  행복했던 날들도 밤에  어머니를 생각하고  마음으로  울었습니다. 두아들을 낳고 키우며 점점 어머니를 잊게  된 세월이 10년이 넘게 걸렸습니다.

 

그런데 단원고 엄마들은 어떻게 하나요?

 아직 자식을  만나지 못한 그어머니들에게 미안하고  안타깝습니다.그 엄마들이 견뎌야 할  아픈 세월을 누가 치유해줄 수 있을까요?

그 엄마들에게 자식들을  빨리  찾아주고  국가적인 차원에서 그분들을 치유해주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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