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영화

더 레이디, 여성지도자의 모델을 보여준 아웅산 수 치.

모과 2012. 11. 8. 10:07

 

영화'더 레이디'는  미얀마 (전 버어마 ) 의  비폭력 민주화  운동 지도자인 아웅산 수치의 실화를 영화화한 것이다. 

 

 나는 영화를  보면서 아웅산 수 치는 남편 마이클 교수가 없었다면   조국에서 민주화 운동을 할 수가  없었다고 생각했다.  '더 레이디'는  남편 마이클이 아내에 대한 헌신과 희생이 감동으로 다가온 영화였다.

 

아웅산 수 치의 아버지는  수치가 2살때 암살 당했다. 그후 가족은 버어마를 떠나서  주로 영국에서 거주했다. 아웅산 수 치(양자경역)는 옥스포드대학을 졸업했고  옥스포드대학교 사학과교수인  영국인 남편  마이클 에어리스(데이빗 듈리스역) 와 결혼해서 두 아들을 낳고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1. 아웅산 수 치, 버어마 8888 항쟁 때  민주민족동맹  총비서가 되다.

 

1988년 8월 8일 오전 8시 민주화  요구를 하는  대규모 시위가 있었다. 그러나  네윈 장군이 실각되자 마자 신군부 소마웅 장군은 다시 구데타를 일으켜서  정권을 장악했다.

 

그달 말에 양곤대학 역사학자들이 아웅산 수 치를  찾아와서 정치를 하기를 권유했다. 그녀는 어머니가 아파서  귀국해 있었다.

 

'아웅산 장군의 따님이 민주화를 이끌 수 있다.  국민들이 단결해서 지지 할 것이다'

 

 

 

 어머니가 위급해서 귀국했던 아웅산 수 치는  얼떨결에 정치가가 된 셈이다.

 

 

민족민주동맹을  설립 한 후  신군부는  그녀에게 가택연금을  명령했다.   정부에서는 그녀가 해외로 떠난다면 자유를 주겠다고 했다.

 

 

 독재자 소마웅 장군은  점술을 맹신 했는데  타로 카드 점술가가 ' 아웅산 조상의 영이 보인다고 말하고 먼 데서 왔으니 죽이지 말라'고 했다. 그는 점쟁이의 조언대로 했다. 그대신 그녀를 가택 연금을 시킨 것이다.

 

2.  15년 간의 긴  가택연금, 그리고 가족

 

아웅산 수치는  남편에게 편지를 쓴다.

 

'권력은 권력을 유지하기위해서 잔혹한 행위를 한다. 최악을 대비해서 최선을 다하겠다'

 

이때부터 영국인 남편 마이클의 감동적인 외조가 시작됐다. 그는 두 아들을 데리고  아내의 조국인 버어마로  간다.

 

 

독재군부는  어린 아들들이 보는데서 민주화  운동을 하기 위해 수치 집에 온 선량한 시민을 죽인다.

 

 

정부는 남편의 비자를 취소했다. 그는  영국으로 돌아 갈 수 밖에 없었다. 그가 아내에게 쓴 편지에는

 

' 내가 곁에서 지켜준다고 믿고 자기 자신을 잘 챙겨라' 했다.

 

 정부는 아웅산수 치의 집의 전화만 선을 끓어 놓고  아들들의 시민권도 취소하고 비자도 취소했다.

그러나 1990 년총선에서 아웅산 수치는 압도적인 표차이로 승리를 했으나 신군부는 외국인과  결혼한 여성은 지도자가 될 수 없다고 선거 무효를 선언한다.

 

 

민중들이 아웅산 수치 집으로 몰려오자 군사정권은 집을 포위하고 총을 들이댔다. 이후부터 긴긴 가택연금 상태가 연장되었다. 아웅산 수 치는 조국을 위해서  남편과 아이들을 만나기 어려워졌다.   교수인 남편 마이클은  자녀를 키우며 아내에게 큰용기를 주었다. 

 

 

 그는 '미얀마가 장애가 되는게 아니라 우리를 묶는 힘이 되었다' 말했다.

 

3. 노벨평화상을 수상하다.

 

남편 마이클 교수는 아내의 가택연금과 정치적인 핍박을  교수와 세계 정치가들에게 호소했다. 아내의 모든 기록을 정리해서 '노벨평화상'후보로 등록한다.

 

 

 

아웅산 수 치는 1991년 노벨평화상 수상자가 됐다.  남편과 두 아들이 대리 수상을 했다.

만약 영국인 남편이 아니었다면  이같이 대단한 내조가 어려웠을 것이다. 마이클은  사학과교수였고 바른 삶이 무엇인지 아는 훌륭한 인격의 사람이었다.

 

 

정부에서는 라디오 방송도 못 듣게 아웅산 수 치의 집의 전기를 끓었다. 그녀는 낡은 라디오에 밧데리를 넣어서  대리 수상 소감을 말하는 큰아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영화를 보면서 아웅산 수치 역의 양자경의 시종일관 담담한 모습이 가끔은 낯설었다.  그녀가 '철의 난초'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지만 모성애만은  다른 엄마와  같을 텐데 국민들에게 보여준 모습만 표현한 점이 아쉬웠다. 아웅상 수 치의 내면의 아픔에 대한 절절함이 보이지 않았다.

 

 

4. 암으로 투병 중인 남편이 사망해도 못 간 아웅산 수치

 

사랑하는 아내가  군사 독재에 맞서서   민주화운동을 하고  있는 것을 지켜보던 마이클 교수는  전립선암에 걸린다.  아웅산 수치는 남편에게 영국으로 가겠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아내에게 영국으로 돌아 오지 말라고 한다. 한번 고국을 떠나면 입국허가를 못받기 때문이다.

 

"당신이 돌아 오면 지금까지 투쟁한게 다 허사가 된다' 며 말리던 그는 53세에 사망했다. 두 아들을 걱정하면서 .......

 

* 실제 아웅산 수 치와  남편 마이클 교수

 

5. 2010년 자택 연금 해제, 2012년 국회위원 당선.

 

버어마의 존경받는 징군의 딸로 태어난 아웅산 수 치는  조국의 부름으로  평범한 주부에서 정치가가 됐다.

아버지 아웅산 장군은  60년간의 식미지였던 버어마의 독립운동을 하던 분인데 쿠테타를 일으킨 군부에 의해 총살 당했다.  어머니가 전 인도대사였기에 그녀는  부모의 뜻을 이어  애국적인 정치가가 될 수 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 아웅산 장군과 딸 아웅산 수 치(68세)

 

 그러나 영국인 남편 마이클이  아내의 조국을 위해서 헌신과 희생을 하지 않았다면  그녀는 버티기 힘이 들었을 것이다.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서  그녀가  개인적으로 잃은 게 너무 많다. 남편과 아들들에게 진 빚을 버어마(미얀마) 민주화 운동의 성공으로 갚아야 할 것이다.

 

* 2012년 국회위원에 당선된 아웅산 수치

 

2010년 가택연금에서 해제된 이웅산 수 치는 2012년 4월보궐 선거에 당선됐다. 그녀의 긴 기다림은 버어마의 민주화에  큰기여를 했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인 아픔과 가족의 희생을 딛고 그자리 까지 온  아웅산 수지의 애국심에 경의를 표한다.

 

양자경(51세) 이라는  배우의 노력으로 만들어진 '더 레이디'는  21세기 여성지도자의 모델을 보여준 영화라고 생각한다. 실화이기에 더 감동적이고  생각을 깊이 하게 했다.

대전에는 상영관이 드물어서 이제야 다운로드해서 본 영화이다.

 

 

 

*부탁의 말씀입니다 .

 

 아래  네모 창에 있는  view on위의  손가락을 꾹 누르시면 추천이 됩니다.

손가락 안의 숫자를 누르시면 더 많은 분이 제 글을 읽어 주실 수 있습니다.  로그인을 안 해도 추천하시면 됩니다.  구독을 원하시면 [구독+]부분을 누르시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