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영화

어머니, 지식인들을 부끄럽게 한 전태일의 어머니.

모과 2012. 9. 7. 06:00

 

며칠 전 9월3일이 이소선 여사의 일주기였다.  몸이 너무 작아서 소선이라는 이름을 지었다는 왜소한  83세의 할머니를 추모하러 전국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이소선이라는 이름보다는 '노동자의 어머니'라는 이름이 더 어울리는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여사 !

 

 

1. 배운자들에게 부끄러움을 느끼게 한  전태일.

 

 

나는 이분의 다큐멘터리  영화 '어머니'를 보기 전까지 부끄러움을 느끼지도 못한 인간이었다.

 

내가 영화 '어머니'를 보게 된 계기는  지난 달 대학동기 동창의 집에 가서 들은 말 때문이었다.  친구는  '전태일 평전'을 읽고 놀라서 우리들에게 말했다.

 

" 전태일이 평화시장에서 14시간 일하고 한 달에 받은 월급이 3,000원이었어. 그때 내 한달 용돈이 6,000원이었거든. 너무 놀라고 부끄럽더라. 점심시간도 30분 밖에 안주고 그것도 아끼느라고 굶는 사람도 있었데"

 

전태일이 분신 자살한 1970년 11월에   우리는  신촌에 있는 여대 캠퍼스에서 미니스커트를 입고  강의를 듣고 있었다.   그대학에 들어가기 위해서  서울의 여고생 중에 과외도 하던 시절이기도 했다.

 

42년 전이라서  지금은 아련해진 시절이지만 분명 신문과 방송에 크게  보도 된 사건이었다. 우리들 대부분은 우리와는 다른 세계의 사람들의 이야기로 그저 놀라기만 했을 것이다.

 

전태일 평전을 읽은 친구는 집이 잘 살아서 그당시 자가용이 두 대였다고 했다. 나와 다른 점은 나는 대학 4년동안 가정교사를 하면서 용돈은 스스로 해결했던 것이다. 나의 대학시절은 정신이  편하지 않았던  혼란의 시기였다.

 

 

 우리는 42년이나 지나서 잊고 있던 그사건을 친구에게 다시 듣고 그들의 급여와 처우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알게 됐다.  나는 나와는 다른 세계의 사람들이라고 생각한 비겁하고 무식한 지식인이다.

 

글쎄 지식인라고 말하기도 부끄러운 것은 대학 4 년중 겨울학기 3학기는 유신반대 데모로 학교에 휴업령이 내려서 제대로 공부도 못한 세대이기 때문이다.

 

2. 형이상학적인 고민을 했으나 미래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던 당시의 대학생들.

 

 

나의 고등학교와 대학시절은  개인적으로 남다른 가족사 때문에 고통을 받았던 시기였다. 그러나 배가 고파 본적도 잠자리를 염려해 본 적도 없는 시기였다. 부모님이 매일 다툴 수 밖에 없는 큰일이 생겨서 집안이 늘 불안했다.

 

나는 인간 본연의 모습과 근본에 대한 끝없는 방황과 고민을 했다.  형이상학적인 수많은 책을 읽으면서 내게 필요한 귀절만  보고 점점 더 염세적인 사람으로 변했다.

 

6,70년 대에는 대학을 졸업하면 대부분 취업이 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현실적인 고민은 덜했던 것 같다.

 

사람은 자기가 속해 있는 사회만큼 세상을 이해한다고 했다.  나는 우물안 개구리였고  졸업 전에 발병한 결핵 때문에 취업도 결혼도 못하는 처량한 신세였기도 했다. 우리집도 내가  취업을 해서 보태야 하는 정도로 가세가 많이 기울었을 때였다.

 

전태일열사가 살아있으면 65세이고 이소선여사는 84세이다. 전태삼씨가 환갑으로 나와 동갑이다 우리 어머니가 살아 계셨으면 81세이다.

 

우리  어머니도 무학이고 당신의 한을 자식에게 풀기 위해서 무척 가르치려고 노력을 했다. 37년 전에 어머니가 갑자가 돌아가신 후 나는  내 앞에 놓인 삶을 살아내느라 경황이 없고 투병으로 인해서 가족도 제대로  돌보지 못한 생활을 했다.

 

3. 전태일은 분신 전날 어머니를 찾아와서 부탁을 한다.

 

 

 

전태일은 초등학교 졸업후 17살에 평화시장  봉재공장에 재단사로 취직을 한다.  열악한 환경을 개선하려고 '바보회'를 조직한다. 다음은 다음위키백과를  참고로 한 전태일에 대한 기록이다.

 

**전태일

1948. 8. 26 경북 대구~ 1970. 11. 13 서울.

노동운동가.

1970년 11월 13일 열악한 노동조건에 항거, 분신자살한 평화시장 재단사 출신의 노동자이다. 1964년 17세의 나이로 평화시장 피복공장 미싱사보조로 취직했다. 1969년 재단사들의 친목모임인 '바보회'를 조직하는 한편, 근로기준법을 탐독하면서 평화시장의 노동실태를 철저히 조사, 그 개선방안을 노동청(지금의 노동부)에 제출하기도 했다. 이러한 일련의 행동으로 해고를 당했지만 1970년 9월 다시 재단사로 취직해 '삼동친목회'를 결성했다. 이들은 곧바로 설문지를 돌렸으며, 그 결과를 분석해 노동청에 '평화시장 피복제품상 종업원 근로개선 진정서'를 제출, 선처를 약속받았다. 그러나 시정을 약속한 기한인 11월 7일에도 아무런 소식이 없자, 그는 동료들에게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근로기준법 책을 화형하자"고 제의하여 13일을 시위날짜로 잡았다. 1970년 11월 13일 피켓 시위를 벌이기 직전에 경찰에 의해 강제해산을 당하게 되자 전태일은 분신을 감행, 화염에 휩싸인 채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절규하며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숨을 거두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11월 27일 청계피복노동조합이 결성되었다.

 

 

전태일은  어머니에게 11월 13일 오후 1시 평화시장 구름다리 밑으로  꼭 자기를 만나러 오라고 했다.사고 당일 이소선 어머니는 쌍문동 동네 방송으로 전태일의 분신소식을 알고 달려갔다.

 

전태일은 고통으로 죽어가면서 어머니께 노동자를 위해서 일해달라고 부탁을 한다. 꼭약속을 해달라고 큰소리로 대답을 해달라고 말하는 아들에게 어머니는 큰소리로 약속을 지키겠다고 했다. 그리고 아들은 죽었다. 그후 40년 , 어머니는 아들과의 약속 대로 노동자의 어머니가 됐다.

 

4. 이소선의 어머니의 삶을 역방향으로 조명한 다큐멘터리

 

다큐멘터리 영화 '어머니'는  2011년 9월3일  소천한 이소선 권사의 삶을 재조명하기 위해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형식으로 만들었다.

 

 부산의 연극인 백태현,홍승이부부와  대만의 저항연극인 왕모림씨가 연출한 '엄마! 안녕' 연극을 준비하는 과정도 담았다.

 

 

연출가 왕모림은 이소선어머니에  인상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자애롭고  평온한 마음이 보이고 여성의 강함을 느꼈다"

 

영화 속에서 이소선 여사는 시종일관 담담했으나 몸이 많이 아팠다. 이소선 어머니는 노동운동을 하면서 4 번의 감옥생활을 했다.  함께 데모하는 사람들에게는 늘 당부했다.

 

"우리는 모릅니다. 이소선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작은 몸집의 어머니는 혼자 책임을 지고 늘 감옥에 갔다.  아들과의 약속대로 노동자들의 편에 서서 저항했고  그들의 보호막이 돼 주었다.

 

5. 세상의 모든이들에게 보라고 권유하고 싶은 영화

 

 

나는 영화 '어머니'를 보고 나의 어머니가 떠올랐다. 그리고 이소선어머니의 일대기를 보고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나는 이시대를 위해서 한게 무엇인가?  의문도 들었다.

 

나의 인생살이가 고달프다고 투정도 하고 열심히 살기도 하면서 오직 내 앞의 인생에만 몰두하고 살았다.

이제라도 내가 이웃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해 보게 됐다. 

 

나는 나의 인생만 고달프다고 너무 엄살을 떤 것이 가장 부끄러웠다. 

모든이들이 이영화를 보고 자기의 어머니와  자기의 인생을 돌아 보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