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인터뷰

남편도 감동한 아내 친구들의 오래되고 깊은 우정

모과 2011. 10. 17. 06:32

 

나의 절친한 친구 명희와 승희가 오래 전부터 오고 싶어하던 덕산 시골집으로 왔다. 둘 다 서울 토박이들이라서  우리 시집의 본가인 충청도 깡촌같은 곳은 가본일이 없는 친구들이다. 나의 블로그를 즐겨찾기 해놓고 늘 읽고 있는 친구들은 우리 덕산시골집을 가고 싶어했다. 우리는 시골집에서  함께  자고 가까운 곳에 있는 안면도와 수덕사를 둘러 보기로 했다.

 

대학  1학년 때 만난 친구들이  평생  친구로  함께 간다는 것은  참 행복한 일이다. 학교 다닐 때는 매일 같이 다니고 일요일에도 약속을 해서 만나던  친구들은  결혼 전까지도 자주 만났었다. 그러나 결혼을 모두 하고 점점 소식이 멀어져갔다.

 

승희는 국제금융가인 남편을 따라서 외국생활을 10여년 해서  얼떨결에 소식이 끓어졌다. 승희는 방배동 카페 골목 뒤의 빌라에서  30년 째 살고 있다.  강남이 형성되지 않았을 때 큰오빠 집 근처로 이사를  가서 지금까지 살고있다..  

 

명희는 부천에서  34년 째 살고 있다. 부잣집의 맏며느리가 되서 대소사에 성실하게 임하고 시어머니의 병간호에 최선을 다 하느라고 친구들을 만날 수가 없었다. 명희의 시어머니는 8년 째 중병 중이시다.

 

나는 부산에서 사는 동안 인생의 깊은 굴곡을 건너야했기에 미쳐 친구들을 생각 할 수가 없었다. 각자의 마음 속에는  친구들은 늘  그리움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우리는 서로 가끔 전화로  소식을 전했다. 내가 대전으로 이사를 하고 서울로 공부를 하러 다니면서 자주 만나게 됐다.

 

2011년 10월 11일 남편과 함께 덕산 시골집에 가니 사방이 어둑어둑했다. 우리는 방을 깨끗하게 치우고 홍성 고속버스터미널로  친구들을  마중을 갔다.

 

 명희가 복지관에서  할머니들에게 공부를 가르치는 문해강사이기 때문에  강의를 마치고 강남에서 오후 4시 40분 고속버스를 타고 홍성에 6시 40분에 도착했다. 둘다 교회에 다녀서 주말엔 올 수가 없다

 

저녁 식사는 덕산의 유명한 식당에서 '벤댕이 찌개' 를 먹었다. 벤댕이찌게를 처음 먹는 친구들은 맛이 있다고 추가 주문을 했다.  참 다행이었다.

 

집으로 돌아 와서  과일을 먹으며 담소를 하다 남편은 다른 방으로 가서 일찍 잤다. 우리는  이불을 깔고 나란히 누워서 새벽 두시 까지  두서는 없으나 즐거운 이야기를 나누었다. 참 편하고 행복한 밤이었다.

 

명희 남편이 명희에게 보낸 문자가  재미있었다.

"희 시스터스(명희,승희,성희) 의 상봉을 축하하며 즐거운 시간을 갖기 바랍니다. 모과향기님의 남편에게도 안부를 전해주시고...."

 

신혼 초  우리 세 친구들의 남편도 함께 부부동반해서 승희네 신혼집에서 모였었다. 벌써 34년의 세월이 흘렀다. 우리는 모두 1952년 2월생 용띠들이다.  모두 27살에 결혼을 한 것도 같다.

 

위의 식탁에서 내가 한 것은 밥과 갈치를 구운 것 밖에 없다. 아욱국은 명희가 끓였다. 모두 시집 어른들이 만들어 준 반찬들인데 차리고 보니 정겨운 시골밥상이 됐다. 시골집에 내가 친구들을 데리고 오면 밥을 맛있게 해준다는  약속을 지켜준 시집 어른들이 고맙다.

 

 

식사 후에 남편은 시골집을 구경 시켜주었다. 아버님이 15평의 강당 모양의 별채를 만드셨는데 백두산 미송으로 내부를 만들어서 향기가 나는 방이다.

 

130년이 넘은   시골 집 안방 앞 마루에서 김성희(나), 박승희.  이명희가 19살 푸릇푸릇한  여대생에서 긴 세월을 살아내고  60세 초로의 실버들이 돼서 나란히 앉아있다.  

 

 남편은 1박2일의 마무리를 잘하고 마누라 친구들을 위해서 봉사할 마음으로 무장을 하고 있다.

 

돌담과 장독대 때문에 시골집의 운치가 있다. 장독대에 나란히 앉아서 명희,성희,승희 가 추억을 기록하느라고 예쁜 표정을 짓고 있다. 

 

" 아 ! 너무 예쁜 척을 한다!"

 

남편이 우스개 소리를 해서 모두 웃었다.

 

 

 

친구들에게 마을 입구까지 걸어 가면서 시골 동네와  논밭을 구경하라고 했다. 남편과 나는 집안 정리를 하고  차로 떠났다. 수덕 초등학교에서 친구들이 기다릴 것이다.

왼쪽이 승희이고 오른 쪽이 명희이다. 생각만 해도 그냥 좋은 친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참 행복한 일이다.

 

 

승희네 집은  대학 시절 우리과 친구들의  모임의 장소였다. 종로의 한옥 촌에 있던 승희네 집은 세 오빠와 승희의 친구들로 늘 북적였다. 승희 어머니는  경기도의 만석지기 집의 따님이어서 인심이 늘 후했다.  집에 오는 사람들을 꼭 식사 대접을 해서 보내셨다. 한 달에 쌀을 두 가마나 먹었다니 놀라운 일이다.

 

우리 과 친구들은 숙제를 할 때 여러번  승희네 집에 모여서 했다.  20여명이 승희 어머니가 해주시는 밥을 먹으면서 모여서 숙제를 했었다. 그 마음이 넉넉하고 좋으신 승희 어머니도 돌아가신지 오래 됐다. 우리 셋은 모두 부모님이 다 돌아 가신 점도 같다.

 

나는  대학 4년 9월에 발병한 결핵성 늑막염으로 대학부속병원에 입원을 했다. 그후 약 3년을 약을 먹으며 치료를 했다. (중간에 재발을 해서 ) . 나는 졸업시험을 못보게 된 상황이 됐다.  

 

그때 승희가 나의 엄마와  교수님들을 일일이 다 찾아 다니면서 부탁을 해주었다. 시험을 못보는 내가  리포트로 대신 제출하게 해주었다. 승희는 병원에 있는 나를 위해서  리포트도 대신 써주었다.

 

나와 승희는  경기도 소읍의 같은 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했다. 나는 남중에서 승희는 여중에서 근무했다.

 

 

큰아들이  서울로 유학을 가게 됐을 때 나는  큰아들과 승희네 집에 초대 받아갔다.   승희는 마치 잔치상 같이 크게 한 상을 차려주었다. 그리고 큰아들에게 구두를 사신으라고 10만원을 주었다. 그때(1998년)는  나의 인생에서 가장 힘이 들었던 때였다.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을 승희는 내게 만들어 주었다.

 

큰아들은 그때 일을 잊지못하고  가끔 고맙다고 말한다. 엄마 친구들에게 맛 있는 식사를  대접을 하고 싶다고 약속을 했다. 곧 약속을 지킬 것이다. 그날 돌아오면서  엄마 친구들은 수수한 표정과 차림인데 말하는 것을 보면 놀랄 정도로 유식하고  교양이 있다고 해서 웃었던 기억이 있다.

 

 

명희는  대학 1학년 입학식 다음날  강의실을 찾으며 알게 된 첫번 째 친구였다. 둘다 서울에서 성장했으나  이대는 입학시험을 보면서 처음 간 곳이다. 둘 다 고지식하고 성실한게 공통점이다.

 

명희는 내가 시골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하던 때 늑막염이 재발해서 다시 치료를 받아야 할 때 도와준 친구이다. 두 달간 내 대신 임시교사를 해주었다. 명희는 교사가 될 의사가 없어서 교직을 이수하지 않았다.

 

명희는 방언 사전을 집필하는 서울대 교수의 조교를 하다가 그 교수님의 친구 교수의 며느리가 됐다. 명희의 시아버지는 원광대 대학원장을 하신 학자이시다. 명희는 맏며느리로 최선을 다하고 살고 있다.

 

명희는 교통사고로 갑자기  돌아가신 친정엄마의 장례식이 있던 교회에 와서 나를 살펴주었다. 25세의 나는 정신을 못차리고 자꾸 기절을  하면서 힘들게 엄마의 장례식을 치루었다. 내가 가장 힘이 들 때 함께 있어준 친구가 명희였다.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들 때 함께 해 준 친구들이 명희와 승희였다.

 

 

명희의 남편이   집 전화로 전화를 한   내게 반갑게 인사를 하며 한 말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

 

" 아! 이명희 대단해요. 내 마누라지만 정말 다이아몬드같은 여자입니다. 집사람이 맏며느리 노릇을 잘하니 집안이 다 평화롭고 좋습니다 . 동생들이 먼 도시에 살아도 집사람이  어머니에게 잘하니 모두 편안합니다.나는 정말 마누라를 잘 만났어요. 나만 동창회에 참석을 해서 늘 미안했는데 집사람도  동창 모임에 간다니 참 좋습니다 . 자주 만나세요"

 

명희의 시어머니는  치매로 고생 중이시다. 친구 명희가  밝히기를 싫어하지만 치매는 모든 집안의 큰문제라서 나는 정말 명희의 이야기를 하고 싶다. 모두 읽고 느끼기를 바라서이다.

 

 

명희는  치매의 먼 길에 들어 선 시어머니를 집에서 3년을 모셨다. 주말이면 시동생 부부와 함께 시어머니를 모시고 가까운 곳으로 여행을 다녔다.  어느 날은  미술관과 고궁으로 모시고 다녔다.

 

어머니의 병세가 깊어지고 가족들도 알아보지 못하게  된   상태가 되서 노인 병원에 모셨다. 그후 5 년동안 매주 토요일에는 시어머니를 찾아 뵙는다.

 

명희는 매주 일 주일분의 죽과 과일과 (키위,토마토즙),요플레 , 과자와 요양사에게 줄 과일을 준비해서 남편과 함께 간다. 전복죽, 번데기죽, 근대 소고기죽, 보신탕을 갈아서 만든 죽, ..... 고단백인 식품으로 죽을 정성껏 만들어서 요일 별로 분류해서  통에 넣어가지고 간다.

 

" 사람이 어떻게 죽만 먹고 사냐? 과일도 먹고 주스도 먹고 해야지 나는 우리 시어머니에게 노인 병원에서 주는 죽만 드시게 하고 싶지가  않다. 내가 최선을 다하는 것은 나중에 후회를 하지 않고 어디서라고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야"

 

명희 시어머니는  큰아들의 얼굴만 알아보신다고 했다. 우리 시어머니는 이제 치매의 길로 들어 가셨다. 그래서 나는 명희의 조언을 듣고 그대로 행하고 싶다.

 

" 너는 네 할 일만 하면 돼. 어떤 동서가 오든지 말든지 그대로 두고 네가 일주일에 한 번 가는 것만 성실하게 지켜라. 안 오는   사람들은  말을 해서 통할 사람들이 아니니까. 네가 할 수 있는 만큼만 성실히 하면 된단다."

 

명희는 남편에게 고맙다고 여러번 말을 했다. 친정 어머니도  말기암 상태에서 6개월을 명희가 집에 모셨었다. 명희는  남편이 처가 식구들도 가족같이 잘해주어서 고맙다고 말했다. 부부는 상부상조해야지 일방적이면 안되는 것이다.

남편과 친구들이 안면도  산림욕장으로 걸어 가는모습, 나는 오른쪽 폐가 없어서 숨을 쉬기가 힘이 들고 온몸에 땀이 났다. 너무 오랜만에 걸어서 그렇기도 했다. 앞으로 자주 걸어야겠다.

 

 

 안면도에 명희는 남편과 시어머니를 모시고 왔었고 , 승희는 두 딸과 사위들과 같이 왔었다고 했다. 시골집에서 45분 거리인 나만 이제야 자세히 걷고 있다. 친구들 덕분이다.

 

 

앞으로 나갈 때 찍어 달라고 해서 정성껏 찰칵, 아주 멋지게  나왔네^^

 

승희는 감상선암 수술을 받고 ,두 번의 항암치료를 받았다. 의사는 상처가 깨끗하다고 1년 후에 보자고 했다. 참 다행이고 기뻤다. 승희는 14년 전에 남편을 먼저 보내고  두 딸을 잘키워서 국제 전문가로 만들었다.

 

남편이 남은 가족들을 위해서  경제적인 준비는 다해두었지만 승희는 수학 과외 선생님을 계속하며  두 딸을 모두 다 결혼을 시켰다. 참 대단한 친구이다. 지금은 교회에서 봉사를 하면서 노년을 보내고 있다.

 

승희,명희,성희가 친구가 된 이유는  각자의 인생에 책임과 의리가 강한 때문이다. 각자 모양만 다를 뿐 자기 앞에 온 고난을 최선을 다해서 극복한 점이 같다고 생각한다. 초록은 동색이고 친구는 끼리끼리 만나는 것이다.

 

 

수덕사 앞에서 '산채정식'으로 점심을 먹었다. 1인분에 15,000원이다. 더 좋은 것으로 대접하고 싶었지만 산채정식이 제일 입맛에 맞았다. ( 제 남편의 손입니다^^)

 

 

 

우리는 이제 노년을 친구들과 자주 만나며 보내자고 했다. 서울 토박이들이 서울 읍성도 선유도도 못가봣다고 하니 기가막힐 일이다.우리는  창경원과 비원도 가본지가 30년이 넘었다.

 

봄,가을에  1박2일 정도 우리나라의 좋은 곳으로 여행을 다닐 것을 약속했다. 우선 17일(월) 에 이대 자연과학대 동창회 야유회에 모두 참석하기로 했다.

 

내 나이 60세 , 19살 대학 1학년 때 만난 친구들과의 고운 우정을 죽는날까지 유지하며 행복하고 싶다. 나는 진심으로 나의 친구 박승희와 이명희를 자랑하고 싶다. 그리고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다.

 

1박 2일동안 아내의 친구들을 위해서 수고한 남편에게 고맙다고 말했더니 .....하하하

 

"나는 김성희 시다바리 하는게  당연하지.  당신이 좋으면  나도 좋아. 당신 친구들  참 대단한 사람들이야 "

 

 이런 남편의 단순하고 순박한 마음이 나는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