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인터뷰

나는 매주 월요일 행복을 배우러가는 곳이 있다.

모과 2011. 10. 31. 06:00

 

 

일요일 오후 4시쯤  큰시누이 형님에게 전화가 왔다.

 

"자네 지금 뭐 하나?"

" 아무것도 안 하는데요?"

"그럼 지금 큰언니 (큰동서 형님)집으로 오게"

"왜요? 저녁 먹으러요?"

"응 . 내가 펄펄 뛰는 게를 사왔어"

" 저 석교동에 다녀오면 밤을 새고 일해야하는데...... 갈게요"

" 자네는 안부르려다  내 동생에게 게를 가져다 주라고 부르는거야. 호호"

" 언니! 저 안부르면 삐져요? 꼭 부르셔야지요"

" 호호 그냥 하는 소리야. 막내고모에게 전화해서 고모네 차 같이 타고와"

 

 

토요일에  시누이 형님은  남편 친구들과  서천에 모여서 1박을 하고 놀다 왔다. 요즘이 게가 한창인 철이라고 5kg을 사왔다. 크고 맛난 게를 먹으며 부모님이 생각이 나서 사왔다고 했다.

 

그점은 나도 그렇다. 무슨  특별한 음식을 먹으면  시집식구들이 생각 난다.  물론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대전에 이사를 오고 내 스스로 일주일에 한번 시집에 가기로  약속을 했다. 오랜 객지 생활을 마치고  남편의 고향으로 이사를 오니 가족의 중요함을 더 느껴서였다.

 

* 큰아주버님이 만든 의자에 앉아서 식사를 하는 어머니와 서서 게를 먹기좋게 자르는 막내시고모님

 

시어머니는 평생 동안  몸이 아파서 남에 대한 배려를 할 수가 없었다. 이제는 머리 속에 지우개가 생겨서 아주 오래된 기억만 생각을 하고 말씀하고 있다. 같은 말을  계속하시는 어머니가  때론 귀찮고 매주가기로 한 약속을 지키기 싫었던 적도 있었다.

 

나는 매주 월요일 시집에 가는 날은  마치 학원에 다니는 것같이 생각하고 꼭 가려고 노력했다.  학원에 가는 데 싫고 좋고가 어디있는가?  과거에 시어머니가 섭섭하게 한 일은 잊어버리는 게 서로 좋다고 생각했다. 나 또한 시어머니에게 부족한 며느리였을 테니까  과거는 모두 잊기로 마음 먹었다.

 

내가 아무리 어머니에게 섭섭한 일이 있었다 해도 다 이해가 될 일이었다. 남편이 자라면서 외롭고 쓸쓸했었던 것에 비할 일이 아니다. 어머니는 남편이 10살 때 오신  새어머니시다.

 

남편과 시누이형님이 지극정성으로 효도를 하는데 나는 감동을 받았다. 사람의 기본도리를  하고 사는 내남편이 존경스럽다. 나는  집에서 블로그에 글을 쓰는 일 말고는 하는 일도 없는데  일주일에 한번 시집에 가는 일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시누이 형님과 막내고모님이  게를 손으로 모두 먹기 좋게 자르고 있다.

 

큰형님과  시누이 형님이 차린 저녁 밥상에 나는 숟가락 하나만 더 놓고 앉아서 먹었다. 설거지는 나와 띠동갑인 막내 아가씨가 다했다.

 

 나는 지난 번에 부모님을 모시고 간 '영평사 구절초 축제'에서 찍은 단체 사진을 크게 확대했다.  사진을 액자에 넣어서 아버님께 드렸더니 무척 좋아하셨다. 액자 뒤에   영평사에 간 날짜를 적어 달라고 하셨다. 10월 2일 (일)에 다녀왔다.

 

 

"아버님 ! 영평사 갔을 때 옥수수 한 개에 2,000원씩 5개에 10,000원  구절초차 2잔에 6,000원 모두 16,000원을 썼는데 비싸다고 하셨지요?  또 그러시면 우리끼리 갈거예요. 부모님들이 비싸다고 하셔서  젊은 사람들이 자기끼리 가는거예요 "

 

아버님이 아무말씀도 안하셨다. 그때 큰아주버님이 액자의 사진을 보며 말했다.

" OO(남편이름)이가 효자네요"

"  에비는 효자예요. 아버님 속을 썩여서 잘해야해요. 에비는 바빠서 저와 둘이는 절대 안가요. "

"속을 썩였어도 그렇지"

 

사실  큰아주버님이야말로 효자이다. 어버님의 말씀을 거역한 적이 없다. 집안의 대소사에 다 참석하고 표시가 나지 않는 장남의 역할을 묵묵히 하고 있다.

 

큰동서 형님은 말할 것도 없다. 30대에 자궁적출 수술,  허리 디스크수술,  맛을 전혀 느낄 수가 없어서 귀를 7시간의 대수술을 하고 고쳤다. 어머니와 10살 차이인데 종부의 역할을  말없이 해주어서 집안이 편하게 돌아가고 있다.

 

단지 안타까운 것 은 어머니가 50년을 계속 아프시니 큰동서 형님도 어머니 못지않게 아픈데 관심을 못받고 있다는 것이다. 큰동서 형님이 말없이 책임을 다하고 있는데 나같은 졸병이야  복종하며 따르는게 사람의 도리라고 생각한다.

* 큰동서 형님이 만든 밑반찬들 ,언제 누가 가도 바로 한 상을 차려낼 재료가 냉장고에 보관이 돼 있다.

 

40대에 남편은 하는 일마다 실패를 해서 가족을 힘들게 했다.  우리는 그때 순조롭게 못살아서 늘 아버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60이 넘도록 아버님이 우리를 걱정하게 하는 불효를 하고 있다. 그점은  나도 죄송하게 생각을 해서 매주 월요일이면 시집에 가서 저녁을 해서 함께 먹고 돌아 왔다.

 

3년을 그렇게 했더니 어느새 정이  깊게 들었다.   우리동네는 월요일마다 아파트에 장이 선다. 나는 그곳에서 족발이나 생선을 사서  버스로 1시간 거리의 시집으로 간다.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아버님 생각이 난다.  어머니는 편식이 심해서 드시는 음식이 거의 없다.

 

내가 매주 한번 시집에 간다면 대부분 비슷한 반응을 보인다.

"대단하네요. 그러기 어렵잖아요"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학원에 다니거나 수영을 배우거나 모두 주 2~3회 간다. 많은 주부가 뭔가 배우러 다닌다.  나는 일주일에 한번 행복을 배우고 행복을 저축하러 시집에 갈 뿐이다.

 

나는  시집식구들에게 배운 사랑을  내 며느리들에게 되돌려줄 것이다. 사랑은 내리사랑이지 치사랑이 되기는 어렵다. 나는 매주 시집에 가서 아래 사람을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고 온다.

 

"아버님 ! 다음에는 청남대에 가요.  여기서 가까워요"

"청남대?"

"네 . 대통령 별장이었던데요"

 

막내 고모님댁은 우리집에서 가까운 관저동 원앙마을 1단지에 사신다. 돌아오는  차에서 고모님은 말씀했다.

"다음에 청남대에 갈 때는 우리도 꼭 같이 가야 해 "

" 네 꼭 같이 가요"

 

막내 고모부님은 집에다 데려다주며  텃밭에  손수 농사를 지은 호박고구마 한 박스를 주고 가셨다.

 

** 저는 학원에 다니는 것으로 생각하고  매주  월요일 시집에 갑니다. 월요일은 시집에 가는 날로 정하니 오히려 그날이 기다려집니다. 여러분들도 그렇게 해보세요.  과거에 시어머니에게 당한 섭섭함 때문에 시집과 멀어진 분은 복수를  하는 것밖에 안됩니다.  가끔 할 말은 솔직하게  해도 다 귀엽게 봐주십니다.

저는 대전으로 이사를 와서 시집식구들과 진정으로 가족이 된 게 제일 기쁩니다. 사람사이에 사랑과 배려가 주는 행복을 체험하고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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