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교육

한 부모 가정의 훌륭한 자녀교육

모과 2011. 5. 24. 06:00

 

 나는 한 부모 집안의 자녀교육에 큰 문제는 없다고 생각한다.  절친 했던 친구 승희가 46세에  남편과 사별하고 2녀를 훌륭하게 교육을 시킨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승희의 막내딸은  승희의 생활을 잘 알고 있는 대학동기동창이  자기 언니의 아들을 소개해서 사위가 됐다. 맏딸은  승희가 다니는 교회의 목사님이 교회의 청년 중에 소개해서 결혼시켰다.

1. 남편에 대한  아름다운 추억을 자녀에게 말해 준다.

 

국책은행에 근무했던 남편의 근무지를 따라서  승희는 싱가폴 쎈프란 시스코,, 뉴욕에서 생활했다. 뉴욕에서 발병한 암때문에 투병생활을 하다  별세한 남편의 관을  비행기에 싣고 친구는 돌아 왔다. 

" 끝까지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나는 어차피  갈 사람이니  당신 귀국할 때 필요한 물건 사가지고 가"

친구의 남편은  거절하는 친구 대신에  같이 귀국하는 회사 동료 부인에게 부탁해서 필요한 물건을 다 사게 했다. 두 딸의 나이가  18세 ,19세였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다행히 승희의 남편은  맏딸이 6개월 전에 귀국해서  고3으로 편입해  다니다 이화여대에 합격한 소식을 듣고 별세했다.

 

승희의 남편은  남은 가족을 위해서 생명보험을 들어 놔서 사는데 지장이 없게 해둔 것을 사후에  알게 됐다. 친구는 동네 초등,중학생들의 수학과외를 가르치며 교회에 열심히 다녔다.  교회의  가난한 집의 아이들은 수업료를 조금 받고 ,소개받고 간  잘 사는 집 아이들에게는 조금 더 받았다고 했다.

 

2.  시집의 경조사와 명절에 꼭 참석했다.

 

승희의 시집은  강원도 원주이다.  남편이 없어도 시집의 모든 경조사에 모두 참가 했다. 추석과 설 명절에는 꼭 큰집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갔다. 딸들에게 사촌의 중요함과 아빠 핏줄에 대한  끌림을 느끼게 하기 위함이었다.  두 딸을  다 결혼시키고 난 후 소감을 친구는 이렇게 표현했다.

"아 ! 나는 이제 죽어도 되겠다고 생각이 들더라. 그만큼 내겐 두 아이를  교육시키고 결혼시키는 문제가 부담이 됐어"

 

아빠를 닮아서 두 딸이 모두 늘씬하고 멋져서 길거리 캐스팅을 여러번 당했다.그러나 승희는  엄한 엄마였다. 아니, 엄마의 성실한 삶을 지켜본 두 딸도 엄마에 대한 의리를 지켜서 바르고 성실하게 자랐다고 생각한다.  두 딸 모두 직장에 다니고 있다.

 두 딸모두 결혼 시킨 후, 큰 시누이가 " 언니! 존경해요" 라고 말해 주었다고 했다. 두 딸의 고모부 중에는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쓴 유명한  교수도 있다.

 

3. 어려움에 처한 형제를  기꺼이 도와 주었다.

 

내 친구 승희는  I M F로 사업이 힘든 오빠의 자식들에게 등록금을 다 내주었다.  2명의 조카에게 모두 그렇게 했다.  어려운 집 아이들의   등록금을 내주는데  조카의 등록금은 당연히 내주는 것으로 알았다.  한동안 생활비도 도움을 주었다. 몇 년 전 그 오빠가 간이 나빠서 아들의 간을 이식 수술하는 비용도 승희가 많이  내주었다.  더 대단한 것은  32명의 사촌들이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서 그 오빠의 수술비를 내준 것이다.

 

승희의 집에는 늘 사람이 들끓었다. 사람을 좋아 하고 대접을 하기 좋아하는 승희의 성격 탓이다. 고등학교   동기 동창회장, 대학교 동기동창회장, 교회 여신도 회장을 순서대로 하면서 자기를 긍정적이고 바른 곳에 데려다 두었다.  해외선교부에 가입해서 딸들을 통역인으로 함께 가서 해외선교를 했다.

 

승희는 언젠가  나의 큰아들이  대학에 입학했을 때 우리를 초대해서 크게 한 상 차려서 대접하고 구두 티켓을 준 친구이다.

 

4.  노년을  신앙생활로 보내는 친구

 

그친구는 올해 60세이다.  14년 만에 전화한 내게 그녀는 씩씩하게 말했다.

" 성희야!  내가 항암 수술을 받으려고 입원했다가 퇴원하고 집에 온지 일 분 만에 네가 전화를 했다"

'뭐? 너 무슨 암 수술을 받았어?"

" 응. 올해 1월에 갑상선 암수술을 받았고 첫번 째  방사선 치료를 받으려고 2박3일 입원했다가 지금 퇴원했어"

 

절친한  명희와 내가  승희네 집에 갔더니  방배동의 복층 빌라 에서 30년 째 계속 살고 있었다. 전화번호만 바뀌어서 서로 연락이 끓어진 것이다.

"너희 둘은 서로 연락을 하고 살았니?"

"아니 우리 둘도 서로 연락이 끓어졌는데 내가 대전으로 이사를 오면서 이제 다시 연락하고 너한테 온거야"

 

명희와 나는 무척 승희에게 미안했다.  돌아 오면서 우리 둘이는 깊이 반성했다. 친구는 갑상선암이 임파선까지 퍼져서 목의 앞쪽을 거의 다 절개한 수술 흉터를 특수 반창고로 길게 붙이고 그위에  머플러를 했다. 애완견  두 마리와 함께 혼자 살고 있었다.  주말이면 딸들과 사위들이 교회에 참석하고 함께 시간을 보내고 간다고 했다.

 

강아지들이 씨끄럽게 짓을 때마다 '엄마! 예배 드린다" 하면 두 마리의 개가 순식간에 쇼파 밑으로 기어 들어가서 조용했다. 참 신기한 일이었다.

 

" 항암 치료를 받으면 먼저 손등이 터. 그다음에 혀가 갈라져,그 다음에 손등의 핏줄이 다 겉으로 나와. 그리고 속이 메슥거려. T V가 아래 위로 흔들릴 정도로  어지럽단다. 일주일이나 그래 ."

 

승희는 명희와 내가 궁금한 것을 순식간에 다 말 해 주었다. 매일 새벽기도를 하며 하루를 시작하는 나의 친구 승희 ! 대학시절에 우리는 20명이나 승희 집으로 몰려가서 함께 숙제를 하곤 했다. 군수의 따님이었던 승희 어머니는 그 많은 친구들의 밥을 다 해주셨다.

승희의 넉넉한  마음은 친정어머니 에게서 나온 것이다. 승희의 생일이면  우리를 초대해서 한 상 거하게 차려주시곤 했다. 이미 돌아 가신지 오래되셔서 그 은혜에 보답을 못하고 있다.

 

혼자된 후 승희의 인생의 고단함은 갑상선 암으로 나타난 것 같다.  요즈음 갑상선 암은 암축에도  안든다는데 씩씩하게 극복하고   교회의 여신도 회장답게 간증을 멋지게 하고 다녀라. 반갑다. 그리고 씩씩해서 고맙다.  사랑한다! 박승희!! 아! 닭살 멘트~~

 

** 이글은 대학 동창 박승희와 전화 통화로 허락을 받고 실명으로 씁니다. 내 친구 참 괜찮은 여성이지요? 저는 승희가 제 친구인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큰아들이 귀국하면 꼭 식사 대접을 한다고 합니다. 지금 승희는 다니는교회에서 바자회를 한다고 자기가 총 대빵이라서 바쁘니 바자회끝나고 만나자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