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인터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임종의 모습

모과 2011. 3. 22. 12:57

이글은 2009년 5월7일에 임종을  준비할 정도로 위급했던 시작은아버님에 대해서 썼던 비공개글이었습니다.

 

저는 어제 ( 2011년 3월 21일 오후 11시 15분 ) 남편과  함께  작은 집에 가서 임종을 보고 왔습니다. 3남2녀의 보기 드문 효도로  수명을 2년이나 연장하시고  81세 봄날에  평온하게 세상을 떠나신 작은 아버님 영전에 이글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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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아버님은  허리디스크 수술을 한 후 혼수 상태가 돼서 종합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정밀 검사를 하니 [혈액암]으로 판정이 됐다. 골다공증으로 허리의 뼈가 내려 앉아서 아픈 것을   수술을 했으나 다른 쪽이 더 내려 앉은 것이다.79세의 노인이여서 체력 소모가 너무 많았다.

 

 우리가 가니 혼수 상태에서 좀 나아지셔서  문병 간 사람들을 알아보셨다.

코에는 산소 줄을 ,양쪽 팔에는 영양제와 식사  대용액을  꽂고 ,소변 줄까지 네 개의 줄을 걸고 혀가 말려들어 가서 말씀을 못하고 계셨다.

 

 

종합검사 결과 작은 아버지의  머리 끝까지 칼슘이 다 빠져 나갔다고 한다.남자도 골다공증이 심한 것이  놀라웠고  건강해 보이시던 분이 상태가 갑자기 나빠지신 것에 크게 놀랐다.

 

작은 집에는 3남 2녀가 있다.아들,딸, 아들, 딸, 아들 순서이다.큰 며느리는 의사가 없는 벽촌에 보건지소장(간호사)이다.대전에서  1시간 거리의 사택에서 살고 있다.

 

작은 아버지가 병원에 입원을 하는 날 부터 큰아들과  며느리가 병상을 지켰다.물론 간병인을 두었지만  큰 아들이 낮에 밤에는  큰며느리가 간병을 했다.다른 형제들은 안산, 인천, 이천, 부산에 흩어져서 살고 있지만  작은 아버님이 위급하시다는 소식을 소식을 듣고는 모두 달려와서  병상을 지키고 있다.

 

작은 아버님은 초등학교교장으로 정년퇴직 후  시댁과 5분 거리의 주택에서 작은 어머니와 두 분만 살고 계셨다

 

작은 집 큰 아가씨는 10살  부터 큰 수술을 자주해서  일어서 있거나 누워있을 수 밖에 없다. 큰아가씨는 특별히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다.작은 아버님은 정년 퇴직 후에 큰아가씨와 살고 싶다고 말씀하셨으나 내외 분이 모두 병약해지셔서 잠시 다녀 올 수밖에 없었다.

 

 큰아가씨는 혼수 상태에 있는 아버지를 쓰다듬으며 병원에 있는 성수를 받어다 뿌려 드리며 울부짖었다고  들었다.(대전 성모병원에 입원하셨다)

 

" 아빠! 아빠 ! 일어나! 왜 이러고 누워 있어! 아빠! 아빠! 내가 얼마나 아빠를 사랑하는 줄 알지? 아빠! 아빠! 사랑해! 사랑해!"

 

 50이 넘은  딸은 울면서 아픈 내가 먼저 죽어야 한다고 했다. 큰 아가씨는 거의 실신 상태까지 갔다.

 

 

의사가 회생이 어렵다고 해서 장례식을 준비하려고 작은 집 손주 며느리가 근무하는  개인 종합병원으로 옮겼다.중환자실에 계셔서 문병도 안됐는데 병원을 옮기니  가족들이 간호하는 것을  허락해 주었다.

 

둘째,셋째 아들이 밤을 새고 작은 아버지의 몸을 주물러 드리며 거즈에 물을 묻혀서 입에 흘려 넣어주었다. 침상 양 쪽에 있는 간이 의자에 마주 앉아서  아버지와의 일을 추억하며 밤을 지샜다.

 

다음 날 시고모님이 가니 둘이 다 눈이 퉁퉁 붓도록  밤새 아버지를 바라보며 울은 것 같다고 했다.

 

 우리 아버님은 아침에 출근을 하시며 병원에 들리고,  퇴근하고 들리셨다.아버님은 87세이고 서울서 내려온 고모님은 85세인데 두분이 함께 정성껏 문병을 다니셨다.

 

 

 

자식들과  형님과 누님의 정성이 하늘을 닿았는지 말려 들어갔던 혀도 풀려서 입 밖으로 내밀 수 있고 정신도 맑아지셨다.문병을 온 사람들도 모두 알아 보셨다.

 

자녀들은  작은 아버님을  4인용 병실을 모두 빌려서  그 곳으로 모셨다.자식들은 2인 1조로 작은 아버지를 지키고 낮에는 간병인을 재웠다.낮에는 여자들이 밤에는 아들들이 침상을 지키며 온 몸을 주물러드렸다.

 

 

우리 큰 아주버님은 종손으로서 하루 밤을 새며 작은댁 서방님들과 함께 간병을 했다. 주말에 시골에 가서  쉬지 않고 일을 하고 돌아 오자 마자 가서 병실을 지켰다.큰 동서 형님은 환자를 간호하는 사촌들이 먹으라고 김밥을 많이 말아서 가지고 갔다.

 

 아버님은  병원으로 문병을 하시고 회사에 갔다가 퇴근 후에 다시 병원에 들리시고 집으로 가셨다.

 남편과 나도 일을 마치면 가서 뵙고 돌아 왔다.

 

 

작은 아버님은 평생을 교직에 계셨고 초등학교 교장을 끝으로 정년퇴직하셨다.자식 사랑이 대단하셔서 3남 2녀 자녀 모두에게 성경을 직접 붓글씨로 써서 병풍을 만들어서 준 분이다. 작은 집은 모두 천주교인이다.

 

 

 

막내 서방님은 교사 발령이 부산으로 나서 동서와 부부 교사이다.부산의 중학교에 근무하면서 동료 교사의 소개로  교사 발령을 대기중이었던 동서와 만났다.대전 아가씨와 결혼 할 것을 바래서 반대를 했는데 두 부부가 부모님께 약속을 하고 허락을 받았다.

 

여름 방학과 겨울 방학 동안은  학교에 가는 날을 빼고는 모두 시댁에서 지내겠다는 것이다.결혼을 한지 15년이 됐는데 그 약속을 계속 지키고 있다.초등학교 교사인 동서는 부산 교대를 나왔는데 4녀 2남의 장녀였다.친정 근처에 살면서 자녀를 친정 부모님께 맡기고 자주 다니므로 방학 때 만큼은 시댁에서 꼭 보내고 있다.

 

 작은 집 형제들이 공과금을 다 자동 이체로 내드리고 있다.

 

작은 아버님이 연금을 받으므로 두 분이 생활을 하시는데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점은 없었다.그래도 한 가지 후회가 되는 것은 부모님께 용돈을 못 드린 것이라고 큰 서방님이 말했다.

 

나는 이 모습들을 보며 대전으로 이사를 온 것이 잘된 일임을 느끼고 있다. 시댁의 효심은 대대로 내려오는 유전인자 같이 대단하다.

 

시아버님이 퇴근을 하고 돌아오면 바로 할아버지 방에 가서 매일 2시간 씩 옛 이야기를 들으셨다.시할아버님은 99세까지 장수하시다 딱 한 달 편찮으시다 돌아 가셨다.

 

내 남편도 그렇다. 4년 째 주말마다 아버님을 모시고 시골집에 갔다 온다. 나는 부모에 대한 효도도 보고 배우는 것임을 깨닫고 있다.

 우리 가족이 아버님에게 제일 걱정을 많이 드렸으니 부모님께 사랑의 빚이 너무 많다.대전에 살면서 조금씩 갚아 가야 할 것이다.좋은 시댁 식구를 만난  나는 자주 감사함을 느끼고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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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이후 몸이 급격히 좋아 지셔서 퇴원하셨습니다. 작은 어머님(현82세)이 세끼 따뜻한 진지를 해드리고 지극정성으로 보살펴드렸습니다. 평생 작은 어머님이 더 많이 편찮으셨는데  긴장하셔서 그런지 적극적으로 병간호를 하셨습니다.

 

 오남매가  매주 와서 뵙고 가고 한 달 전부터는 매일 한 명씩  돌아 가면서 밤을 새고 간호를 했습니다. 안산과 부산에 살고 있는 두 아들은 느낌이 이상하면 밤늦게라도 달려와서 뵙고 갔습니다.

 

 

어제 임종을 하실 때까지 6시간을  임종준비 (천주교식 기도문과 찬송낭송) 를 했습니다. 중간중간 자녀들이 아버지의 뺨을  두손으로 감싸고  뽀뽀를 하며 '아버지 사랑합니다 ! 아버지 고맙습니다! " 그렇게 계속했습니다.

 

임종 후 몸이 식을 때까지 가족들이 연도를 하며 3시간을 기도와 찬송을 했습니다. 그후 대전 성모병원 영구차가  왔습니다.

 

"아버지 사랑합니다! 아버지 고맙습니다!

 

마지막으로 다시  공손하게 귀에 대고 속삭이며 이마에 계속  뺨에 뽀뽀를 하며 손을 만져드렸습니다. 그렇게 작은 아버님은 평온하게 가족들의 배웅을 받으며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고 박경순안드레아 !

작은 아버님의 명복을 빕니다.

 

** 장례식 기간에 글을 쓰지 않습니다. 제 블로그를  방문해 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