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교육

자녀 앞에서 남편과 시집 식구들의 흉을 보면 안되는 이유

모과 2011. 3. 5. 07:00

 우리 아이들이 어릴 때는 나도 젊어서 호기심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았다. 

 그당시  아파트의 아줌마들은 자녀들을 모두  초등학교에 보내고  한 집에 모여서 차도 마시고 살아 가는 이야기를 종종하였다.

 

오고 가는 대화 속에  자녀교육의 정보도  얻고 살림의 지혜도 배우곤 했다. 아파트가 대부분같은 평수의 같은 라인이나 옆의 라인에 사는 주부들이   자주 모여서  친구가 되었다.

 

1. 시집 식구들의 흉은 마음놓고 보는 주부들

 지금 돌이켜보면 우리들도 모두 젊은 30대 엄마들이어서 그중에 철이 없는 엄마들도 있었던 것 같다.  모이면 시어머니의 못마땅한 점만 하소연하는 주부가 있었다.

 

 모두  그말에 맞장구를 치면서 자기집 경우들도 말하며 계속  릴레이를 하는듯 시집의 흉을 돌아 가면서 보는 경우도 있었다.  시집과 친정의 문화의 차이 때문인데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모두 못 마땅한 것이다.

 

 

그때  그집의 자녀들이 어려서 자기 방이나 안방에서  엄마 친구들이 수다를 떠는 소리를 자연히 듣게 마련이었다.  아줌마들이 모두 돌아 간 후에 그집의 주인인 엄마의 딸이 정식으로 항의를 했었다.

 

" 엄마 ! 왜 동네 아줌마들에게  할머니 흉보고 그래. 난 그러는 것 싫어 "

 

할머니와 같이 방을 쓰고  있는 그 집 딸아이는 할머니를 좋아했다.

 그엄마가 깜작 놀라서  초등학교 5학년 딸에게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다고 했다.  자기가 한 말은 다 맞는 말이긴 한데 조용히 생각해보니 어린 딸이 듣는데서 한 일은 잘못된 일이었다. 자기가 생각이 짧은 것을 느꼈다고 했다. 자기가 그정도 여자밖에 안 되나 하고 스스로에게 부끄러웠다고 말했었다.

 

 우리는 그후 의논을 해서 아이들이 학교에 가면 집안을 다 치우고 잠시 모여서 차를 마시고 대화를 나누다  자녀들이 학교에서 돌아 오기 전에 각자 집으로 가 있기로 했다.

 

 

2. 내 가족이기에 존중하고 예우를 다해야 한다.

 

 나는 대학1 학년 때  모교 선배였던 32세  교수님에게 들었던 말을 평생 잊지 않고 살고 있다.

 

" 내 남편이니까 소중하고 존중해야 합니다. 내 부모님와 자식이니까 내가 존경해야 합니다. 내 자신을 무엇보다 스스로 존중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자기가 자기를 대접을 안하면 남이 나를 대접해 주지 않아요."

 

나는 결혼 후 남이 보는 앞에서 남편에게 반 말을 해본 적이 없다. 전화로 통화를 할 때도 그렇다.  한 살 차이가 나는 남편은 친구같은 아내가 좋다고  둘이 있을 때는 반 말을 하는게 좋다고 해서 둘이 있을 때는 그렇게 하고 있다.

 

남편이 사업에 실패를 하고 방황을 하던 40대 중반에   우리는 무진장 많이 싸웠다. 전쟁같은 사랑이라는 가사의 노래가 가슴에 팍팍 들어 올 정도로 격렬하게 서로를 미워했던 기간도 있다.

 

정말 이 거지 같은 사랑을 멈춰야 하지 않을까?  심도 깊게 생각한 적도 있다. 그러나 잘 참았고 이제 화해의 시간도 보내고 완전히 서로를 인정하고 자유로운 시간을 보낼 수가 있게 됐다.

 

그때 나는 속이서 치밀어오는 울화를 견디지 못해서  마음을 잡지를  못했다.  나는 그 전쟁같이 싸웠던 기간에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매일 동네 뒷산을 울면서 올라갔다 내려 오곤 했다. 머리가 혼란스러워서  쥐가 나는 것 같은 고통을 경험하기도 했다.

 

그래도 친한 친구에게도 남편에 대해서 나쁘게 말하지 않았다. 내 아들들의 아버지이고 내 남편이기 때문이었다. 내 자존심이 용납을 못하는 일이었다. 남편도 생각지도 않은 인생의 좌절 앞에서 혼란을 겪고 있는 것을 알기 때문이기도 했다.

 

특히 아들들에게 아빠가 왜 방황을 하며  사업에 실패를 할 수 밖에 없는지를 설명해주었다.  그동안 아빠 덕에 편하게 살았으니 이젠 엄마가  당분간 생활을 책임을 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내 고생을 자식과 남편 앞에서 공치사 하고 싶지가 않았다.

 

 **이곳의 사진은 모두 다음이미지에서 가져왔습니다. 인용의 목적으로 사용합니다.

 

 3. 가족은 사랑의 다른 이름이다.

 

남편이 중소기업에 취직을 하고 나와 아들들에게 더이상 잘 할 수 없을 정도로  한 기간이 10년이 넘어서야  우리 가족들은 하나로 다시 뭉치게 됐다.아들들이 대학진학과 군 입대로 집을 떠나고 돌아 오고를 했기 때문이다.

 

내가 만약 아들들 앞에서 신세 타령이나 하고 남편을 원망하는 넋두리를 늘어 놓았다면  우리가족은 완전히 화해를 못했을 것이다. 내가 견딘 고통과 자식을 키우느라고 고생한 것을 공치사나 하며 살았다면  오늘의 평화와 행복이 우리 가족에게는  오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그렇게 의연하게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에는  나에 대한 시집식구들의 넉넉하고 따뜻한 배려와 사랑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내가 며느리를 볼 나이가 되니 우리 시집식구들 같이 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더 깨달아 진다.

 

나는  아들들에게  너희들의 본가 어른들이 얼마나 좋은  분들인지 사례를 들어서 자주 말해주곤 한다. 아들들에게 핏줄의 소중함을 깨닫게 해주기 위함이다. 이제와서 생각을 하면 그 모든 일이  남편을 사랑하니까  겪었던 일들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