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교육

내 인생의 멘토 고 박완서 선생님

모과 2011. 1. 25. 12:14

지금쯤(오전 9시)   박완서 선생님의 장례식이 가족장으로 오늘 구리시에 있는 성당에서 진행되고 있을 겄이다. 80세 인생을  머무르는 순간이 거의 없이  성실하게 "오늘을" 살아오신 훌륭한 분이시다. 

 

 

1. 1970년 처음  여성 잡지에서 처음 만난 박완서 선생님

 

 박완서 선생님은  1970년 19세 때 "여성동아" 잡지에서 처음 만난 후 내 인생의  롤 모델이 되었다. 

 

 학교 앞 미용실에서  여성동아 당선작가로 40세의 평범한 주부가 당선이 된 것은 그때는  신선한 충격 이상이었다. 70년대에 여자나이 40세에 새로운 일을 한다는 일 자체가  어려운 시대였다. 대부분 여성들이 현모양처가 꿈이었던 시절이기도 했다.  선생님은 4녀1남의 엄마이기도 했다.

 

선생님의 작품  나목(裸木)을 구해서 읽으며 박수근 화백과의 인연도 알게 됐다. 그후  미망(謎忘) 이전의 작품은 거의 다 구해서 읽었다.

 

 

 

 

나는 1970년 선생님의 처녀작인 나목을 읽으면서 나도 소설가가 되고 싶었다. 언젠가는 꼭 되려고 마음을 먹었다.

 

2.   박완서 선생님만의 고난 극복방법을 따라 했다.

 

내가 읽었던 박완서 자전적 에세이 중에서 눈이 번쩍 띄는 글귀가 있었다.

 

"인생의 고난이 올 때마다 나는  생각했다. 나는 언젠가 이이야기를  소설로 쓸 것이다.  이 고난은 나를 소설가로 만들기 위한  단련기간이다."

 

 전업주부로 자녀교육에도 성공한 박완서 선생님은 소설가의 꿈을 독서로 조금씩 풀었다고 했다. "나도 언젠가는 소설가가 될 것이다 " 생각을 굳히시면서 남의 책을  많이 읽었다.

 

대부분의  소설가들이 자기가 체험한  것을 소설로 써서 등단한다. 박완서 선생님의 자전적 소설 나목도 6.25 때 피난을 못가고 서울에서 생활한 내용이었다. 박수근 화백과의  만남도 들어 있다.

 

본래 책을 좋아했던 내가 그후 더  소설책 위주로 많이 읽은데는 박완서 선생님의 영향이 컸다.

 

내나이  25세에 갑자기 교통사고로  45세인 어머니가 돌아 가셨을 때도 나는 언젠가 이 내용을 글로 쓸 것이다 생각하며 힘든 장례식을 7번이나 기절을 하며 치뤘다.

 

* 이곳의 사진들은 다음이미지에서 가져왔습니다.인용의 목적으로 만 사용합니다.

 

3. 박경리선생님의 후계자가 된  박완서선생님

 

작가로 등단한  박완서선생님은  박경리 선생님에게 초대 받아 가서 파카 만년필을 선물받는다. 여류작가가 되지 말고 작가가 되라고 하셨다고 어느 책에서 읽었다.

 

그후 박완서 선생님의 주옥같은 작품은 계속 나왔다. 늦게 등단했으나 다작을 하셨다. 쓰는 책마다 베스트셀러가 됐다.

 

엄마의 말뚝,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그산은 정말 거기 있었을 까?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 까?,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 너무도 쓸쓸한 당신, 나의 아름다운 이웃, 그대  아직 꿈꾸는가?,한 말씀하소서, 아주 오래 된 농담, ......내가  읽었던 박완서 선생님의 작품이다.

 

1994년부터  책대여점을 하면서 박완서 선생님의 작품은 거의 못 읽었다. 내가 읽고 권하지 않아도 모두 찾아 읽을 정도로 권위와 유명세가 다 있으신 분이셨기 때문이다.

 

 

4. 나에도 일어 날 수 있는  세상의 모든 일.

 

박완서 선생님은 문예지에 미망(迷妄)을 연제하다  3년 간 절필을 했었다.  남편이 폐암으로 돌아 가신지 8개월 후에  26세의 외아들 을 사고사로 잃으셨기 때문이다.살아 있는 동안 기쁨만을 준 아드님이 서울의대를 졸업하고 병원에서 레지던트로 근무하다 과로사로 사망한 원인을 나는 오늘 인터넷에서 알았다. 딸을 넷 낳고 낳은 아들의 존재가  어땠는가는  상상이 가는 일이다.

 

그후 박원서 선생님은 하느님을 원망하며  그 사실을 받아 들이지 못하고 괴로워하셨다.  미국에 있는 딸네집으로 부산의 딸네 집으로  가 있었지만  깊은 슬픔에서 벗어 나지 못했다.

 

 

 선생님은 이혜인 수녀님이 계신 부산의 수녀원에서 머무르며 그 해답을 얻게 된다.

 어린 동생을 소아암으로 잃은  19살 어린 수녀님에게 들은 말이 큰 깨달음을 주었다고 했다.

 

" 자매님 ! 세상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엄청난 일이 나한테는 일어 나지 않는다는 법은 없지요"

 

박완서 선생님이 그런 큰 고통을 받을 만큼 나는 나쁜 일을 한 적이 없다고 수녀님에게 말하고 들은 대답이었다.  나는 선생님 아드님을 잃고 깨달은 인생의 깊이만큼 작품활동에 몰입했다고 생각한다.

 

나는 인생을 살면서 억울하고 이해가 안되는  고통과 고난이 왔을 때  선생님의 책에서 읽은 수녀님의 그말이 떠올랐다. 그리고 사람들  누구에게나 일생을 살면서 일어 날 수 있는 일이 내게도 왔다고 받아들이게 됐다.

 

5. 80평생을 온전히 다 살아 내신 박완서 선생님

 

담낭암이란 생소한 암으로 돌아가시기 전까지 선생님은 작품활동과 사회활동을 하셨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 중에   선생님같이 죽는 날까지 "오늘을 "살다 가신 분이 몇 분이나 되겠는가? 선생님은 나의 롤모델뿐이 아니라  장수사회의 롤모델이라고 생각한다.

 

선생님의 별세 소식이 전해지자   서점가에는  박완서코너가 생기고 평소보다  열 배 이상의 책들이 팔리고 있다고 한다. 아마도 법정스님의 책 정도의 인기가 있을 것으로 추측이 된다.

 

 

5.   나도 신이 솎아 낼 때까지  최선으로 살아 갈 것이다.

 

글을 쓰는 중간에  선생님의 장례식을 보려고 T V를 틀었더니 정신나간  외국의 테러범 뉴스가  한창이었다. 세상은 아무일 없었던 것 마냥  잘 돌아 가고 있다.나 또한 그렇게 살아 갈 것이다.

 

그러나 박완서 선생님이 "가지 않은 길은 아름답다"에서 말씀하셨듯이  나도  선생님에게  배워서 그대로 살고 싶다.

 

신이 나를 솎아 낼 때까지 나도 이승에서 사랑받게 살아갈 것이고

세상에서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고

좋은 글도 쓸  수 있게

정신과 몸에 건강한 탄력을 유지하고 싶다.

 

**  이글을 쓰는 동안에  박완서 선생님의 장례미사가  끝났습니다. 남편과 아드님이 계신 용인 천주교인 묘지로 떠나시네요. 선생님 안녕히 가세요. 40년동안 인생길을 먼저 가시며 발자국을 따라 갈 수 있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고 정혜 엘기사벳 박완서자매님의 명복을 빕니다.

        2011년 1월 25일  모니카 김성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