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다반사 /일상

33년동안에 세 번 친정부모님을 찾아 간 이유

모과 2010. 11. 11. 06:30

안개는자욱해서 온천지가  뿌였게 흐렸다. 지난주에 오려고 했는데  시골 집동네 친척 결혼식에 아버님이 주례를 하셔서 또 못갔다. 신랑의 아버지가  친척이면서 남편의 초등학교 동창이어서 꼭 참석을 해야했다.

 

 나는 속에서 뭔가 뭉클하고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울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이다. 너무 오랜만에 와서 부모님 산소주변이 변화가 심했다. 비어있던 묘지가 모두 다 차서 빈 묘지가 없었다. 부모님 산소가  어디 있는지 헷갈릴 정도였다.

 

 

 경기도 파주 탄현  기독교 공원묘지에 도착하자마자  깊은 반성이 회한같이 몰려왔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부모님 산소에  온것이 결혼 33년만에 5번이 채 안됐다.   부산에 살면서  충청도 대가족인 시집의 경조사에 나는 장사를 하느라고 참석을 못해도 남편은 꼭 참석하게  했었다근래 7년정도 남편은 매주 대전의 시아버님을 모시고  다시 시골집에가서 집을 고치느라고 막노동을  했다. 하루밤 자고 돌아 올 때까지 다시 일하고 아버님을 대전집에 모셔다 드리고  부산으로 돌아 왔다. 

 

나는 시집에 충성하느라고 친정 부모님에게 너무 큰  불효를 한 것이다.   어머니는 내가 결혼하기 2년전에 돌아가셨고(35년 전) 아버지도 돌아 가신지 20년이 넘었다.

내가 2남2녀의 장녀이고 여동생은 독신으로 살았다 . 명절이면  남동생들은 모두 처갓집에 가서 나는 명절에도 갈 친정이 없었다. 남동생들에게 처가 부모님들이 모두 계셔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조카들에게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가  있어서  다행이고 고마웠다.

 

 

3 년만에 온 부모님 산소는 아스팔트로 변해서  반듯해졌다 .나무는 너무 자라서 부모님 산소를 찾아서 차분히 올라가기 시작했다.

 

남편이 앞장서서 산소를 찾아 올라갔다.  빈묘지가 하나도 없이 모든 곳에 산소가 들어 차있어서 더 낯설었다. 참 기가 막혔다. 시집에 충성하느라고  친정부모님에게는 정말 불효가 막심한 짓을 한 것이다.

 

사람들은 간혹 내게 말해주었다.

" 용이  엄마같이 시집에 잘하는 여자는 처음 봤다" 고 나는 시집일에 토를 달지  않고 순종하였다.  시집 식구들도 다른집과 달리 나를 참 편하게 해주었다. 모두가 상대적이다. 그분들이 내게 사랑으로 잘해주니까 나도 잘하게 된 것이 더 옳은 말이다. 그러나 마음만 있으면 억지로라도  부모님 산소에올 수 있었을 것이다.

 

어떤 동서는 아예 시집일은 모른채 하고 먼 친정에만 충성하고 있는 사람도 있다. 그분도 보통 심각한 상태가 아니고  친정 부모님에게 무심했던  나도 못지 않다.

 

친정동생들은  언니와 큰누나 고생한다고  내 말이면 모두 토를 달지 않고 순종해주었고  형제중에 제일 못사는  나를 위해서  여러방면으로 도와 주었다. 자존심 강한 나를 배려하며 정말 잘 하는 동생들이다. 특히 남동생들은  지금까지 내게 말대꾸 한번 하지 않았다.

 

 

그리 헤메지 않고 찾아간 부모님의 묘지는 관리사무소에서 잘 관리를 해서 깔끔하게 정리가 돼 었었다. 산소가 너무 오래 돼서 한쪽이 물러 내려 앉아서  지난 봄에  보수공사를 다시  했다. 그동안 큰동생이 부모님 산소 관리비를  내고 잘 관리를 했으니 우리 셋이서  묘지  보수공사 비와  관리비 10년분을  나누어 냈다. 일년에 133,000원이었다.  관리비는 통상 5년분을  선납하게 돼 있다.

 인천에 사는 큰남동생이 산소를 잘 돌봐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큰올케에게는 늘 고마움뿐이다.

 

교회에 열심이었던 어머니가 돌아 가시자 교회장으로 치루어주어서 친척없는 우리는 초라하지 않은 장례식을 치룰수가 있었다. 시골학교 처녀 교사였던 나는 너무 몰라서 고맙다는 말도 제대로 못했다.  갑작스런 어머니의 죽음에 충격이 너무 커서 거의  정신적인 공항상태가 될 지경이었다. 그래도 그 힘든 시기를 잘 견뎠다.

 

부모님 산소에서 내려다 본 공원묘지 모습이다. 빈자리가 참 많았는데 이제는 모두 다 들어찼다.

 

 

 부산에 살다가  6월에 파주교하로 이사온 막내 남동생이 사다논 국화화분이 다 시들어 있었다. 남편이 잡초를  뽑고 있는모습, 나도 잡초를같이 뽑고  산소를  돌아 보며 기도를 했다. 막내도 여기에 와서 나와 똑같은 심정이었는지  " 앞으로 부모 형제들에게 잘하겠다"는 문자와 산소 모습을 핸드폰으로 찍어서 보냈었다.

 

"  엄마! 너무 미안해,  잘못했어요. 그래도 엄마에게 부탁할게, 큰아버지(90세)  치매가 좀 왓는데 품위있는 죽음을 맞이하게 해주세요. 우리 형제들 모두 건강하게 해주고  손자손녀 지켜주어요. 엄마,아버지 내가 이제는  자주 올게요"

 

45세에 돌아 가신 엄마에게 59세의 딸이 와서 하는 말이다. 너무 기가 막히다. 나는 나보다 훨씬  젊은 엄마를 기억할 뿐이다.

 

 

 

1976년 45세의 나이로 교통사고로 그자리에서 돌아 가신 어머니,  25세의 나는 교회 장로님과 함께  허허 벌판이었던  이곳을 묘지로 정했다. 앞이 훤히 트여서 속이 다 시원한 곳이어서 정했었다.  장례를 치루며 7번을 기절하며 상주가 돼서  장례식을 치루었다.

큰동생은 군대간지 3개월이 됐고 막내는고2였다. 여동생과 아버지는 병원에서 퇴원한 직후여서 내가 상주가 될 수 밖에 없었다. 9월29일에  돌아 가셨는데 국군의 날이어서 관보가 도착하지 않았다. 전화를 해서 연락이 됐다. 22살인 큰동생이 엄마 시신을 확인 하고야 장례식을 치룰 수가 있었다.

참 절박하고 슬펐던 시간들이었다.

말기 신장암으로 신촌 세브란스에서 돌아가신 아버지, 65세의 나이였다. 평생 한량으로 살아서  돌아 가시기전에는  자식들이 당신의 죄로 아프고 고통을 당한다고 눈믈을 흘리셨던 아버지였다.  그무능력하기만 했던 아버지에게  나는 비교적 좋은 머리와  어른에 대한 예의를 배웠다고 생각한다. 무조건 원망스럽던 아버지가 이제는  이해가 되는 나이가  됐다.

어머니에게는 좋은 남편이 아니었지만 내겐 한없이 좋았던 아버지 , 살아계시면 시아버님과 동갑이신 88세이다.

나에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주고 남동생들 보다 더 사랑을 준 아버지에게 너무 고맙다는생각을 처음으로 했다. 참 미련한 딸이다. 양성평등을 넘어서 여성우대의 교육을 해준 아버지였다.

 

 

후손들이 관리비를 내지 않으면 산소 관리를 해주지 않는다. 비석위에 붙여논 하연 종이는 관리비 미납안내문이다. 대부분 동그란 봉분을 한 묘지가 그랬다. 

 

 후손들이 연락이 안돼서  무방비 상태가 된 묘지들의 모습이다. 부모님의  산소를 자주 찾아 봐야겠다고 결심을 하게 했다.

 

우리 시집의 시누이들은  거의 매주 친정에 온다.  나는 살기 바쁘고 멀고,명절에도 장사를 했고, 시집을 우선으로 하다보니 이렇게 불효를 했다.

 

나는 며느리를 보면 나같이 미련하게 살게 하지않을 것이다

.

나이 60을 코앞에 두고 이제야 나를 위해서 살 수 있게 됐다. 인생 참 어렵다. 책임과 의무가 도데체 무언지  고달프기가 한이 없었다. 착하게 살려고  기를 쓰고 살았다.

 시어머니가 편찮다고 내몸이 아파도 일주일에 한 번은 가도록 노력도 했다. 평생을 아프기만 한 시어머니의 마음은 늘 고달프고 남을 생각할 여유가 없어서 스스로 외롭게 되셨다. 참 안타까운 일이다.

 

이제 친정에도 좀 신경을 쓰고 살아야겠다. 다행히 서울서 가까운 대전으로 이사도 왔다.

 

 

 

11월5일  하루종일 안개가  자욱한 고속도로를  달려서 밤 11시가 돼서 집에 돌아 왔다. 산소에서 돌아오면서 아들들이 살고 있는 대한극장 뒤에 가서 함께  저녁만 먹고 바로 돌아 온 것이다.

 

 부모님 산소에 무심하게 보낸  기간이 너무 길었다. 시집은 조상공경을 최고로 치는 집안이다. 앞으로 나는 친정에도 자주가는  딸이 될 것이다. 내가 시집에 그동안  한 충성이면 남편도 이제 함께 할 것이다.

 

시골집도  이제 다 고쳤다. 그동안 모든게 여유가 없었고 살아계신 부모님에게 잘하는게 원칙이긴 하다.그러나 내가 잘못한 것도 분명하다 이번에 깊이 반성하고 시정할 것이다.

 

**일상 다반사  베스트로 선정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부모님이 일찍돌아 가셔서 친정 이라고는 90세되신 큰아버지와 사는 서울 여동생집으로 갑니다. 큰동생은 인천에, 막내는부산에 살다가 올해 파주로, 저는대전으로 모두 흩어져서 살게 됐습니다. 집집마다 노환이나 치매노인이 계셔서 모두 어렵습니다. 장수사회의  건강은 정말 중요한 일 같아요. 살아 계신 부모님께 잘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