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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시누이들 때문에 뿔이 난 이유

모과 2010. 8. 15. 07:00

 결혼 33년차인 내가 남편에 대해서 자랑할 것은 지극정성인 효심이다.

그것은 시집의  대를 이어서 내려오는 마음의 유산이나  배우자에 따라서 그렇지 않은 것도 보고 있다.

 

"남자에게는 효도의 유전자가 있다 그런데 문제는 효행의 유전자는 남자에게 있지 않고 그 남자의 아내(며느리)에게 있다." 

 

" 이글을 인터넷 검색에서 읽었다. 노인 병원 원장이 한 말이다.

 

 

7남매 중에  셋 째인 남편(61세) 은  아버님(88세) 마음을 무척 아프게 하고 살았다.

중 2 때 에 물이 차는 병에 걸려서 이 병원 저 병원을 다니다 , 청량리 뇌 병원에 가서 고칠 수 없다는 판정을 받았었다.

 

 남편은  휴학을 하고  덕산 시골 할아버지 집에 가서 소를 끌고 뒷산에 꼴을 먹이러 다니며 지냈다

어떻게든지 살고 싶어서 뱀과 미꾸라지를  잡아서 아궁이에 구워먹었다고 했다.

 디행히 이런 저런 치료끝에 하늘이 도와서  기적처럼 완쾌 되었다.

 

** 첩첩산중에 있는  시골집

 

 중등교사 였던 아버님은 그때는 교육청 사회체육과 에 근무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동생들을 낳은 후 아프기 시작해서 지금까지 40년 이상  병환 중이다. 너무오래 아프다 보니 남에 대한 배려를 할 수 없는 성격이 됐다. 오직 당신 위주로 당신 생각만 하는 사람으로 변했다.

 남편은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서울로 유학을 갔다.  유신반대 데모에 앞장을 서다 졸업 다음날 군대에 끌려 갔다. 당시 남편의 체중이 57kg이어서 강도 높은 훈련을 하는 하사관 군대에서 혹시 탈영하면 어떻게 하나 ? 아버님은  남편 때문에 노심초사(勞心焦思) 하셨다.

 

나와는 중매로 만났고 결혼생활을 무난하고  행복 했다. 남편이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사업을 하면서 집안의 고난이 몰아쳤다.  하는 사업마다 실패를 했고 악연을 계속  만나더니 나와의 사이도 악화 됐다.그때 아버님의 자상한 보살핌이 없었으면 나는 남편과 좋은 관계로 회복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남편의 고향으로  이사를 오고 나는 마음으로 결심한게 있다.

 

우리가 객지에서 오래  살았고  명절때 말고는 자주 찾아 뵙지 못했으니  부모님께 잘하자. 우리가 힘이 들었을 때 자주 전화를 해주시고 도움도 주신 분은 시집에서 아버님 한 분이다.

 큰 시누이 형님에게 전화로 내  아픈 속내를 자주 전화를 했었다.

 친정 동생들은 구체적으로 큰누나, 언니를 도와 주었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잘한다고 한들 40년을 부모님 곁에서 모든 집안의 경조사와 굳은일을 한 큰형님 내외분의 노고를 따라 갈 수는  없는 일이다.  그동안 묵묵히 꾸준히 고생하신 두분의 고생을 나는 알 수가 있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음도 알고 있다.  단지  나는 내 몫의 일을 조금 보텐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단지 큰집의 두 조카가 결혼을 한 후  너무 자식들에게만 치중하는 것을 보며 좀 지나치다고 느낄  때가  있다.

  

 

* 큰 형님과 함께 어머니를 모시고 건강검진 하러 간 병원: 큰 동서 형님은 근 20년 이상을 매 달 2번 어머니를 모시고 병원에 다녔다. 수시로  병원에 다닌 것 말고  정기적인 것만 그렇다. 어머니는 류마티스 관절염 말기로  고통이 심하다. 한쪽 무릅 인공 관절 수술, 골다공증으로 엉덩이뼈가 갈라져서 인공뼈 넣는 수술, 다시 재수술, 이제 노인성 치매 까지 왔다.

 

지난 월요일 아침 아버님께 전화가 왔다.

" 네 어메 쓰러졌다" 

남편과 나는 세수만 하고 병원으로 갔다. 큰 형님 집이 전체적으로 수리 공사를 시작한 걸 알아서  병원에서 간병을 할 사람은 우선 나라고 판단을 해서 짐을 꾸려서 갔다. 전화 상의 말로는 혼수 상태인 줄 알고  놀래서 갔다.

  

 

 대전 성모병원에 정기 검진 하는날이라서  어머니는 큰 형님 차를 타고 가서 내려 몇 발자국 걷다가 넘어졌다.골다공증으로 17cm 키가 줄어들었고  몸도 쇠약한 어머니는 그만 팔이 팔굽치 까지 부러졌다.

우선 2인용 병실에 입원을 하고 수술은 2~3일 후에 한다고 했다.

나는  어머니를  지하 1층으로 모시고 가서  피검사,  C T 촬영을 했다.

 

어머니는 오른 손은 기브스처럼 뭘 대고 붕대를 감았고 왼 손에는 링거를 맞고 있어서 꼭 한사람이 곁에 있어야 했다.  밥도 왼손으로 먹고 반찬은 일일이 수저에 놓아 주어야 했다.

막내 시누이와 막내 동서가 왔다. 막내 동서는 아주 공손하게 내게 말했다.

 '형님 ! 제가 있을 테니 집에 가세요"

아니야 자네는 내일 출근을 해야 하니 내가 있을께.  큰 형님과 의논해서  순서를 정해서 하자 "

 

다음 날에는 큰시누이 형님도 온다고 했으니  간병에는 큰 걱정이 없었다.

 어머니는  정신적으로 충격과 수술에 대한 긴장감으로  밤새 1시간에 한번 씩 오줌을 누었다.

 

하루 밤을 간병을 해보니 여자가 꼭 해야 하겠다.  화장실에 갈 때 옷도 올려주고  휴지도 잘라 주어야 하기 때문이었다.어머니는 같은 말을 반복해서 10번정도 하는 모습을 보고 옆 침대 환자 부부가 웃었다. 그리고 바로 알아 차리고 자기들은 처음 보는 모습이라고 했다.

 

 " 어쩌면 딸과 며느리들이 서로 간호 하려고 해요. 참 착하네요 .다른 집들은 서로 간호 하지 않으려고 하는데 "

 

  5남2녀 중에서  4남은 미국으로 이민을 간지 33년이 됐다.

미국에서 생활이 안정되자 2년 마다 부모님을 초대 해서 2달 씩 모시며 미국의 좋은 곳은 다 구경시켜드렸다.

 

 형제 6명이서  2일씩 맡아서 간호를 하면 어머니의 건강상태도 알고  ,어머니와 더 가까워 질 수도 있고 시누이 형님은 집에서 아버지 식사를 돌봐 드리고 자기 순번에 오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큰동서 형님과 전화로 상의하니 큰 시누이 형님이 오면 의논해서 하라고 하면서 너무 고맙다고 했다.

 큰 집은 삼복 더위에 온 집을 다 띁고 수리를 하고 도배도 해야 하기 때문에 형님은 일꾼들 밥도 해주고 참도 해주어야 한다.

 

큰 시누이 형님이 내려오고  막내 아가씨와 아버님이 저녁식사를 하러 갔다 왔다.

내가  생각했던 대로 말했더니  뜻밖에 말을 했다.

 " 내가 쭉 간병을 할테니 올 사람들은 아무 때나  와서 엄마를 보고 가면 돼"   

  물론 큰시누이 형님은 요양사 자격증이 있어서 요양사로 다니기도 했다. 그리고 좋은 뜻으로 말한 것도 안다.

나는  "이건 좀 아닌데 "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의 병환은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번 기회에 며느리들이 조를 짜서 연습을 하고 다음에 간병인을 써도 가족이 늘  한 명은 대기 해야 한다.

누가 문병을 와도 며느리가  간호를 하는게 보기에도 좋다. 물론 남들에게 보일려고 효도를 하는것은 아니다나는  누구나 상황에 따라서 도리를 다하면 된다고 생각을 하고 있다.

 

저녁에 의사가 회진을 하며 이것 저것을 다시 검사를 하고 내일이나  모레 수술을 한다고 했다.

남편이 와서 함께 집으로 돌아 왔다.

 

다음 날 아침에  병원으로 전화를 하니  "오늘  수술을 한데" 간단하게 대답을 했다.

 "언제 하는데요?"

 "몰러 . 그건 말해주지 않았어"

 나는 다시 아버님에게 전화를 했다.

 " 글쎄 오늘 한다더라. 수술하면 전화해 준다더라."

  

 

서울에서 모임이 있어서 가려 했다가  어머니가 수술을 하는데 가면 안될 것같아서 참석을 못한다고 했다.

저녁 5시가 되도 연락이 없었다. 수요일이나 목요일에 수술을 한다고 했는데 내일하나 생각도 들었다.

큰시누이 형님에게 전화를 해보니 전화를 꺼 놓았다. 막내 아가씨에게 전화를 하니 연결이 안됐다.

마지막으로  아버님에게 전화를 했다.받으셨다.

 " 아 ! 나다 !" 

전화 번호를 보고 누군지 다 기억을 하고 계신다.

 "아버님 ! 어머니 언제 수술 하세요?'

" 지금 수술이 끝났다. 이제 회복실로  가고 있다"

"아니 왜 연락을 하지 않았어요?"  

나는  일박 이일을 간호를 하고 나니 몸이 굉장히 피곤해서 집에서 쉬다가 수술 시간을 알려주면  가서 기다리려고 했는데  많이 섭섭했다.

" 아 글쎄 잠깐 전화를 바꿔줄게"

큰 시누이형님이 전화를 받았다. 왜 전화로 알려주지 않았냐는 물음에 뜻밖에 대답을 했다.

" 그렇게 궁금하면 전화를 하지 ?"

" 전화를 했더니 꺼놓으셨던데요"

진동으로  해놓는 다는 것이 그만 꺼졌다고 했다. 그때 막내 아가씨 에게 전화가 왔다.

" 아가씨 ! 지금 어디에요? "

"병원인데"

" 아니 지금 뭐하는 거에요?  수술시간을 왜 며느리들에게 알려주지를 않아요? 지금 딸들끼리 뭐하고 있는 거예요?  "

 

마음이 착한 막내 아가씨는 무척 당황을 하더니 얼른 사태 파악을 했다.

"언니! 미안해요. "

"아니 1박 2일 간호를 하고 온 사람에게 수술시간을 알려줘야 그 시간에 갈 것 아니에요.입장 바꿔서 생각해 봐요?"

나는 화가 치밀러 올라서 큰소리를 질러 버렸다.

 

모두 잘하려고 하는 데서 일어난 일이다.   큰 집은 리모델링을 시작해서 공사가 점점 커지고 있다. 둘째며느리는 행사가 있을 때만 참석하는 사람이다. 병원에 와서 손님처럼 딱 10분 있다가 갔다. 셋째인 나 역시 몸도 약하고 일도 서투르니 답답한 딸들이 덤벼들어 한 것이다. 막내동서는 직장 생활을 하고 있다. 아이들도 고2,고1이다.

 갑자기 수술을 하게 됐으니 미쳐 나같은 사람은 생각이 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며느리 누구에게도 연락하지 않은 일은 잘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무척 섭섭했다.

 

**세상의 결혼한 여자는 며느리면서 시누이도 될 것입니다.

친정에 와서  올케들 앞에서 시집 흉을 보는 것은 자제 하기 바랍니다. 올케들도 그만큼은 다 말할게 있습니다. 그 이유는 자기와 다르면 다 말하게 돼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친정의 문화와 시집의 문화 차이에 있다고 봅니다.  시집 식구들을 친정 부모 형제라고 생각을 안하니까 섭섭함을 마음에 담아 두었다가 친정에  와서 쏱아 내겠지요.

 

저는 결혼 33년차인데 아직도 시집에 가면 편하지 못한 데가 있습니다. 시집에서 자면 깊은 잠을 못자고 갑자기 변비가 됍니다. 누가 저를 불편하게 해서가 아닙니다.

그냥 시집이라서 그렇습니다. 저는 며느리이기 때문입니다.

 

저를 자매 같이 생각했다면 연락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제가 크게 뿔이 난 이유입니다.

 

 ** 일상 다반사 베스트로 선정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세상의 시누이와 딸들이 한번 생각해 볼 문제 같아서 적어 봤습니다. 집집마다 노환과 간호가 이제는 사회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우리 시집은 서로 잘하려고 하는데서 문제가 생겨서 다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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