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다반사 /덕산 시골집

이런 시집 식구들 어떻게 생각하나요.?

모과 2010. 6. 28. 06:30

남편의 고향으로 이사를 오고 나는 몸도 아프고 마음도 아파서 남편에게 심통을 내고 있었다.대전으로 오자 마자 고등학교 때 절친 했던 동창들과 연락이 되서 자주 만나고 행복해 하는 남편을 보며 아내에 대한 배려가 없다고 화가  자주 났었다.

 

 더구나  남편은 주말마다 덕산 시골집에 내려가서 자기 형제들, 고모님들과 보내고 왔다.가서 부터 올 때까지 일만 힘들게 하고  돌아 와서 바로 서점으로 출근을 해서 밤 11시에 퇴근을 했다.

 나는 남편의 한결같은 효심과 아이들에 대한 부성애를 보며  성실하나 융통성이라고는  없는 답답함을 느꼈다.

 

그런데 막내 아들까지 5월에 서울로 발령이 나서 큰아들과 함께 살게 되자 남편의 존재가 크게 부각이 되기 시작했다. 발목도 다 나았고 나도 시골집에 가기로 한 이유가 있다. 58살이라는 나이에  역시 타향인 대전으로 이사를 와서 아는 사람이라고는 시집 식구들 밖에 없는 내가  주말이면  대전에 남아서 블로그에 글을 쓰거나  드라마를 보며 보내는 일이 과연 옳은가? 생각이 들었다.

몇 년을  시집의 시고모님이나 시누이형님이 해주는 김치와 김장을 당연한듯이 받아 먹은 내게도 문제가 있음을 깨달았다. 물론 이유는 있다. 그 분들은 일을 빨리 한다든가. 나는 직장에 다니고 있고 몸이 아프다는이유를 댈 수도 있다.  몸이 다 나은 지금엔 남편과 같이 가는게 미래를 위해서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번 주  아버님을 모시고 남편과 시골집에 가면서 시누이 형님과 통화를 하고 홍성장에서 만났다.아버님은 김치 재료 값을 내려고 늘  함께 가신다.  마침 홍성장 날이었다.

 

남편 박씨 아저씨(61세),아버님(88세), 시누이형님(63세), 홍성고모님(74세)4 박씨가 채소를 흥정하고있다. 

 

* 홍성고모님이 대전의  둔산에 살고 있는  막내 딸을 위해서 채소값의 일부분을 내셨다. 나도 30,000원을 냈고 , 아버님,시누이 형님도 냈다.어느날은 시누이형님이 다 내고. 어느 날은  아버님이 다 내신다.

 

일차로 무거운 짐은 남편이 차로 가져가고  세 분이 나눠서 들고 가시는 동안에 사진 몇장 찍고 아버님 짐은 내가 들고 갔다. 이일을 2주에 한번씩 몇년을 하고 계신 것이다.

 

나는 차로 가면서 마음 속으로 깊이 반성했다.   너무 쉽게 김치를 받아 먹은 것에 대해서 ... 

** 홍성장이라서  버스 정거장에는  할머니들로 가득했다. 정말 장수 사회임을 실감하게 된다.

 

 시골집 앞에 푸르렀던  보리밭은 어느새  추수가  다 끝났고 벌레를 잡느라고 불을 태웠다고 했다.

나는 시골에서 산 적이 있지만 집에서 농사를 짓지 않아서  이런 모습을 처음봤다.

 

 홍성 고모님과  큰 시누이 형님이 채소를  다듬는 동안  나는 열심히 조수 노릇을 했다. 59세의 나이에 아직 조수 신세다. 하하하 . 나는 시집 식구들이 모이면 살림 살이나 요리에 대해서 침묵으로 일관한다.

시거든 떫지나 말아라 ! 는 속담이 생각이 나서이다.

모르는 일에는 그냥 가만이 있는게 제일 현명하다.

 

우리가 김치를 만들고 있는 동안에  홍성고모부님( 78세) ,남편 박씨 아저씨,,  큰시누이 형님이 남편인 아주버님(65세),아버님(88세) 는 돌담 밑에  있는 큰돌을 치우고 있다. 남편은 늘 힘들고 표시 나지 않는 일만 땀을 뻘뻘 흘리고 일한다. 가서부터 올때까지 밥먹고 잘때 빼고 계속 일하다 온다.

나는 그런 우직한 남편이 좋다.  그 밥에 그 나물이라고 하지 않던가 ?  우리 부부가 서로 알고 있으면 된다.  우리는 우리의 작은 노력이라도 아들들에게 복으로 돌아 가길 소망하고 산다.

 아이고! 수고가 많습니다. 박씨 아저씨~~ 일당은 쌀로 업그래이드 된  덕산 막걸리  한 병입니다.^^  이따 밤에 축구보면서 일잔 쫙~합시다.~~

 

 일기 예보대로 비가 오는데 부슬부슬 내려서 살살 오가며 일하기 좋았다. 사랑방에서 내다 본  밖의 풍경이 참 싱그러웠다.

 

 완성된 네 집의 김치 통 : 열무 물김치, 오이 소박이를  각자 두 통씩 집으로 가져 가면 된다.

 

 

 비는 계속 내리고 내가 사간  큰 토종닭  두 마리에 엄나무와 현미 찹쌀과 마늘을 넣고 사랑방 가마솥에 장작을 때서 푹 고았다. 모두 시누이 형님이 다 했다.  나는 배추 씻고 절이고 버무리는 조수 일만 했는데  그만 지쳤다.

 

서울 아들집에 올라 갔던 큰형님 가족 10식구가 다 내려 온다고 했다. 나는  남편과 시누이 형님과 함께 홍성장에 다시 가서  닭 두 마리와 바지락 조개  한 자루를 사왔다.

 

 큰 아주버님, 종손인 큰 조카,종손녀 삼대가 함께 있는 모습, 아버님만  있으면  종손 4대가 함께 있는 것이다.

 

 종손의 둘째딸,5살 도연이, 3살 해연이 딸 삼자매는 조용하고  침착해서 볼수록 예쁘고 사랑스럽다.

 

 

 시골집 앞의 논은 어느새  벼들이 힘차게 올라오고 있었다.

 

비가 와서 몸은 더 피곤했고 아침에 일어 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남편과 함께 시골집에 온 것은 참 잘했다고 생각됐다.

 

 이번 시골행은 생각의 전환을 좀 하면 참 행복해 진다는 것을 느꼈다.

 

내성적인 남편이라도 동창을 만날 수 있는  점이 고맙고,  장수 집안이어서 남편이 혼자가 되더라도

시골 집에 형제,누나와 함께 할 수 가 있을 것 같았다., 맑은 공기가 뇌를 청정하게 해주고 작은 일이라도 함께 하면서 조금씩 정이 쌓이는 것을 느끼고 있다.

 

지난해 성당에서 영세를 받으신 큰 아주버님과는 뭔가 종교적인 교류가 흐르는 느낌이다.

 

안산 큰 시누이형님은 내게 큰 힘과 새 용기를 주고 있다.

10살에 병환으로 아팠던 엄마가 돌아 가시고  새 엄마는 동생들을 낳고 몇년 후 부터 지금까지 계속 병환 중이셔서 형제 중에서 제일 큰 희생과 고생을 한 분이다. 위로 오빠가 둘, 아래로 남동생 셋, 여동생이 한 명이다.

어릴 때부터 늘 일을 도맡아 해와서 큰 시누이 형님은 당연히  일을 해야 하는것으로 알고 있는 분위기가 이해가 안된다.그런데도 형님은  늘 밝고 성실하고 열심히 살고 계시다. 형님의 자식들이 잘 되고  노후가 편안해지실 것을 나는 믿고 있다.

시골집에 큰 시누이 형님 내외분이 오기 때문에 남편과 나도 가고,시고모님들도 오신다고 생각이 든다.

 

나는 앞으로  특별한 일이 없는한 남편과 함께  주말마다  시골집에 들어 갈 것이다.

몸이 많이 아프신 어머니도 함께 모시고 가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다.

그래야 아버님이 편안하시기 때문이다.

 

** 친정부모님이 일찍 돌아 가시고 맏딸인 내가 열심히 살라고 좋은 시집을 만나게 해주었다고 생각합니다. 객관적으로 볼 때 우리 시집은 시누이들이 며느리보다 많이 착하고 배려가 많은 분들임을 말하고 싶어서 이글을 씁니다. 제  블로그의 글을 읽고 시골집으로 찾아 오신 분도 계셨습니다. 제가 블로그에  쓰는 글은 제 생활의 80%노출을 하고 글로쓴 내용은 100% 사실입니다.

 

** 일상다반사 베스트로 선정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더 좋은 글을 정성껏 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