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다반사 /덕산 시골집

내 아내와 함께 살고 싶은 내 고향 충청도 외라리.

모과 2012. 7. 24. 06:00

 

남편이  일을 쉬는  일요일이라서  지난 토요일에 덕산 시골집에 갔다.  남편은 나와 함께 가기를 좋아해서  선약이 있었으나  사정을 말하고   양해를 구했다.

 

남편은  충남  예산군 덕산면에 있는  시골집에서 태어났다.  시골집에 가면 속세의 모든 일을 잊고 편히 쉬다 와서 좋다고 했다.

 

 

 남편의 마음은 잡념이 없어서 쉬는 느낌일지 모르지만  내가 보기엔 머슴같이 일할 때가  더 많다.  집안의  사소한 일들을 하거나 집 안과 밖의  잡초를  뽑는 일까지 모두 즐겁게 한다.

 

 

남편은 언젠가 시골집 근처에  작은 집을 지어서 살고 싶다고 말 한다.  아버님은  시골집을   밀양 박씨 연안 공파 12대손인 할아버지의 후손 160명의 공동의 재산이라고 선포하셨다.

 

 

2004년부터  거의 매주 시간이 되는 형제들이 모여서 집을 고쳤다. 건축과를 나온 큰아주버님의 지도하에  7년의 세월을 모여서  새로 고친 귀한 집이다.  리모델링에 필요한 경비는 모두 아버님이  감당하셨다.

 

 

시골집이 있는 마을은 전형적인 충청도 깡촌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마을 입구에 수덕초등학교가 있고   넓은 예산 평야의 일부인 논이  죽 펼쳐져 있다.

 

 

마을 입구엔  외라2리  빨간 지붕의 마을회관이 있다.

 

 

 집으로 올라가는 길의 왼쪽에는 옥수수밭이 있다.

 

 

오른 쪽에는 비닐하우스 두 동이 있다.  모두 시집의 땅이다.   마을의 대부분의 논과 밭이 시집 소유 였던  때도 있었다.  증조할아버지와 할아버지는 전형적인 농부셨다.

 

 

이밭에는 보리 - 콩- 다시 보리가 심어 진다.  나는 땅의 무한한 가능성과 포용력을 느끼곤  한다.

 

 

집 안의 사당에서 바라 본 대문의 모습이다.

 

 

 나는 집을  고칠 때  돌담만 인부를 불러서 쌓은 것으로 알고 있다.

 

 

백두산 미송으로 장식한   15평 사당 내부이다. 위폐는 모시지 않았고  추석이나 시제 때 사용하고 있다.

 

 

돌담 밑에는 2,000그루의 연산홍이 심어져 있어서 봄이면  꽃 잔치가 벌어진다. 장독대의 독은 다 비어 있다.

 

 

작은 대문은 큰아주버님이 만드신 것이다.

 

 

 

모두 16명(아가 2명포함) 이 모였고  토종닭 4마리를  가마솥에 푹 삶아서 먹고 닭죽도 끓였다.  남편이 솥을 깨끗이  물로 부시고 불도 때서 온 몸에 땀으로 젖었다.  자기 좋아서 하는 일이라서 즐거워보였다.

 

 

 

시연이(3세)에게 꼬집혀서 볼이 부어 있는  오빠 중건이(4세), 시연이 입장에서는 자기 물건을 만져서 꼬집었을 뿐이다.^^ 그러나   곧 오빠 답게 시연이를 잘 돌봐주었다.

 

 

큰동서, 막내동서 조카 며느리가  아침식사 준비를 하고 있다. 나는 상을  닦고  수저를 놓고 있었다.

 

 

반찬은 갈치조림, 생김치 겉절이, 호박볶음, 깻잎 장아찌,풋고추, 바지락국..... 여러명이 먹으니 밥 맛이 더 좋았다.  덕산 쌀 막걸리는  빠질 수가  없는 메뉴이다. 특히 남편이 제일 좋아한다.

 

 

식후에 디저트는 막내 고모부께서 사오신 수박으로 오손 도손 모여서 먹었다.

 

 

시골집에는 아버님부터 증손자까지 늘 4대가 모인다.  여러 가족들이 모이면 사소한 갈등은 늘 있으나 대체적으로 남을 배려하는 분들이 많아서  평화롭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온다.

 

 

 

 시골 집에서 하루 밤을 자면  가족 모두의 마음은 대문 밖 하늘 같이 맑아져 간다. 집터가 좋아서 그런지 이곳에 오면 마음은 저절로 치유가 되곤 한다.

 

 

점심 메뉴는 돼지고기 석쇠구이로 , 큰아주버님이 특별히 제작해 온 화로에 숯을 피워서 고기를 구워 먹는다 .  나는 텃밭에서 마지막 상추를 다 띁어서 씼었다.

 

 

묵은지와 돼지고기, 닭죽이 전부인 간소한 상차림이었다.  우리는 평화로움을 양념으로 즐겁게 식사를 했다.

 

 

남편과 막내 시동생이 익은 고기를 싸서 어른들에게 시식하도록 드렸다.

 

 

식사 후  큰아주버님과 남편은  농약 통을 짊어지고   일을 시작했다.  기계가 고장이 나서 남편은   다시 물통에 물을 받아서  백양목에 뿌리기 시작했다.

 

 

툇마루 밑에는 연산홍이 심어져 있고 그아래는 백양목을 심었다. 남편은 백양목에 물을 주고 있다.

내 남편이지만  시골에만 들어오면 왜 저렇게 일을 찾아서 열심히 하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안하는 것보다는 보기 좋고 존경하는 점이다.

 

 

큰동서 형님과 시누이 형님(감색 티셔츠) 3대의 모습이다.

 

 

외할아버지와 엄마와 딸의 모습.

 

 

대전 석교동에서 이민 온 서광 꽃이  힘차게 퍼져 나가고 있다.

 

 

큰아주버님 .

 

 

 

 몇 년전에 전라도 광주 조선대학교 장미원에서 사온 줄장미가  돌담의 뜨거운 열기를 잘 견디고 살아 있다.

 

 

시골집 앞의 콩밭에는  서로 키 재기가  한창이다.

 

 

아버님과  막내 고모부님, 시어머니  삼우제를 보내고  일주일 만에  들어온 시골집은 변함없이 평화롭다.

 

 

 아버님(90세)은 시골집에서 태어나시고 홍성의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결석을 하루도 안하셨다는 말씀이 놀랍고 존경스럽다. 왕복 4시간 거리라고 했다.

 

 

마을 입구의 논에는 벼들이 고개를 빳빳하게 세우고 있다.  설 익어서 겸손을 모르는 자세이다.

저 벼들도 가을이면 다 익어서 겸손한 자세로 고개를 숙이고  공손히 서 있을 것이다.

 

 

나는  남편을 따라서 시골집에 들어 올 때도 있고 대전 집에 그냥 있을 때도 있다.   분명한 것은 나의 본적이 시골집으로 돼 있다는 사실이다.  남편과 같이 나도 충청도 사람이된 것이다.

 

 

서울에서 자란 나는 시골에 대해서 아직도 생소한 점이 많다. 그러나 자주 다닐수록  정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남편이 시골집에  갈 때  나와 동행하기를 원하고 있다. 나는 죽은 후에도 함께 할 사람인데 그런 소망을 못들어 준다는게 말이 안된다고 깨달았다.

 

앞으로는 시골집에서 나올 때 공주나 논산등에 있는 명승지를 둘러보고 오자고 제의 할 생각이다.

물론 건강 할 때 한 곳이라도 더 보고 행복해지고 싶어서다. 남편과 같이 가본 곳이 너무 없어서 그게 아쉽다. 그점만 고려해준다면 나는 더 싹싹한 아내가 될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