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교육

내 인생의 방향을 바꿔준 고마운 선생님

모과 2009. 5. 14. 16:01

 1967년, 고등학교  입시에 실패를 하고 이차로 모집하는 고등학교에 진학을 했다.

진명여중에서 진명여고에 진학을 하는데 실패한 것이다.

성적이 안전권이라고  입시전 3개월을 영화,드라마,책에만 몰두해서 그렇다.

그 습관을 평생을 가지고 있다.

이차 고등학교는  한번 입시에 실패를 한 학생들이 본의와는 무관하게 부모의 의사대로 진학하기 마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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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의 권유대로 집에서 가장 가까운 중앙 여고에 진학을 했다.

입학식날에 반편성이 됐는데  7학급 420명이었다.

1학년 3반인 것과 교복의 색깔이 너무 독특해서 기분이 우울해졌다.

지금 생각하면 철이 덜 든생각이지만 학교에 가기가 너무 싫었고 공부도 하기가 싫었다.

이유는 크게 없고 그냥 공부가 하기 싫었다.

 

나는 이유없는 반항이라는 말을  이해  할 수 있다.

 

그 때는 부모님은 경기도 파주에서 장사를 하시고 외할머니와 동생들과 서울에 유학을 와 있었다.

부모님은 나의 말을 다 믿어 주었다.

 

그런데 입학식 다음 날부터  지각을 해서 교문에서 선도부에게 잡혔다.

교감 선생님은 그 큰 운동장을 지각생들과 함께 30바퀴를 뛰셨다.

숨이 멎을 것 같은 고통을 겪었다.

얼굴을  빨개졌고 머리도 흐트러져서 일 교시가 끝난 교실로 들어갔다.

 

어제 얼굴만 대충 본 짝은 한 시간이 지나도 오지 않는 내가 기다려졌는데 지각을 하고 늦게 들어 오는 것을 보고 정이 떨어진 눈치였다.

나는  속으로 일류 중학교였던 친구들과 차이가 많다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급우들로 부터 격리시키기 시작했다.

 

지각이 잦고 숙제는 늘 해오지 않았고, 소풍 갈 때는 나와 똑같은 생각을 가진 친구와 아프다고 결석을 하고 덕수궁에 놀러갔다.

그 당시에는 소풍을 갈 때도 교복을 입고 갔다.

지금 생각하면 왜 소풍을 가지않고 둘이 교복을 입고 덕수궁에 가서 외국인이  사진을 찍겠다고 해서 모델도해주고 돌아 다녔는지 이해가 안된다.

 

제일 싫어 한 과목이 독어였는데 예습,복습은 물론 숙제도 해가지 않았다.

독일어 시간마다 복도로 쫒겨 나가서 벌을 섰다.

 숙제를 하기도 싫고  남의 것을 베끼기가 싫었다.

복도에서 벌을 서 고있는 나를 보고 서울대 출신의 독어 선생님은

 

" 우리 반에 쟤 같은 학생이 있으면 퇴학을 시킬 것이다" 고

 

 급우들에게 말했다고 했다.

그 때부터 읽기 시작한 신문, 명작소설, 영화는 45년이 지난 지금까지 나의 생활이 됐다.

 

한국 문학, 세계명작, 베스트셀러,장르에 관계 없이 책만 읽었다. 신문은 한시간 이상씩 정독을 했다.

영화는 개봉관에서 사복을 입고 봤다.

수업 시간에 소설을 읽다 선생님에게 뺏기고 교무실에 가서 벌을 서고 찾아 오는 일이 많았다.

교무실에 가면 영어 담당이었던 담임이 조용히 지켜보시곤 했다.

 

일학기 담임이 다른 학교로 전근을 가서 영어 선생님이 우리 반 담임을 맡게 됐다.

 

박우동선생님!

이름이 특이해서 잊어지지 않는다.

선생님은 담임을 맡고 며칠후 부터 나를 방과후에 면담을 했다.

중악교 때 성적과 아이큐를 보고는 나를 사람을 만들려고 결심을 했던 것 같다.

 

선생님은 대학생 때 5,16을 맞았는데 데모를 하다  오른 쪽폐에 총을 맞아서 큰 수술을 했다고 소문이 돌았다.

늘 한쪽 어깨가 아래로 내려 온 자세를 하고 있었다.

 

성격이 온순해서 영어 시간만 되면 아이들은 시끄럽게 떠들곤 했다.

서울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했다는 선생님은 30이 훨씬 넘긴 노총각이었다.

 

독립유공자인 황신덕 이사장님의 아들인 임 형빈 교장 선생님은 경기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를 졸업하고 영국유학을 다녀 온 분이었다.

중앙여고를  실력있는 여학교로 만들기 위해서 노력을 많이 하셨다.

토요일마다   오전에는 학년별로 소강당에 모아 놓고 클래식 음악 감상을 하게 해주었고,전교생의 특기로 가야금을 가르쳤다.

오후에는 주 야간 합해서 포크댄스를 하게 해주었다.

해마다 시민회관을 빌려서 전교생이 다 참석하는 음악회를 주최해주었다.

 

시험 기간에 결석을 하면 무조건 0점을  줘서 한 학급이 낙제를 하게 했다.

나는 몸이 약한 편이어서 독감에 걸리면 결석을 할 정도 였다.

37세에 페절제 수술을 받을 때까지 감기를 달고 살았다.

마침 시험 기간이어서 전 과목  0점을 받으면  낙제는 자동으로 하게 되있었다.

 

나의 최초의 정체성도 부끄러움이었는데 두 번째 정체성도 부끄러움이었다.

나보다 못하다고 시시하게 본 급우들 보다 못한 점수를 받고 친구도 한명도 사귀지 못한  나 자신이 너무 부끄럽고 창피했다.

 

집에서 고민을 하다 봄 방학 때 선생님께 전화를 했다.

" 저는 낙제인가요?

박우동 선생님은   2학년에 진급하면 공부를 열심히 할 것을 약속하자고 하셨다.

나를 위해서 17과목 선생님을  모두 찾아 다니며 점수를 얻어서 진급을 하게 햇다고 하셨다.

[이 학생은  제가 책임을 집니다] 하시면서......

"OO야! 선생님과 약속하자. 너는 잘 할 수가 있어. 약속하자. 응.."

" .............."

"선생님과 약속하자 .공부 열심히 하는 거다"

"네."

 

약속한 것은 꼭 지키려고 노력하는 편인 나는 2학년에 진급해서 공부를 열심히 하기 시작했다.

첫번째 시험에 반에서 20등, 다음에는 5등을 했다.

고3에 진학을 해서 계속 열심히 해서  이화여대 합격생 45명중에 속하게 됐다.

 

대학을 입학하고 모교에 갔었는데 교장선생님이  중국집에서 우동을 시켜주신 기억이 난다.

박우동 선생님은 보성고등학교로 전근을 가셨다는 소식만을 들었다.

 

그런데, 입학 후 몇 달 후 아침에  집앞  버스정거장에서  박선생님을 우연히 만나게 돼었다.

선생님은 결혼을 하시고 우리 동네로 이사를 오신 것이다.

선생님께  이화여대 뱃지를 단 모습을 보여 드릴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었다.

 

대학을 졸업을 하고  남중에서 과학 교사를 하는 동안에 나는 학생들이 많이 따르는 교사였다.

모범생보다는  문제가 좀 있는 학생과 성적이 좋지 않은 학생들을 관심을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고1, 그 때 박우동 선생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나의 인생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갔을 것이다.

내가 60이 다 됐으니 선생님은 85세 정도 되셨을 것이다.

 

선생님!

영어 시간에 쪽지에 [축결혼! 신랑: 박우동,신부: 김짜장,주례 : 이짬뽕] 써서 돌리며 킥킥대다가 걸려서 벌을 서던 때가 그립습니다.

17살  소녀가 이제 60이 다되서 선생님을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선생님 정말 고맙습니다.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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