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다반사 /일상

삼우제 , 언젠가 나도 가야 할 그 곳.

모과 2012. 7. 18. 06:00

 

2012년 7월 16일은 어머니 삼우제였다.

 

남편의 생모는 돌아가신지 56년이 지났고   홍성군 갈산면에 있는  종산에  묻히셨다.

 

아버님이 새어머니를  화장하기로 결심하신 이유가 있다.  자손들이 가족 묘를 한다는 이유로 선산으로 두 분 어머니를 이장하실 것을 막기 위해서 였다.

 

어머니의 산소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할아버지께서 목숨을 걸다시피 하셨다.  종산이라서 누구든지  산소자리를 사용하면 되기 때문에  무작위로 산소를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어버님은 앞으로  당신이 돌아가셔도 화장을 하라고 하셨다.

 

 

우린 산길을 걷고 계곡물을 건너며 어머니 산소로 갔다.  장례식 날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를 믿고 어머니의 유골을  덕산 시골집 사당에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 그날은  오후   생모님의 산소 옆에  임시로 새어머니의 거처를 만들어 드리고 왔다.

 

 

삼우제에는 완성된 묘지를 살펴보기 위해서 가는 것인데 우리는  형편상 삼우제에 어머니의 봉분을 만들어 드렸다.  다행히 삼우제 날은 비가 오지 않았고 하루 종일 흐린 날씨였다.

 

 

 

생모님의  산소를 헐어내는 모습이다. 

 

 

지난 해 번개가 심하게 쳐서 나무에 불이 붙었다.  산소 주변에 나무들이 많이 탔다.

 

 

90세 아버님(왼쪽 분) 과 큰아주버님 (70세)

 

 

우선 두 어머니를 합장하고 나중에 아버님과 두 분을 다시 합장 한다고 했다. 

 

 

 멀리 보이는 산이 백월산이다.

 

 

왼쪽에 생모님의 관을 평평히 하고 오른 쪽에 새어머니의 유골 함이 묻힐 자리를 포크레인이 파고 있다.

 

 

 

 새어머니의  유골함,  세상은 다 제대로 돌아가는데 한 사람만 지구에서 사라졌다는 사실이 늘 기가 막힌다.

 

작년와 올 해 시집과 친정 어른들이 모두 다섯 분이나  별세하셨다. 대전 성모 병원 영안실에서 어머니(78세)가 최연소였다.  모두 80세가 넘었고 97세가 최고령이었다. 장수 사회를 실감하게 된다.

 

 

새어머니의 아드님인 막내 시동생(53세)이 땅을 단단해지도록 밟고 있다.

 

 

 

인부들이 들어가서 꾹꾹 밟고 있다.

 

 

포크레인으로 잔디를 내리고 있다.

 

 

 

시아버님이 내게 말씀하셨다.

" 네 어미가 나보다 먼저 간 것이 제일 잘한 일이다. 내가 먼저 죽고 나중에  따라오면 천덕꾸러기가 될 것이다. 문상객이 1,000명이 왔어.  이런 대우를 받기가 힘들거야."

 

평생 아프시다 말년에는 치매로 집에서 모시지 못할  정도가  됐다.  집에서 3분 거리의   노인 병원에 모셨었다. 그후 5개월 만에  갑자기 배가 아프시다고 하셔서 ...... 응급실에 도착 하자마자  운명하셨다.

 

어떻게 생각하면 10살에 생모가 돌아가시고  가장  고단했던 사람은 큰시누이 형님(65세)이다.

 고명딸에서 위로 오빠 둘, 아래로 남동생이 둘인  엄마 없는 집안의   고달픈 딸이 됐다.

 

 

그런 시누이 형님이 부모님에게 하는  모습은 감동적이다.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집에서 모시다가

병원으로 모시고  매일 찾아 본 사람도 그분이다. 임종도  혼자 하게 됐다.

 

 

 

산소의 봉분을 만들려면 중심이 있어야 하므로   막대기를 심어 놓고 있다.

 

 

묘지 모양을 만들기 위해서  잔디를 놓고 있다.

 

 

 

큰 아주버님이  일을  꼼꼼하게  하는지 보고 계신다. 큰아주버님이 수고한 인생은 헤아릴 수가 없다. 중2 때 엄마가 돌아 가셔서 밑으로 동생들이 주르르 4명이나 있고 ...... 다행히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계셔서 집안의 중심을 잡아주셨다.

 

아버님은 중,고등학교 교사여서 타지에서 전근을 자주 다녔다.    큰시누이 형님과 남편,  35년 전에 미국으로 이민간 시동생은 주로 덕산 시골집에서  살았다.

 

 

 

 

 

 

 

 

삼우제를 지내려고 준비 중이다.

 

 

 

우리 집 안에서 제일 마음이 착한 막내 시누이 (49세) 와 시아버님 . 매주 일요일  친정집에 남편과 함께 다녀간다.   물론 시어머니에게도 잘 하고 있다.   아가씨의  시어머니는 같은 아파트 다른 동에서  살고 계신다.  자주 오시는 어머니를 위해서   아가씨는 새벽같이 일어나서  설거지 까지 깨끗하게  해놓고 출근한다.

 

 

미국으로 이민간 시동생(60세) 을 뺀 네 형제들( 상복 입은 사람들)

 

 

남편은 어디서든지 열심히 일을 한다. 나는 남편의 그런 모습이 좋고 존경한다.

 

 

완성된 봉분 , 두 분 어머니가 같이 누워 계신다.

 

 

잔디가 뿌리를 내리도록 열심히 땅을 밟고 있다.

 

 

제사 준비 .

 

 

제사 음식은 대전  성모병원  영안실 식당에서 준비했다.

 

 

아버님이 마지막 인사를 하고 있다.

 

 

 

새어머니와의  53년의 세월은 자식들에게 어떤 추억을 만들었을까?

전실자식이 5명이  있는 집에 후처로 오신 순간부터 어머니의 고난은 시작이  됐다.

막내 시동생을 낳은 후 어머니의 병환은 시작 됐고 50년을 투병했다.

자식들은 많은 것을 포기 하고  기가 죽어서 살아야 했다.

중간에서 아버님이 제일 힘들고 표현도 할 수 없는  인생을 살아오셨다.

누구의 잘못도  아닌데 모두 조금씩 힘들었다.

그것은 생모님이 살아 계셨어도  힘든 부분은  있었을  것이다. 그분도 늘 아픈 분이셨다.

 남편은 모두 운명이라고 말 했다.

 

 

 

 

모두 작별인사를 하고 있다. 나는 시집에서 제사를 모시기  때문에 천주교로 개종을 했다.  제사를 우상숭배로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음 날 비가 온다고 해서  차광막으로 묘지를 감쌌다. 물이 휩쓸려 내려 올 것을 걱정해서 였다.

 

 

두 어머니 ! 편히 쉬세요.

 

 

어머니들 산소에서 내려 다 본 풍경 .

 

 

 나는  삼우제를 마치고 내려 오면서  생각했다.

 나는 몇년 후에  이곳에 오게 될까?

 

환갑이 되도록 수 많은 장례식에 참석했다.

이제 내겐 죽음은 낯설지가 않다.

분명히 깨달은 것은 삶의 연장이 죽음이라는 것이다.

 

인생은 한 번은 살아볼만 하지만 다시 태어나고 싶을 정도로  매력적이지 않다.

이왕에 태어난 인생  내 가족들에게 만이라도  최선을 다하고 살고 싶을 뿐이다.

 

삼우제 가는 길에 보이는 수 많은 풀들 중에 한 포기 같은게 나의 인생이라고 생각한다.

 

내게 큰 사랑을 주시는 아버님에게 잘 해야 한다.

남편과 사이좋게 살아야 한다.

건강해야 한다.

신앙생활을 성실하게 해야 한다.

내가 가진 재능이 있다면  이웃을 위해서 봉사를 해야 한다.

 

그러면서  넉넉한 마음을 가진 할머니로  살고 싶다.

 

 

 

** 이번 주까지  쉬면서  몸과 마음을 경건하게 하겠습니다.

방문 해주고 어머니의 명복을 빌어주신 이웃님들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