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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아들이 15년 만에 대접한 보은의 식사 한끼

모과 2012. 4. 23. 07:00

 

 

큰 아들이 엄마 친구들에게  호텔의 한정식 코스요리를 대접했다.  몇년 전부터 가끔 말하던 것을 실천한 것이다. 15년 전 98학번으로  서울로 유학을 간  큰 아들은 엄마의 대학교 동창들에게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큰 아들의  대학 입학식이  있던 날  승희는 방배동 집으로 우리 모자를 초대했다. 부천에 사는 명희도 같이 참석을 했다. 승희는 큰 교자상 에 더 놓을 수 없을 정도로  가득 좋은 음식을 차려서 우리를 대접해주었다.

 

식사하기 전에 큰 아들이 찍어준 사진 , 19 살에 만 우리는  올 해  2월에 모두 환갑이 됐다. 왼쪽부터 박승희, 이명희,김성희 [나 모과, 다초점 안경을 써서 눈을 부릅 뜬 것같이 나와서 죄송합니다 ^^]

 

 

대학시절에는 늘 함께 다녔던 70학번 동기동창 친구들이었지만  모두 27세에 결혼을 한 후 각자의 인생에 충실하느라고 연락이 일시적으로 끓겼던 친구들이었다.

 

승희는 해외지사에 파견된 남편을 따라서 외국생활을 오래하느라고, 명희는 맏며느리의 책임을 다하느라고 , 나는 부산으로 이사가서 오래 사느라고 가끔 전화 연락만 하고 지냈다.

 

명희는 백화점에서 산 티셔츠를 선물로 주었다. 승희는 큰아들에게 구두를 사신으라고 10만원을 봉투에 넣어주었다.  근 20년 만에  만난  엄마 친구들에게 큰 아들은  감동을 받고 늘 마음 속으로 꼭 대접을 하고 싶다고 생각을 했던 모양이다.

 

1.  비스트로 서울 한정식 코스요리

 

  나는 일주일 전에  예약했던 삼성동의 오크우드 호텔 1층  한정식당 '비스트로 서울' 로 친구들과 함께 갔다.  큰 아들은 10분 전에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박김치와 열무김치가 먼저 나오고 '냉이청포묵국'이 나왔다.

 

 

큰 아들은 잠시 앉아서 엄마 친구들에게 인사를  한 후 계산을 하고 갔다.  저녁 식사는 동생과 함께 먹겠다고 했다. 올 해 엄마의 환갑이어서 꼭 식사 한끼를 대접하고 싶어했다.

 

 나는 생전 처음 호텔 코스요리를 먹어 보는 것 같다. 아주 서민적인 식성의 남편 때문이다. 남편은 아주 촌스런 음식만 먹고 싶어한다. 결혼기념일에도  자기가 좋아하는  보신탕을 먹자고 해서 나는 화를 많이 냈던 적이 있다.

 

세발나물 백합 초무침

 

2.  편안한 시간, 행복한 대화

 

딸만 둘인 승희는 국제금융가였던  남편을 15년 전에  암으로 먼저 천국에 보냈다.  오직 두 딸의 교육과 신앙 생활에 열중하며   지금도 수학강사로 ,교회 집사로 무지하게 바쁜 날들을 보내고 있다.

 

두 딸을 모두  결혼시키고 손녀를 본지 두 달 됐고 손자는 두 달 후에 본다. 우리는 가까운 곳에 살고 있는 승희의 큰 딸집에 갔다. 착하고 성실한 큰사위와  손녀 다인이를 보고 행복한 가정의 모습을 보니 참 좋았다.

 

 

봄나물 연근전

 

마침  친정에 와 있던 막내 딸이 차로 삼성동의 오크우드 호텔까지 태워다 주었다.  막내딸은 동탄에 사는데  2주일에 한 번 씩 반포의 시집으로 저녁식사를 하러 간다고 했다. 중간에 탑승한 막내 사위도 보니 참 다복한 승희 삶이 보기 좋았다. 승희의 두 딸과  사위들은 모두 능력이 있고 성실한  30대 들이다.

 

나는 승희가 두 딸을  결혼시키고 "이젠 죽어도 괜찮다"고 한 말이 너무 가슴이 아팠다.

그 동안  자식에 대한 책임이 마음에  큰 짐이 됐었는지  막내 딸을 결혼 시키고 감상선 암이 발병했었다. 승희는  씩씩하게 암을 물리치고 완쾌 했다.

 

나는 승희가 건강해서  더 행복한 할머니가 되길 소망한다.

 

인삼숯불 떡갈비

 

2. 착한 부모의 잘 되는 자식들

 

명희의  막내 아들은  9월에 졸업을 앞두고 지난 주에  대기업에 최종 합격을 했다. 모든 대학생들이 입사하고 싶어하는  선호도 1위인 기업이어서 더 자랑스럽다.

 

나는 그날 낮잠을 자다 명희의 전화를 받았다.  합격이든지 불합격이든지 나에게 전화를 해주기로 했었는데 '합격'이라는 말을 듣고 기뻐서 벌떡 일어났다. 동시에 친구들에게 문자를 보냈다.

 

우겹살 봄나물 찜

 

명희는 남을 배려하고 봉사하면서 행복을 느끼는 친구이다. 부천의 한 복지관에서 8년 째 문해 강사를 하고 있다. 친정어머니도  말기암으로 돌아가시기 전에 모셨는데 시어머니도 8년 이상  투병 중이시다.

 

치매가 시작 된  시어머니를 집에서 3년을 모시다  심해져서  노인 병원으로 모실 수 밖에 없게 됐다. 매주 토요일은  병문안을 가는  날이어서  다른 약속을 전혀 하지 않는다.  토요일마다  고단백의 죽을  일주일 분을 만들고 , 키위 7개, 요플레 7개, 치즈케익 7개,  강판에 갈은 과일 즙 등등 ..... 간병인을 위한 간식등을 챙겨서 남편과 함께 간다.  근 6년을 한 주도 빠지지 않고 그렇게 하는 것은  진심이 아니고는  정말  하기 어려운 일이다 .

 

자연산 은대구 졸임

 

우리 시어머니도 치매가 심해지져서 집 근처의 병원에 입원을 하셨다.  의사의 권유로 한 달 간은 면회를 못 갔다. 나는 명희의  모습을 보고 많이 배운다.   대전으로 이사를 한 후 일 주일에 한 번 이상 시집에 가도록 노력하게 된 것도 명희의 영향이 크다.

 

"자식들과 자기 자신 앞에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 최선을 다 한다" 는 명희의  말이 오래 가슴에 남아서이다. 부산에 살 때는 멀기도 했지만 나는 장사를 해서 시집에는 주로 남편만 다녀왔었다.  대전에 이사를 오고 나서는  시집 식구들과 자주 만날 수 있어서 좋다.

 

한우 양지 육개장

 

 

3. 고진 감래,  성실하고  회사에서 인정받는  두 아들

 

나는 40대에 고난을 견디면서 이 시기가 지나면 언젠가  평화의 날이 오리라 믿었다.

인생에서 노년이 편안하면  인생의 성공이라고도 믿었다.

그것은 일종의 자기 최면 같은 것이었다.  나는 묵묵히 내 삶에 성실히 임했다.

 

두 아들은 그런  어미에 대해서 고맙다고 자주 말해주었다. 엄마에 대한 보답으로 성실하고 겸손하며 착하게 커주었다. 귀한 음식을 먹으면  나중에  부모에게 꼭 대접을 했다.

 

 두 아들은 자신의  부족한 점을 인정하고 노력으로 보충했다. 회사에서 인정받기 시작했다.

 

군에 다녀오면서  아빠를 남자로 이해하기 시작했다.  변함없이 자상하고  성실한 아빠에게 감사하기 시작했다. 나는  남자에게 아들이 꼭 필요한 이유를 알게 됐다.

 

40대에  경험 부족으로  여러번  사업에 실패했던  아빠의 방황을 이해 못했던 아들들은 아빠의 친구같은 존재가 됐다. 그 동안 남편의 노력이 우리 가족들을 하나로 뭉치게 했다.

 

우리가 먹은 73,000원 한정식 코스요리 메뉴

 

홈메이디  깨강정 아이스크림

 

승희의 남편은 천국에 먼저 갔지만 늘 아내와 두 딸의 추억 속에서 사랑으로  살아 있었다. 승희는 남편에 대한 의리로 두 딸을 잘 키워서   결혼을 시켰다.   승희는 자기의 친정어머니가 그랬듯이 좋고 자상한 외할머니가 될 것이다.

 

명희의 남편은  내게 자기는  다이아몬드 같은 아내를 만났다고 말했다.

제주도 여행 중에도 남편의 식사를 아들들에게 자상하게 부탁하는  명희의 모습을 봤다. 두 아들들이 합심해서 아빠를 깨우고 아침식사를  차려서 드시고 출근하게 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런 명희의 아들들이 잘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고 나는 믿는다.

 

 나의 두 아들은  우수직원으로  상사에게 칭찬을 받고 있다.  내세울 것이 별로 없는 부모에게 감사하는 아들들이 고맙다.  늘 자기가 부족한 점을 인정하고 성실함으로 보충하는 태도도 고맙다. 

 

 

* 4월 28,29 일  제주로 직원 연수간 큰아들

 

은혜를 입었으면 언젠가는  꼭 보답을 해야 한다 .  집안이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엄마의 친구들에게 받은 사랑을  15년이나 늦게 보답한 것이 좀 미안했다.  큰아들은 힘들게 입사했던 회사에서 업무가 적성에 맞지 않아서  퇴사를 하고  이직을 했다. 새 회사에서 안착하는데 5년의 세월이 흘렀다.

 

 나의 친구 모두에게 기쁜 일이 있었던 올 봄이 바로 마음 편하게 식사를 대접 받는 시기로 적당했다.

다음 달에는  명희가 막내 아들 취업 턱을 내겠다고 미리 약속을 했다. 자연 유산으로  여러번 아기를 잃은 후  낳은 명희의 귀한 두 아들이 모두 잘 돼서 나는 정말 기쁘다.

 

1970년 3월에 나는  명희와 승희를 만났다. 명희와 승희는 중3 때부터 친구이다.

우리는 인생의 무거운 숙제를 등에 지고  하나 하나 내려 놓고 걸어 왔다. 이제 비교적 가벼워진 베낭을 메고  천천히  노년의 여행을 편안하게 하며 행복해지고 싶다.

 

나는 앞으로 더 기쁜 일들만  생기기를 소망하며 겸손히 기도하는 할머니가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