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인터뷰

내 인생의 롤모델을 하늘로 보내드린 날

모과 2011. 8. 25. 06:00

 

 

남편은 군에서 제대하고   서울 고모님댁에서  대학원을 다녔다. 당시에 고모님댁은  집이 넓지도 않았다. 3남 1녀의 사촌 형제들이 있는  소시민의 가정이었다.   남편뿐만 아니라 사법고시에 합격한 둘째 아주버님도  서울에 있을 때는 고모님댁에 있었다.  시누이 형님도 서울에서 직장에 다닐 때와 큰아주님이 카츄사에 복무할 때 면회를 다니신 분도 서울고모님이라고 남편에게 들었다.

 

1. 남편의 형제들에게  변함없는 사랑을 주셨던 시고모님들  

 

남편의 생모는 남편이 8살에 돌아 가시고 11살에 오신 새어머니는 평생 몸이 아프셨다. 당신이 너무 아프시니 남을 배려할 여유가 없으셨을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의 사랑의 부재가 주는 쓸쓸함은 모든 형제의 가슴에 그늘을 만들어 주었다.

 

시할아버님은 99세까지 정정하게 사시며 손자손녀를 보살펴주었다. 시할머니는 할아버지보다 9년 먼저 91세에 세상을 떠나셨다. 남편의 형제들은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각별한 사랑을 받고 자랐다. 시집의 어른들은  모두 장수를 하셨고 천수를 다하셨다.  치매나 중병에 들었던 분도 없다.

 

  시집의  시고모님들은  내가 그동안 세상에서 만났던 분들과 좀 다르셨다.  전혀 계산이 없고 무조건 조카들에게 잘해주셨다. 나는 결혼을 하고 어른들에게 사랑을 받는게 어떤 것인지 알게 됐다.

 

내가 결혼을 앞두고 제일 먼저 인사를 드리러 간 집도 서울 고모님댁이었다. 남편의 결혼준비를 서울고모님께서 도와 주셨다.  우리 뿐만아니라  고모님은 친정,시집의 조카를 23명이나 6개월이상 데리고 사셨다.친정 시집의 조카들이 서울로 오면 나쁜길로 빠질까봐서 데리고 있다가 결혼까지 시키기도 했다. 이 세상에는  그렇게 할 사람이 거의 없을 것 같다. 참 대단한 분이시다.

 

그 서울고모님(86세) 이  8월20일 오전 7시에 자택에서 장남과 며느리가  지켜보는 데 임종을 했다. 쓰러지신지 10분만에 세상을 떠나 하늘나라로 긴 여행을 떠나셨다.

 

 

2.   평생을 자손을 위해서 기도를 드리신  서울 고모님

 

서울 고모님은  독실한 불자였다. 성남에 있는 OO사에 가셔서 자손들을 위해서  자주 기도를 드리셨다.

 고모님은 남에게 베풀로 사시는게 생활이어서 늘 뜨게질을 하셨다.  털실로 수세미 ,덧버선,목도리등을 떠서 조카며느리들에게도 주셨다. 나는 특별히 목도리도 떠주셨다.

 

86세까지  송파구에 있는 노인대학을  다니셨다. 베드민턴과 테니스대회에 나가셔서 우승도 하셨다.

 

고명딸인   정희 아가씨가  고모님에게  들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엄마가  딱 3일만 아프다  돌아 가셨으면 좋겠다고 했었어. 그런데 그 마음이 바뀌어서  주무시다가 돌아 가시고 싶다고 하셔서...... 내가  엄마는 하늘나라에 가면 뭘 하실거예요? 했더니  하늘나라에 가서 노인대학에 가시겠다고 하시데요"

 

고종 사촌 형제들은  며칠이라고 병원에 입원을 하셨다 가면 한이 남지 않았을 텐데  효도를 못해서 너무 죄스럽다고 했다.  고모님은 노환으로 몸이 좀 아프시기는 했지만  평소같이 아침에 일어나셔서 뭔가를 느끼셨는지 큰 아드님에게 전화를 하셨다.  위층에 사는 장남과 며느리가  오고  물 두 숟가락을 마시고 당신 방에서 돌아 가셨다.

 

작년에 결혼한 손자와 손녀가 임신을 한 것을 크게 기뻐하셨다.  증손자 백일에 오시는 손님에게 드린다고 털실로 수세미 100개를 떠놓고 돌아 가셨다.  노안으로 눈도 잘 안보이시는데 감으로 수세미를 뜨신 정성이 나를 기가 막히게 했다. 그 정성에 고개가 숙여진다.

 남편과 함께 문상을 간 삼성의료원 영안실에는  수많은 화환이 계속 도착했다.  자손들의 인맥을 볼 수 있는 장소가 영안실 풍경이라고 생각한다.

 

 

3. 친정 엄마 없는 내게 친정  엄마 대신 해주셨던  서울 고모님

 

나의 친정 엄마는  내가 25세 때 45세의 젊은 나이로 갑자기 돌아 가셨다.  결혼을 할 때나 아기를 낳을 때나 나는 친정엄마의   도움을 받을 수가 없으니 포기하고 살 수 밖에 없었다.

 

큰아들을 낳을 때 3일이나 진통을 해도 아기가 나오지가 않았다. 낮에는 괜찮다가 밤이면 진통이 오고 다시 그러기를  3일이나 그랬다. 남편은  아내가 안타까워서 병실 밖에서 울고 앉아 있었다고 했다.

 

서울고모님과 시누이형님이  출산실에 들어 와서 나의 양손을 잡아 주었다. 얼굴의 모든 실핏줄이 터질 정도로 진통을 했으나  아가가 나오지를 않아서 큰 병원으로 가라고 했다.  큰 병원으로 가다가 산모와 아기가 죽을 지경이었다.  마지막으로 한번 더  죽을 힘을 주자 아가가 세상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아가도 너무 지쳐서 울지를 않았다.  정말  위험했던 순간에  서울고모님과  큰시누이형님이 함께 해주었다. 몇분 정적이 흐른 후 아가가 켁켁 하더니 울음을 터트렸다. 나는 입덧도 심했는데  출산도 남다르게 별났다.

 

 

 

고종사촌 아주버님에게 들으니  2011년 8월22일 오전 8시 서울시립승화원에 대기중인던 영구차 리무진에서 신기한 일이 생겼다고 했다. 영구차 리무진 지붕에 여치가 어디에서 나타나서 오래동안 앉아있었다.  비탈길을 지나가는데도 꼼짝하지 않고 그대로 오래동안  앉아있었다. 자손들은 어머니께서 마지막으로 하시는말씀으로 새겨들었다.

 참고: 여치는 99개의 알을 낳는다 해서 부부가 화합하고 자손이 번창하길 바라시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4. 친정마을 옆동네로 시집을 가셨던 서울고모님

 

고모님의 유해는 벽제 화장터에서 화장을 한 후 당신이 다니시던 절에 2일 간 안치됐다. 22년 전에 돌아 가신 고모부님과 함께 합장을 하기위해서였다.

 

충남 예산군 덕산에 있는 장씨 집안의 선산에 가족묘를 새로 만들었다.  먼산에 계시던 고모부님을 모셔다 화장을 한 후 함께 모셨다.

 

 나는 남편과 함께 덕산으로 갔다. 큰아주버님과 큰동서 형님 큰시누이형님도 같이 갔다.

 

 

5. 남에게  베풀고 살면 자식들이 잘 된다는 진리를 보여주시고 가신 고모님

 

 아직도 모르는 것 투성이인데 나도 모르게 60살이 돼 있다. 그러나 60년을 살면서 분명히 깨달은 것은 남에게 베풀고 산 사람의 자손들은 잘  된다는 진리이다.

 

나는 서울고모님과 홍성에 사시는 고모님의 삶을 보고 인생의 법칙을 발견했다.  성실하고 부지런하고 남을 위해서 양보하고 기도를 해주고 살면 바로 당신들의 자녀들이 잘 된다는 진리를 가르쳐 주셨다.

 

충청도 깡촌인 시골집 동네에는  학교가 없었다.  홍성고모님부터 마을 입구에 생긴 수덕초등학교에 다니셨다.  서울고모님은 무학이셨으나  한글을 깨우치셨다.  고모님들은 젊어서 무척 고생을 하셨다. 

 

나의 인생의 롤모델은 시고모님들이다. 평생 고생을 하며 사셨어도 사람의 도리가 무엇인지 자식들과 조카들에게 보여주셨다. 늘 절에 가서 기도를 드리셨다. 홍성고모님은 집에 까지 모셔다 드리면 짠지 하나라도 내 손에 들려서 보내시는 정이 있으시다.

 

 

6. 서울고모님들의  성공한 자손들

 

큰아주버님은 OOOO공사의 임원을 하시다가 퇴직을 하고 중소기업에 다니신다. 둘째인 나와 동갑인 시동생은 눈보호 기계를 발명해서  외국 여러나라에서 상을 받았다.  경기도의 유명 백화점에 대리점을 냈다. 셋째 서방님은 사업을 하고 있다. 막내이면서 고명 딸인 아가씨의 남편은 강원대학교 단과 대학장이다.

 

 종손자와 손녀는   좋은 배우자와 결혼을 해서 모두 아기를 가졌다. 

 

돌아가시는 순간까지도 자녀들을 배려해서  너무 갑자기 떠나셨다.  산소에서 들으니 미리 고향친척들을 모두 찾아 다니시고 인사를 하셨다고 한다. 좀 멀리 떨어져있는 세째 아들에게는 꿈에 나타나셔서 "나 간다 "고 말씀하시고 가셨다.

 

고종 사촌인  형제들도 고모님을 닮아서 심성이 참 좋다. 나는 남편의 말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 여보! 말하자면 우리가 가서 오래 살아서 부담이 됐을 텐데  표정 한 번  변하는 일없이 다들 잘해 주었어"

내가 그말을 정희 아가씨에게 했더니......

"우리는 그렇게 하는 건 줄 알고 살았지. 당연히 그렇게 하는 줄 알고 ."

 

 

7. 뵙고 싶어요.   고모님 !

가족 납공당에 고모부와 함께  하신 고모님 .....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우리 부부가 고모님에게 받은 사랑을 보답도 못했는데 이리 가시면 어쩝니까?"  나는 절을 하면서 장씨,박씨 가문에 모든 병을 가지고 가시기를 부탁드렸다. 우리들을 지켜주시기를 부탁드렸다.

 

둘째 며느리가 직접 만들어 온 약식에는 "뵙고 싶어요"  라고 대추와 잣으로 글씨가 써있었다.

고모님이  손자 손녀 결혼식에 입으셨던 고운 한복을 태우는 모습, 셋째 아들, 종손자와 손녀가 함께 하고 있다.

 

 

 

사랑하는 고모님 !

명복을 빕니다.  이제는 편히 쉬시겠네요.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고모님에게 배운대로  남에게 베풀면서 살겠습니다.

저도 좋은 시어머니, 좋은 할머니가 되겠습니다.

 

** 위의 사진들은 유족들이 훗날 어머니와 할머니를 추억하고 싶어서 제게 사진 촬영을 부탁해서 찍은 겁니다. 비가 온다던 날씨는 적당히 좋았습니다. 저는  고모님을 산에 묻고 돌아 왔지만  아직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