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교육

37년만에 만난 여자 대학 동기 동창들

모과 2011. 5. 18. 06:00

 

나는 5월31일,모교의 개교기념일 축제에  갈 예정이다.  자연대 동창들의 합창대회를 보러 가기 위해서이다.서울에 살고 있는 대학동기(물리학과 70)들은  매주  압구정동 광림 교회에  모여서 합창 연습을 하고 있다.나는 1974년에 대학을 졸업했다.

 지난 달에  37년 만에 대학동기 모임에 참석을 했다.  친구들은 졸업하던 해부터 2달에 한 번씩 넷 째주 목요일에 모이고 있었다. 모두 15명이었다. 나와 절친인 친구 명희가  더 참석을  해서 모두 17명이 됐다. 우리는 40명이 입학을 해서 34명이 졸업을 했다.

 

 

우리는 19,20살에 만나서 23,24살에 헤어졌다. 이제 60,61,62(재수한 친구) 에 다시 만났다. 친구들은  나를 바로 알아봤다. 나 역시 친구들 한 명 한 명의 이름이 바로 기억이 났다. 모두 참 보기 좋게 나이가 들어있었다.

 

나는 4월30일에 있었던 과대표 였던 친구의 아들 결혼식에 참석을 했다. 늘 만났던 친구들처럼 자연스럽게 , 느껴지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당연하기도 했다.

 

 

과대표였던 친구는  여중,여고시절에 죽 반장을 했다.지금은  모교인 OO여고 총동창회장을 하고 있다.  물리학을 좋아 해서 입학성적도 뛰어났다 4년내리 장학금을 받더니 졸업후 교사 생활도 모범적으로 했다.  서울시내에서 그 친구 반만 연합고사에 모두 합격해서 신문에도 났다는 소식을 다른 동창에게 들었다.  우리는 27세에 결혼을 하고 소식이 끓어졌다.  내가 지방에 내려가서 살았기 때문이다.

 

 

친구의 아들은  나의 큰아들과 동갑이었다.학사장교로 해병대에서 군복무를 하고  미국 유학중(자동차 디자인)인데 졸업을 한 학기 남기고 대학 캠퍼스 커플과 결혼을 했다.  이상형이 어머니같은 여성인데 신부가 그래서 결혼을 한다고 주례선생님이 말했다. 친구의 남편은  도선사이다. 중2 때 교회에서 만나서  친구가 연인으로 ,남편으로 변화된 경우였다.

 

외항선원인 남편이 집을 떠나 있는 동안  친구는 대학원을 졸업하고 모교에 강사를 하며 박사학위를 했다. 평생을 맏딸 공부바라지를 위해서 손자,손녀를 키워주던 친정어머니께서 중병에 걸리셔서 친구는 공부를 중단했다고 했다. 어머니를 간병하기 위해서였다.  우리 동기 중에  교수가 배출될 기회가 없어졌다. 친구의 친정어머니는  몇 년 전에 돌아 가셨다.  친구는 자기 공부를 포기하고 남편의 도선사 시험 합격과  1남1녀 자녀교육에 정성을 들였다. 

 

* 결혼식에 참석한 대학동기들 ,대부분  서울 강남에 모여 살고 있다.

 

부모를 닮아서 머리가 총명한 자녀들은 공부를 당연히 잘 했다. 막내딸은  서울공대를 졸업하고 연구소에 다니고 있다. 

 

 열명이 넘는 친구들이 결혼식에 왔다. 친구들의 표정은 평화로웠고 대부분 자녀를 결혼시켜서 할머니가 돼 있었다.  우리과 메이퀸이었던 친구는 그대로 고운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이과여서 그런지 우리과 친구들은  검소하고  성실했다.  우리는 학창시절에 대부분 가정교사를 했다. 대체적으로 성실하고 끈기가 있는게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전국각지에서 모여서  4년을 함께 보냈다.  가장 영혼이 맑고 순수했던  시절을 공유한 소중한 친구들이다.  동창이 좋은 점은 서로를 그대로 바라보고 인정해 준다는 것이다.  서로 비교하지도 않고 친구를 진심으로 축하 해주는 것도 좋다.

 

 

과대표였던 친구는  대학교 2학년 때   학교 앞 '애플'다방에서 내게 '고린도전서 13편'을 펼쳐보여주었다.  친구는 지금 교회에 다니지 않는다고 했다. 불자였던 친구들은 여러 명 개신교 여신도 회장이 돼 있었다.  나는 37년만에 대학  졸업식에서 헤어진 친구의 아들 결혼식에 참석해서 잠시 상념에 빠졌다. 우리가 헤어질때보다 10살이 더 많이 나이가 든 친구 아들의 결혼식을 보며 지난 세월을 생각해 봤다.

 

 

친구들은 대부분 교사 자격증이 있고 교직에 있던 친구들이 많다. 자기 자녀의 공부를 잘 돌봐주어서 모두 명문대를 입학시키고 주변의 권유로 학원을 차렸던 친구도 있다.

 

 

결혼식 후 10일이 지나서  대전집으로 과대표였던 친구가 전화를 했다. 위의 이야기는 친구와 통화중에 알게 된 사실이다.  친구는 내가 일주일에 한 번씩 서울로 드라마 공부를 하러 다닌다는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해 주었다.

 

"너는 학교 다닐 때도 적극적이더니 역시 뭔가 하는구나."

 

" 얘! 너는 장학금 받고 공부했지만  나는 아마도 꼴찌로 졸업했을 거야. 대학 졸업 전에 아파서 부속병원에 입원했었잖아.  마지막 졸업시험을 못봐서 우리 엄마가 승희하고 교수님을 다 찾아 다니며 사정을 말씀드려서  리포트로 대신냈었지. 그래서 아마 내가 꼴찌일거야"

 

" 어쩐지 네 모습이 보통 60세 아줌마 같지가 않고 자신감이 있고 당당해 보였어"

 

" 얘 ! 아직 며느리를  못 봐서 철이 없어서 그렇지 .나는 나이가 60이라도 모르는 것 투성이다"

 

" 네가 철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뭔가 깨달아서 말하는거지."

 

우리는 서로 웃으며 살아온 이야기를 했다. 37년의 세월을 쉽게 뛰어 넘었다. 5월 31일 개교기념일에 꼭 만나자고 약속을 했다.

 

 

나는 고3 때 모의고사 성적대로 얼떨결에 학과를 결정했고 명문여대에 합격했다고 어머니에게 큰 기쁨을 드렸다. 돌이켜보면 나는 모교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사람들은 선입견으로 나를 조금 과대 평가 해주었다. 나는 모교에 누가 안 되는 사람이 되려고 늘 노력을 하며 살았다.

 

인생을 마치 장애물 경기 하는 사람같이 살아 왔지만 나는 자존심과 성실함으로 굳굳하게 헤쳐왔다고 생각한다. 부모님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올바르게 살려고 노력을 했고 ,자식들이 보기에 부끄럽지 않은 어미가 되려고 열심히 살았다.

 

 

나의 이화여대 자연과학부 물리학과 동기들도 각자 굴곡진 인생을 살아 왔을 것이다. 나같이 자기 몫의 인생을 겪어내면서 모교 출신이라는  책임감을 느끼며 살았을 것이다.

꼴찌로 졸업한 나보다 더 열심히  성실하게 살아온 흔적을 나는 친구들에게 보았다. 나는 이제 두달에 한번 모이는 대학동기 모임에  가능하면 다 참석할 것이다. 그동안 객지에서 너무 외롭게 혼자  지냈기 때문이다.

 

37년만에 만난 나에게 어제 만난 것 같이 반가워 해준 친구들에게 정말 고맙다. 특히 대학 때 늘 함께 다니던 승희,명희도 1998년 큰아들 대학입학식 때 만나고 13년만에 만난 것은 그동안 나의 삶이 고달파서였다.

 

승희는 방배동에서만 30년을 살고 있다. 큰아들 입학식때문에 상경한 우리 모자를 초대해서 잔치상처럼 크게 한 상 차려주고  큰아들에게  구두티켓을 선물로 주었다. 그때도 20년만에  만났었다.  명희는 치매이신 시어머니를 모시느라고 그동안 동창 모임에  못갔다.

 

'이대 나온 여자'인 우리 친구들은  참 괜찮은 여성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