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다반사 /일상

내가 가장 미워한 사람은 아버지였다.

모과 2011. 5. 14. 09:30

 

 

 

나를 가장 사랑한 사람도 아버지였고 나를 가장 실망 시킨 사람도 아버지였다.

부모님은 경기도 파주에서 음식점, 제재소등을 해서 나는 비교적 넉넉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아버지는 나를 5살 때까지 남탕에 데리고 다녔다. 여름이면 개울가에서 닭죽을 끓여서 먹였고 물놀이도 하게 해주었다.

 

나는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외할머니와 서울에서 살았다. 한 달에 한 번 정도 만나는 부모님은 우리들에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주었다.

나는 공부를 잘해서 부모님의 자랑이 되기도 했다.

 고1때 서울로 모두 이사를 오면서 아버지는 내게 끝없는 실망과 절망을 주었다. 아버지는 마작을 해서 어머니와 자주 싸웠다. 어느 해는 나의 대학등록금을 몰래 가지고 가서 마작으로 다 날렸다.

 

 

내 나이 25세, 시골학교 교사를 하고 있을 때 45세의 젊은 어머니는 교통사고로 갑자기 돌아 가셨다. 친척이 없었던 우리 집에서 맏딸이었던 나는 7번 기절을 하면서 어머니가 다니던 교회 어른들과 장지와 관을 정했다.

 

그때 아버지는 오른 쪽 눈을 수술 한 후 실명하고 다른 쪽 눈의 수술 날짜를 잡아 논 상태였다. 그때의 고독과 절망은 글로 표현을 할 수가 없다. 아버지는 어쩌면 두 눈을 다 실명할 수도 있다고 했으나 다행히 수술 후 한쪽 눈은 보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아버지는 여자문제로 여러 번 맏딸인 나를 가슴 아프게 했다.

 

 

나는 아버지로부터 멀어지고 싶어서 결혼을 했다. 그리고 부산으로 이사를 가게 됐다.

아버지는 새어머니와 인천에서 사셨는데 노후가 남루하고 초라했다.법적으로 남이고 거의 만나지도 않는 여인을 어머니라고 부를 수도 부르지 않을 수도 없었다.

 

아버지는 65세에 신장암 말기로 밝혀져서 병원에서 23일 입원했다가 돌아가셨다.

나는 당시에 38세였는데 6개월 전에 기관지 확장증으로 오른 쪽 폐를 절단하는 큰 수술을 받아서 숨을 쉴 때마다 가슴이 아팠다. 매주 열차를 타고 부산에서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으로 갔다.

새어머니를 학교 앞 여관에서 좀 쉬게 하고 내가 아버지 병상을 지켰다. 자식의 도리는 하고 싶었다.

 

말기 암 환자에게는 몰핀을 원하는 대로 놔주었으나 효과는 전혀 없었다.

아버지는 고통을 이를 악물고 참으며 내게 말했다.

“성희야! 미안하다. 고맙다”

나는 아버지의 고통을 보고도 마음이 아프지 않았다. 일생을 허비한 죄 값을 받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상경하는 열차 속에서도 눈물이 전혀 나지 않았다. 그 정도로 아버지가 미웠다.병원에 도착하니 새어머니라는 여인은 영안실 앞 잔디밭에 야외용 돗자리를 깔고 술이 취해서 자고 있었다. 누추한 그 여인의 모습이 바로 내 아버지의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추석 하루 전이 장례식이라서 상가를 찾는 문상객은 더 없었다. 아버지 친구는 단 한 명이 왔다. 이북에서 같은 동네에 살던 친구였다.

 

나는 그전에도 그 후에도 내 아버지 장례식 같이 초라하고 적막한 상가 집을 본 적이 없다. 그렇게 아버지는 딸에게 한을 남기도 돌아 가셨다. 어머니가 있는 탄현기독교인 묘지에 합장을 했다.

 

나는 아버지를 용서 하는데 10년도 더 긴 시간이 필요했다. 세월이 많이 흐른 후에야 아버지도 어쩔 수 없이 장자 선호 사상의 희생자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할머니의 큰아버지에 대한 편애로 아버지는 할머니가 키우셨다. 

 

성장기에  올바른 가치관의 정립이 없이 정만 많이 받고 자란 아버지가 의지력이 약한 것은 당연한 일임을 깨달은  것은 내나이가 50이 넘어서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여전히 내게 한으로 남아 있다.

 

**방송아카데미  숙제였습니다. 11명의 수강생들이 모두 자기를 오픈해야  하는 수업입니다.

그래서 더 진솔한 강의이고, 드라마 작가의 기초를 배우는데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