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교육

여행지에서 본 달라진 수학여행 풍속도

모과 2010. 10. 24. 11:09

부모님을 모시고 가족여행을 다니면서 가는 곳마다 수학여행을 온 학생들을 만났다. 초 중고등학생들을 다 만났다. 경주와  통영, 지리산 자락의 남원의 콘도를 큰아들이 예약을 해주어서 11명의 대가족이 함께 다녔다. 회사원의 가족을 위해서 1년에 7일간 무료로 주중에 콘도를 사용하게 해주는 큰아들의 회사에 감사함을 느끼는 여행이기도 했다. 큰아들은  대학 재학중에  미국에 사는 작은 아빠 집에 45일간 , 작년에 휴가로 8박 9일을 다녀왔다.  미국에 머무는 동안  최대한의 환대를 받은 아들의 보은의 시작이기도 하다. 앞으로 평생을 살아가는 동안  조금씩 그 은혜를 갚아가야 한다.

 

 최연소 57세 (미국동서) 부터 최고령 88세 (아버님) 까지 총 11명이 자가용 한 대와  12인승 렌트 카 1대를 가지고 떠났다. 점심은 휴게소에서 큰동서 형님 (66세) 이 새벽부터 싼 김밥과 휴게소의 식당에서 산 우동 세 그릇과 함께 먹었다. 참 아름답고  즐거운 추억이 될 여행이 시작되는 곳이었다.

 

 

 경주의 문무대왕능 으로 수학여행온 서산의  초등학교 6학년 학생들 ,  문무대왕이 서거 후 화장해서 저 돌 바위 사이에 수장하라고 했다는 곳이다. 죽어서도 나라는 지키겠다는 굳은 의지가  존경스럽다.

 

참고:경상북도 경주시 양북면 봉길리 앞바다에 있는 신라 문무왕의 수중릉(水中陵).사적 제158호.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은 자신이 죽으면 불교식으로 화장한 뒤 유골을 동해에 묻으면 용이 되어 동해로 침입하는 왜구를 막겠다고 유언했다.[다음 위키 백과 참고]

 " 자! 여러분! 이제부터 자유시간입니다. 한가지 약속할게 있어요. 바닷물에 한 명이라도 신발이  빠지는사람이 있으면  숙소로 돌아가서 그대로 자는 겁니다.  선생님과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자유시간 없이 바로 자야 합니다. 알겠지요?" 마이크를 든 여선생님은 문무대왕능에 대한 설명을 자세히 한 후 애교있는 협박을 했다.   선생님의 목이 많이 쉬어 있었다.

" 네에!!"

 나는 저기 돌아서 있는 남학생 둘 중에 한 명 혹은 둘 다 까불다가 바닷물에 빠질 것 같은 예감 때문에 혼자 웃었다.

  

베지색 모자를 쓴 두 명이  미국에서 온 시동생 부부이고 제일 키가 큰 여자(하늘색 잠바)가 나다.

 

 여기는 불국사이다. 11명의 가족 사진, 가는 곳마다 몸이 불편한 분과 아가들을  위해서 휠체어와 유모차를 대여해주었다. 주민등록증만  맡기면 된다. 일행 중 경로 6분 ,휠체어를 미는 사람은  공짜이기 때문에 우리는 4명의 입장료만 내곤 했다. 류마티즈 관절염으로 걷기 불편한 어머니는 늘 휠체어를 타고 다녔다.

 

 

 미국으로 이민가서 30년 만에 부부가 함께 들어 온 시동생(58세)이 주로 어머니의 휠체어를 밀고  다녔다. 미국에서 생활이 안정되면서  2년에 한 번씩 조카들이 대학을 졸업 할 때마다 부모님을 초청해서 2달씩 모시면서 미국의 유명한 관광지는다 관광시킨 효자이다. 부모님은  미국의 워싱턴 대학과  M IT 대학 , 유타 주립대학 졸업식에 참석하셨다. 동서 친정 식구들은 모두 이민가서 정착했다.시댁의 효심은 대를 이어서 내려오는 유전적인 것이다.

 

 결혼 33년만에 처음으로 시집 식구들과 함께 한  가족여행이다. 앞으로는  일 년에 한 번씩 다니기로 했다. 매주 덕산 시골집에서만 모두 모여서 집을 고치느라고  여행은 생각을 못했다.

   

통영의 콘도에서 내려다 보니 이른 아침부터 식사를 마치고 선착장으로 보트를 타러 가는 수학여행 온 남고생들의 모습이 보였다. 마침 우리가 머물고  있던  9층의  반대 복도 편에도 서울에서 수학여행 온 남학생들이 머물렀다. 

학생들이 머물던 방이 모두 열려 있어서 들어 가서 사진을 찍었다.  우리 숙소와 구조가 똑 같았다. 내가 수학여행 가던 1968년엔  여관에  묵었고 부잣집 친구는 이불이 더럽다고 울면서 징징대기도 했다.

 

1977년도 여고 담임으로 여고생들을 인솔하고  수학여행을 경주로 갔을 때도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다. 역시 우리 반 여학생들 중에도 이불이 더럽다고 운 아이가 있고  왜 선생님들 밥상만 더 좋은 반찬이 많으냐고 따진 아이도 있었다.

 

내가 여고시절에는 선생님은 당연히 대접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생각해 보면 학생들과 같은 반찬으로 밥을 먹어도 괜찮다고  마음 속으로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댓글을 보고 생각이 났는데  여학생들은 차속에서서도 방에서도 춤을 신나게 추었다. 노래도 목이 쉬어라 불렀고 ..춤을 추다추다 지치니까 누워서 손으로만  춤을 추어서 내가 웃은 기억이 난다.

한방에 4~5명이  배정된 콘도의 실내 , 우리는 어머니가 몸이 불편해서 꼭 침대 방에 묵었다. 남학생들이라서 키들이 무척 크고 건강했다. 역시 여선생님은 목이 쉬어서 힘들어 보였다.

 

 

 콘도 안에 있는 편의점은  대박 매출을 냈다. 컵 라면과 과자 음료수가 동이 날 지경이었다. 우리 때에는 집에서  간식을 다 사서  가지고 다녔는데 요즘 아이들은 간편하게 돈만 가지고 가는 것 같았다.

   

 

 

여행에서  집으로 돌아가 글을 쓰려고  막내아들에게 전화를 했다.

" 막둥아! 너 수학여행 갔을 때  용돈 얼마나 가지고 갔어?"

"왜? 엄마. 재미있게 지냈어?   보통 10만원은 가지고 가지. 가서 다 노름하고 잃어 버리는데

"  응 . 여기에 수학여행 온 학생들이 보여서 ..무슨 노름을 해? 고스톱을 하나?"

'아니. 버스 속에서 부터 짤랑이 해서 엄마가 준 돈 5만원을 다 잃었어.  가서는 카드로 하던데"

"짤랑이? 동전 따먹기인가?'

" 500원짜리로 했지. 그런데 그건 껄렁하고 노는 애들만 하는데  많이는 안해?

" 몇 명 정도 하는데?   네가 껄렁했나? 엄마는 몰랐는데 "
"한 10명 (48명 정원 일 때) 정도 . 그보다 좀 많았나?  나는 껄렁 하기도 하고 공부도 좀 하고 했지. 대체적으로 공부 잘하고 착실한 아이들은 안했지 "

"술도 좀 먹었나?"

"나는 술은 안먹었는데  술 먹는 아이들도 좀 있긴 한데 우리 때는 그렇게 많지는 않았어. 선생님들이 돌아 다니면서 수시로  조사했거든.우리 방에는 이불 속에 감춰 두었다가 들켰어"

 

벌써 13년 전이다. 막내가 고2 때 수학여행을 다녀와서 했던 말과 일치했다.  어떤 학생은 카드놀이로 돈을 잃고 친구에게 빌려서 또 잃고 했다고 했다고 들었다.

 

1968년도에  내가 수학여행을 경주로 갔을 때는 전체 학생들을 모두 마당으로 나오라고 했다.

빙 둘러 앉아서 장기 자랑도 하고  댄스 경연대회도 했다.  선생님들이 큰 양동이 민속주 막걸리를 가져와서 한  잔 씩 마셔 보게도 했다. 얼마나  건전하면서도 재미있게 놀았는지 여관 종업원들이 모두 나와서 볼 정도였다.

 

콘도에서 수학여행을 온 남고생들을 보며 큰 식당에서 학급 별로 막걸이 한 잔 씩을 건배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마음 속으로 바라는 바를 생각하며 건배! 위하여! 브라보~ 뭐든지  평소에 제일 소극적이고 내성적으로 보이는  학생에게 선창을 시켰면 좋겠다.

공부에 찌든 마음을 이번 수학여행에서 다 풀어 버리고 빈 마음으로 돌아 가자고 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각 방에 가서는  더이상 술은 마시지 말자고 했으면 좋겠다.

 

 

**여러분의 수학여행은 어떠셨나요? 댓글로 써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우리 가족여행도 교육적인 자료가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해서 가족사진을 올렸습니다.

 

* 교육 코너 베스트로 선정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더 좋은 글을 쓰도록 노력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