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학번인 나는 고3 때 모의 고사 점수에 맞추어서 담임이 정해준 대학과 학과에 진학했다.
정원 40명 중에 반이상이 재수,삼수를 한 학생들이었다. 서울시내와 전국의 명문 여고 출신들이 대부분이었다. 여자 100명중에 1명이 대학교에 진학하던 시절이었다.
나는 대학에 입학한 후 곧 학과가 내 적성에 맞지 않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이화여자 대학교에서의 4년은 내게 참 많은 것을 깨닫게 해주었고 졸업 후 모교의 덕을 많이 보고 살았다.
1, 결혼을 잘하려고 명문여대에 진학했던 학생들
대학에 입학을 하니 대강당에서 전체 채플을 매주 2번, 학과 에서 매주 1번 채플을 했다.
카리스마 있는 김옥길 총장님은 "우리 이화인은 ...." 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였다.
점수에 맞춰서 얼덜결에 입학한 나는 어느새 "이화인"이라는 말을 마음 속에 자부심으로 간직하기 시작했다. 내가 소중한 존재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채플시간은 교목님이 설교도 했고 강사를 초빙해서 하기도 했다. 타종교 학생들이 들어도 도움이 될 내용들이었다.
지금은 학생들의 반대로 채플이 1번으로 줄었다고 들었다. 기독교인이었던 나는 작은 초록색 수첩 앞에 배꽃 모양의 마크가 좋았다. 수첩뒤에는 자주부르는 찬송가가 부록으로 붙어 있었다.학부마다 뱃지의 색깔이 다른 것도 신기했다.
그 당시에는 공부를 잘해도 남녀공학에 가지않고 여대에 진학을 많이 했다. 남녀가 연애를 하는 것을 아주 나쁜 행동으로 생각하던 보수적인 시대였다. 그러면서 미팅은 하는 좀 모순이 있는 시절이었다. 대학을 졸업을 하고 바로 결혼을 하면 제일 잘 된 경우였다.
나의 대학시절은 가정교사와 적성에 맞지 않은 학과가 힘들었던 것과 아주 깊이 허무주의에 빠져서 수많은 형이상학 책들을 찾아 읽었던 시절이었다.
대학 생활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모혜정 교수님과 충북 단양으로 갔던 농촌 봉사와 10,000명이 넘는 여대생들 속에서 객관적으로 나를 판단 할 수 있는 능력을 터득한 일이다.
2. 모든 후배 교수의 롤모델이 될 수 있는 모혜정교수님.
내가 입학하던 해에 미국에서 귀국한 모혜정 교수님은 우리과 선배이기도 했다. 수수한 옷차림에 늘 미소를 짓는 모습이 기억난다. 유학을 가기 전 모교 대학원의 교재에서 틀린 부분을 발견하고 미국의 저자에게 편지를 썼다고 했다. 저자에게서 고맙다는 편지를 보내 왔다.
그런데 박사학위 공부를 하러간 미국에서 지도교수가 그 책을 쓴 저자였다고 했다. 남편도 서울대학교 물리학과 교수였다.
모혜정 교수님은 늘 강의시간을 넘길 정도로 열정적으로 강의를 했다. 어쩌다 5분 늦게 강의가 시작되면 5분 늦게 끝났다. 단 한번의 공강도 안했고 비가 와서 정전이 된 어두컴컴한 강의실에서도 끝까지 강의를 한 분이었다.
어느날 우리과 친구들이 당시유행하던 소위 땡땡이를 쳤다. 교수님은 이문제를 상당히 심각하게 받아 들였다. 본인의 강의가 좋지 않아서 학생들이 단체로 보이코트 한 것으로 알고 울음을 터트렸다고 들었다. 과 대표와 몇명의 학생들이 찾아가서 손이 발이 되도록 빌고서 용서를 받았다.
그후로 우리들은 땡땡이를 치지 않았다. 나는 모혜정 교수님에게 성실과 진실된 사람이 어떤 모습인가를 배웠다.
모혜정교수님은 훗날 자연과학부 학장,대학원장을 지냈다. 최초의 부부 물리학 교수이다.
3. 네 뒤에는 누군가의 희생이 있었다 ..김옥길 총장
나는 졸업을 4개월 앞두고 교내 신체검사 결과로 '결핵성 늑막염"이 발병한 것을 알게 됐다. 동대문에 있는 대학 부속 병원에 한 달 입원을 했다.마지막 시험은 어머니가 수강 과목 교수님을 찾아 다니며 사정을 해서 레포트를 내는것으로 대신했다.투병 중에 졸업식에 참석을 했다.
동기들은 졸업 후 결혼을 하거나 취업이 확정됐다. 우리가 졸업 할 때쯤 "사립 교원 임용 시험"도 생겼다.
친구들은 34명 졸업했는데 14명이나 서울시내의 과학 교사가 됐다. 과학 단지 연구원이 된 친구도 있고 , 은행원이 된 친구들도 있고, 신문사 기자가 된 친구도 있었다.
나는 일년은 무조건 집에서 약을 먹으며 요양을 해야한다는 의사의 말에 비참한 패배감에 빠져 있었다.
그 와중에 졸업식에 참석을 했는데 김옥길 총장님은 "봉사와 배려, 지식의 사회 환원" 에 대해서 말했다.
" 여러분이 졸업을 할 때까지 여러 사람의 희생이 있었습니다. 앞으로 살아 갈 동안에 그사실을 잊지말고 학교에서 배운 것을 사회에 환원하는사람이 되세요. 어느 곳에 있든지 그안에서 봉사를 할 것을 찾아서 하세요. 많이 배웠다는 것은 남을 배려하고 봉사할 때에 빛나는 겁니다...."
나는 졸업 후에 총장님의 말씀을 자주 기억했다. 점심 시간에 학교 잔디에 누워있는 학생을 본 총장님은 채플시간이 이렇게 말했다.
" 나는 단지 여러분의 귀에 벌레가 들어 갈까 봐 걱정이 됩니다"
나는 총장님께 말을 지혜롭게 하는 방법을 배웠다. 기숙사 사감으로 계실 때는 전교생의 이름을 다 외운 교수로 이름이 나 있었다. 총장을 그만두고 충북 문경의 고사리마을 수양관에 사시면서 6년동안 대학 교문안에 발을 들여 놓지 않은 일화는 유명하다.
나는 일생에서 제일 비참한 순간에 들었던 김옥길 총장님의 축사를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살면서 내 양심의 소리가 시키는대로 정직하게 살려고 노력했고 남의 입장도 돼 보곤 하며 살았다.
4. 세상에는 나보다 똑똑하고 예쁜 사람이 많이 있다고 깨달은 학창시절.
수도권의 여고에서 전교 1등을 한 여학생이 이화여대에 입학을 하고 크게 놀란 일이 있다고 했다.고등학교 졸업을 할 때 까지는 자기가 최고인 줄 알았는데 대학에 입학을 한 후 모든 학생들이 똑똑한 것에 놀랐다고 했다.
문과 이과는 옷차림만 봐도 알 수가 있었다. 불문과 학생들은 30명이 정원이었는데 캠퍼스 어느곳에서도 눈에 띄게 세련되었다. 영문과는 당시에 90명이었는데 대한민국 전교 1등은 다 모였었다. 의대생들은 수수한 옷차림에 큰가방을 가지고 다녔다.
당시 시대의 조류가 영문과와 약학과 가정과를 선호 하던 때였다.
재벌 ,정치가, 지방 갑부의 딸들이 많이 다녔다.
내가 학교에 다닐 때는 학교 정문 앞으로 죽 맞춤 양장점이 늘어서 있었다. 사실 재학생들은 학교 축제 때나 옷을 맞출까 할 정도였고 대부분 청바지에 맞춤 티셔츠를 입고 다녔다. 양장점은 주로 졸업생이나 직장인들이 이용했다.
10,000명의 여학생들이 모여 있어서 화려하고 사치스럽게 보였나 보다. 4년동안 다른 학생들이 입고 다니는 옷차림만 봐도 패션 센스는 자연히 습득하게 될 정도였다.
5. "나 이대 나온 여자야 ! "가 주는 비현실적인 존재감
영화 "타짜"의 정마담은 아마도 이화여대를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굳이 자기가 이대를 나왔다고 강조를하는것은 상대방이 무시할까 봐 하는 거짓말 같이 느껴졌다.
이대를 나오지 않고 대범하게 이대 대강당에서 졸업생이라고 강연도 한 연극배우도 있었다. 얼마나 이대를 다니고 싶었으면 그런 거짓말을 했을 까? 측은한 생각도 들었다.
내가 다닌 이화여자 대학의 학생들은 사치하지 않았다. 밝고 당당해서 화려하게 보였을 것이다.
1886년에 개교해서 125년의 역사가 있는 여자 대학이다. 한때는 출세한 남자의 아내는 대부분 이화여대 졸업생이었다. 해마다 "이화 사위의 밤"을 열고 사회는 가수 이문세씨가 하곤 했다. 그의 아내는 육완순 무용과 교수의 외동딸이고 수학과를 나왔다. 학교 발전 기금을 모금하는행사인 것으로 알고 있다.
현재 이화여대 재학생은 대학원생까지 20,000명이다. 졸업생들은 사회 전반에 걸쳐서 활동을 하고있다.
아니면 현모양처로서 내조에 충실하고 있다.
나는 대학재학 중에 학과가 적성에 맞지 않아서 공부를 잘하는 학생은 아니었다. 단 한번도 장학금을 받은 적도 없다. 지금까지 나는 학교 덕을 많이 본 졸업생이다. 앞으로는 내가,혹은 나의 자식들이 사회에 공헌을 해서 제 에미 덕분이라고 말해주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모교의 빚을 갚고 싶다. 나는 모교로 부터 받은 보이지 않는 혜택들을 되돌려주는 순간이 오길 기도하고 있다.
** 며칠 전 시아버님과 대화 중에 아버님이 부끄럽게도 밖에 나가시면 저를 칭찬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제가 사회를 똑바로 본다고 그러십니다. 올해로 결혼 33년차인데 그동안 지켜 보시다 칭찬을 해주셔서 무척 고마웠습니다.
그것은 제 친정 부모님이 일찍 돌아 가셔서 시집 일에만 몰두 하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시집과의 관계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진실되고 양심에 가책을 느끼는 일을 하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냥 제가 할 일을 하고 위계질서를 잘 지켜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날 밤 늦게 집에 와서 남편에게 말했더니 뜻밖에 말을 하더군요.
"아버지도 당신하고 말하는 재미를 느끼셨나 보지" 하며 웃었습니다.
제게 장점이 있다면 부모님에게 교육받은 예절과 따뜻한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진명여중에서 교육받은 절제와 질서, 서울 중앙 여고에서 배운 낮아지는 자세와 남에 대한 배려, 이화여대에서 배운 밝고 맑은 성격과 당당함입니다.
그동안 저 살기에 급해서 봉사를 못했습니다. 대학에서 배운 지식으로는 8년의 교편생활을 했습니다.이제 자식이나 남편에 대한 제 몫은 다한 편이니 사회를 위한 봉사를 하며 살고 싶습니다.
그게 제가 바라는 노년의 생활입니다.
** 교육 코너 베스트로 선정해 주어서 고맙습니다. 더 성실한 글로 보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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