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교육

"제발 전학가라 " 던 초등학교 담임

모과 2010. 6. 21. 12:11

나는 초등학교 5학년 까지 경기도 파주군 천현읍의 "천현초등학교"를 다녔다.

우리 집은 읍내에서 제재소와 운수업을 해서 부모님이 늘 바빴다.

 

어머니는 무학으로  성실하게 살아 가는 보통 시골 엄마였다.아버지는 자식을 무조건 사랑하는 자유방임 주의 였다.아버지는 무조건 딸을 예뻐하는 분이었다. 아버지는  여름이면 가족들을 데리고  냇가에 가서 목욕도 하고 닭죽도 끓여 먹고 왔다.내 생애 가장 고민도 없고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부모님은 내게 공부를하라고 말씀을 한 기억이 없었다.

다만 예의 ,정직, 형제애, 배려,건강을 중요하게 키워주었다.

 

나는 학교에서 돌아 오면 숙제라는 것을 해본 적이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집에 오면 뛰어나가서 산으로 들로  냇가로 다니면 재미있게 놀았다.

 학교에 준비물도 제대로 해간 적이 없었던 것 같았다.

그때는 온 동네 아이들이 모두 함께 놀았다.. 술래잡기,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말타기, 줄넘기,를 하며 신나게 놀다가 엄마들이 밥먹으라고 찾으면 집으로 들어 갔다. 봄이면 산으로 들로 나물을 함께 캐러 가고 여름이면  밤에 냇가에 가서 목욕을 했다.

 

 

 ** 사진은 시골동네 입구에 있는 수덕 초등학교 ,천현초등학교도  당시에는  한  학년이 두반 뿐이었다. 학교 울타리는 아카시아 나무로 돼 있었다. 5월이면 아카시아 꽃과 라일락에서 향기가 무척 많이 났다. 우리들은 아카시아 꽃을 따서 먹곤했다.

가을운동회에는 온동네 어른들이 다 왔다. 어머니는 바늘 에 실을 끼고 달리기를 하고 일등을 했다

오재미로 바구니를 터트리면 비둘기가 날아가며 점심시간을 알렸다.  나의 유년시절을 천현초등학교에서 보낸 것이 인생의 큰 축복이었다고 생각한다. 벌써 50년 정도의  세월이 지났다

 

 

 

* 천현 초등학교의 현재 모습: 학교 홈페이지에서  가져왔습니다.완전  도시 학교로 변화됐다.

 

 나는 남자 아이들과 잣치기를 해도 이기는 말괄량이었다. 줄넘기를 하며 사까닥질 을 하면 팬티가 보이든 말든 씩씩하게 해서 일등을 하곤 했다.

 

내가 5학년이 되자 우리집은  읍내에서  30분가량  걸리는 용주골이라는 기지촌으로 이사를 갔다.

당시에는  전국에서 제일 큰 기지촌이라고 들었다. 양공주들과 미군들이 많이 보이는 동네였다.

그곳에서  부모님은  다른 사업을 정리하고  큰 한식당을 했다. 식당 옆에는  외국인 전용 클럽이 있었다.

살림집은  식당뒤에 있는 한옥이었다. 방이 남아서 미군부대 다니는 신혼 부부에게 세를 두 방이나 주었다.

 

 이사간 동네에는 초등학교를 짓고 있었다.,  나는 매일 버스로 통학을 했다. 동네 아이들과 같이 갔다 돌아 오는 것이 재미있었다. 장날에는사람이 너무 많아서 버스를 탈 수가 없었다. 모두 사탕이나 과자를 사먹고 걸어서 집에 갔다.   신작로의 먼지를 다 뒤집어 쓰고 얼굴이 새카맣게 되서 집에 오면 저녁 때가 다 됐다.

걱정하던 엄마에게 등짝 한 대를 맞고  저넉을 먹은 후 바로 잤다. 하루종일 노는라고 너무 고단했다.

숙제가  뭔지,준비물이 뭔지도  몰랐고 그냥 책가방만 들고 왔다 갔다 한 기억밖에 없다.

부모님은 장사가 너무 잘 돼서  아이들을 돌 볼 겨를이 없었다.

 

 나는 학교에 가서도 너무 산만해서   교단 맨 앞자리에 제일 말썽쟁이 남학생과 나란히 앉혔다.우리 동네에 학교가 완성돼자 담임선생님은 매일 나보고 전학을 가라고 했다.

지금 초등학교5학년때 담임 선생님 얼굴이 전혀 기억에 남아있지 않지만 그말을 자주 한 것만 기억에 남는다.

 

어느 날 학교가 끝나고 반 친구가 집에 놀러가자고 해서 쫒아 갔더니 우리 집과는 정반대인 율곡선생의 묘지가 있는 동네 였다. 가도가도 산골이었다. 그집에서 놀다 집에  어떻게 돌아 갔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런데 다음날 어머니가 학교에 가서 상담을 했다.

 

* 경기도 파주군 법원읍 동문리 자운서원 : 율곡선생과 신사임당 묘지가 있다. 

 

담임선생님과 상담을 한 어머니는  서울로 나와 동생둘을 전학시키기로 했다.학급친구보다 한살 어렸던  나를  담임 선생님이 5학년에서 6학년으로 진급 시키지 않고 그대로 5학년으로 유급해서 전학시켜주었다. 서울에 작은 한옥을 사서 외할머니와 함께 살기로 했다.

 

완전 촌에서 자랐던 내가  해가 어둑어둑 할 때 도착한 서울역 앞의 모습은 환상적이었다.

내가 한 번도 안가 본 미국을 간다해도 그때 느낀 충격보다는 적을 것이다.

나는 내 인생이 확장되는 것을 몸으로 느꼈다. 내가 우물안 개구리였다는 것도 깨달았다.

최초의 정체성이 "나는 촌년이고 아무것도 모르고 똑똑한 서울아이들에게 던져졌다" 는 것이다.

뭔지 모를 부끄러움을 크게 느꼈다. 그게 나의 서울생활의 시작이었다.

 

* 예전의 서울역모습: 나는 지금의 서울역보다 예전의 서울역이 더 좋다.

 

용주골에서 좀 산다는아이들은  서울에 와서 학교를 다녔다. 어머니는 나를 전학시키자 마자 동네에 수소문해서 대학생과외 선생을 구해주었다. 고려대학교 법학과 일학년이었다.시골에서 얼마나 공부를 안했으면 5학년을 두번 배우는데도 그 사실을 전혀 몰랐다.시골아이들의 순진 순수,정직한 모습을 다 가지고 있던 나는 서울생활을 열심히 적응했다.

 

* 현재의 청구초등학교모습: 학교 홈페이지에서 가져 왔습니다.

 

 나는 태어나서 10여년을 싫컷 놀았으니  이제 공부밖에 할게 없었다.  과외 선생은 틀리는대로 손바닥을 때렸다. 정말 기적이 일어났다. 전학을 오고  두번 째 시험에 내가 반에서 일등을 한 것이다.

특히 수학은 너무 재미있고 시험을 보면 전혀 틀리지를 않았다. 그당시 여학생 반이 두 반이었다.

담임 선생님은  나를  "수학박사'라고  블렀다. 그후 고3까지 수학은 늘 전교 1등이었다.

졸업할 때까지 나는 반에서 1,2등을 했고 무사히 진명여중에 입학을 했다.

 

그후 나는  서울중앙 여고,이화 여대를 졸업하고 경기도에서 과학교사를 8년정도 했다. 내가 교사를 하는동안에 우리반에는 문제아가 없도록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문제아를 배정받아도 대부분 관심과 정성으로 고쳐주었다.시골학교 5학년 담임이 권유대로 한 학년 유급시켜서 전학시킨 어머니의 결단이 고맙다.물론 나를 잘 파악하고 유급을 권유한 담임선생님이 더 고맙다. 

 

**부모님이 하던 식당의 손님 방에서 옆 건물의 외국인 상대 클럽에서 양공주들이 미군들과 춤을 추는 것을 훔쳐보는  딸아이의 교육을 염려해서 서울로 전학을 시킨 어머니의 교육열에도 늘 고맙게 생각합니다..서울로 전학을 권유했던 천현초등학교 5학년 담임 선생님과 청구초등학교 5,6 학년 담임을 했던 김혜숙선생님께 고맙습니다.  저는 학창시절의 고비마다 좋은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한 아이의 일생은 교사의 관심여부에 따라서 어떻게 변하는지 말씀드리고 싶어서 이글을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