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다반사 /일상

하늘 가는 길,따라가 보니 가족이 있었네.

모과 2011. 3. 27. 06:30

 

 

토요일(3월26일)은  시작은 아버님 삼우제(三虞祭)였다. 홍성군 가곡면 가곡저수지 위의 선산에  갔다. 작은 집 식구들과  시집식구들은  석교동에서 대형버스를 대절해서  먼저 갔고 나와 남편은 40분늦게 새로 만든 산소로 찾아갔다.

 

나는  선산에는 처음으로 갔다.  부산에 살 때는 늘 남편만 명절에 다녀왔고 , 어쩌다  시골집으로 명절에 가면  남자들만 산소에 갔기 때문이다.

 

 모태신앙인 내가  대전으로 이사를 오고  천주교로 개종하고 제사문제에 자유로워졌다. 시집식구들은  유교, 개신교, 불교, 천주교 무교 다양한 종교를 가지고 있다.  큰아주버님이 천주교 영세를 받고 개신교에 다니던 큰동서 형님도  교회에 나가지 않고 있다.  큰아주버님을 따라서 개종을 할 예정이다.

 

남편을 따라서  산소로 올라 가는데  양지바른 장소에  어느 가족묘가  나란히 세줄로 있어서 인상적이었다.아마도 근래에  산소를 모두 이장해서 한 곳에 모신 모양이다.

 

 

아버님은 가곡 저수지가 내려다 보이는 낮은 야산에  일부를 선산으로  사두셨다.

 

 

먼저 도착해서  미사를 드리는 작은 집 형제들과   아버님, 큰동서부부 의 모습니다. 아버님과 막내고모님,남편은 종교가 다르지만  예를 갖추고 함께 참석을 하고 있었다. 맨 왼쪽이 아버님과 남편,막내 고모님의 모습이다.

윗쪽이 아버님의  고조부님 산소이고 ,아래는 아버님의 작은 아버님 의 산소이다. 우리에게는 작은 할아버지인  분이 일찍 돌아 가셔서   시할아버님은 독자가 되셨다. 

 

         가족미사를 드리고 있는 작은 집 형제들, 모두 천주교인들이다.

 

 

며칠 전 입관 예배 때 옥계동 성당의 연령회장님과  교우들이  작은 아버님의 시신을 염을 해주고 미사를 인도해 주었다. 모두   작은 아버님에게 마지막 인사를 드렸다. 

 

 작은 어머니는  작은 아버님이 쓰시던 묵주를 받아 가지시고 당신이 기도를 드리던 크고 향내 나는 묵주를 작은 아버님의 손에 걸어 주었다. 60년 이상 같이 사신 부부의 깊은 정을 나는 보았다.

 

마지막으로 작은 어머님이 작은 아버님의  얼굴을 감싸쥐고  마지막 인사를 했다.

 

" 고생만 하시다 가셨슈. 먼저 가 계시유.내가 난중에 갈게유. 한 날 한 시에 가자고 했지만 웨터케  같이 가유하시며  울으셨다.

 

작은 아버님의 유언대로   세종시 화장터에서 화장을 하고  선산에  영면(永眠)하셨다.  나중에 가족들이  이곳에 모일 계획으로  터를 넓게 닦아 놓았다.

 

 

천주교식  제삿상 모습을 나는 처음으로 봤다. 당신께서 비석의 모습도 다 유언으로  말씀해 놓고 준비 된 ,그리고 품위 있는 죽음을 맞이 하셨다.

 

3남 2녀 자녀가 다 행복하게 가정을 이루고 살고, 증손자,손녀까지 보시고 당신이 자식들에게 주신 사랑의 증거로 자녀들의 사랑을 많이 받으시며 투병하다 가셨다.

 

" 아버지! 우리들은 아버지가  사랑을 많이 주셔서 잘 살테니 걱정마시고 편히 좋은 데로 가세요."

"아버지 사랑합니다! 아버지 고맙습니다!"

 

아버지의 임종을 앞두고 3남 2녀 자녀들이 돌아 가면서 조용조용 돌아 가면서 말하던 모습이 선하다. 82세인 엄마의 말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온순한 작은 집 형제들의 모습을 보며 나는 잠시 나의 미래를 상상하게 됐다. 

 

 

미사를 드리는 동안에  아버님은 당신의 고조부님의 산소에서 남편과 함께 서 계셨다.

 

89세의 아버님은 8살 아래 남동생의 묘지 터를 조카와 함께 오셔서 정하시고 임종을 작은 집 안 방밖 마루에서  지키셨다. 매일  성모병원 영안실에 오셨고 유교이시면서도 옥계동 성당의 장례미사에 참석하셨다.

 

          남편과 함께 자란 작은 집 큰서방님은 남편에게 의미있는 말을 했다.

 

" 아버지가 재산을 생전에 다 처분하시고 남기지 않으셔서 우리 형제들이 단결이 더 잘된 것 같어. 형." 

 

사실 현대 사회에서 형제들도 형식적인 관계가 많이들 있다.

 

그리 많지도 않은 재산때문에 형제들끼리 분쟁을 하게 하느니 당신이 살아계실 때 풍족히 쓰고 홀로 남은 분을 위한 충분한 준비도 해 놓으신 후 자식들을 생각하시는 어른이 지혜롭다고 생각한다.

 

특히 우리집 같이 병이 깊은 어머니에 대한 경제적인 배려와 장치는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아버님이  하실 일이지만  누구 하나 책임을 질 만한 능력이 있는 자식이 없으니 잠시 생각해 본 일이다.

 

성묘가 끝나고  산에서 내려와서 가곡저수지 옆에 있는 "파라다이스" 산장음식점에서 '메기 매운탕"을  먹었다.

 

 

 

40,000원짜리 메기탕 에는 냉이와 수재비가  들어있는게 독특했다.  네 명이 먹고 남았다. 상당히 맛이 있었으나 맛집 포스팅을 할 때가 아니라서 자제를 했다.

 

수원,안산, 안성에서 온  사춘들은 자가용으로 돌아 갔다. 나머지 사람들은  대전에서 온 대형버스에  모두 탔고  남편과 나, 우리 집 근처에 사시는 막내 고모님, 홍성고모님이 함께 떠났다.

 

 

우리는   홍성읍에 사시는 고모님을 모셔다 드리고 대전으로 돌아왔다.

 

부부교사인 막내 아들과 큰 딸은  작은 어머니와 함께 저녁미사를 드리러 간다고 했다. 작은 집의 장남만 대전에 살고 있다.

 

 나는 작은 아버님의 임종을 보고 , 장례식 과정에서 작은 집 형제들에게서  효도의 참 모습을 봤다. 오늘  삼우제에 동참하면서  작은 아버님의 하늘 가신 길을 따라 가보니 그곳엔 가족들의 사랑이 있었다.

 

 식당에서 들은  말이 인상적이다. 작은 아버님은 눈을 감으면  찾아 온 저승사자를 두 번이나 돌려 보냈다고 했다.

"  지금은 우리 아이들 추워서 안 돼요. 지금은 못 갑니다.날씨 풀리면 갈래요"

 

작은 아버님은 따뜻한 3월 21일 (음력으로 2월17일) 그렇게 가셨다. 나는 평생 생일마다  작은 아버님을 기억하게 됐다.  천주교는 음력이든지, 양력이든지 가신 날을 기일로 한다고 연령회 회장님이 설명해 주었다.

 

세상을 떠나는 마지막 순간에도 자식을 배려했던 작은 아버님의 깊은 사랑에 존경과 사랑을 보냅니다.  하느님 곂에서 편히 쉬세요.  그동안 고생하셨습니다.

 

 

** 장례식 기간 중에 제 블로그를 방문해 준 블로그 이웃님들 고맙습니다. 내일부터는 정상적으로 글을 송고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