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교육

남편이 무상급식을 적극적으로 찬성하는 이유

모과 2010. 12. 11. 06:30

매일밤 11시에 퇴근하는 남편은 그늦은 시간에  들어와서 저녁을 먹으며 나와 대화를 한 시간 정도 하고 잔다. 주로 서점경영에 대해서 , 시집일에 대해서, 사회문제에 대해서, 자녀교육에 대해서 ,나의 블로그에 대해서 ..날마다 주제가 바뀐다.

 

밥을 먹으며  막걸리 두 잔 씩을 마시고 남편은 소주도 두 세 잔을 마신다. 작은 컵에 대전 막걸리를 따라서 서로 건배를 하며 잔을 부딛치는게 대화의 시작이다.

 

1. 남편의 도시락에 대한 부끄러운 추억

 

남편은   내년 2월에 환갑이다. 호적상으로는 나와 동갑인 1952년생으로 돼 있다. 우리는 같은 해에 중,고,대학에 입학을 해서  동시대에 대한  공추억을 가지고 있다. 남편의 성향은 진보쪽에 가깝고 실제 대학 때  유신을 반대하는 데모를 해서 졸업식 다음날 군대에 갔었다. 하사관 학교에 배치 받아서 힘든 군대 생활을 했다.

 

 남편은 결혼 후 대학원을 졸업했다.어디서 다  읽고 아는지 모르는게  없고 특히 세계사와 국사에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 나는 정치,사회에 대한 관심이 지대했으나  갑자기 경제가 어려워지고 아이들 가르치고 먹고 살기 바빠서 관심이 완전 없어졌다. 남편같은 분들의 성향은 무지 성실하나   생활력은 약한 편이어서 아내들이 고생을 하기 마련이다. 나도 사람좋고 예의 바르고 목소리 좋은 남편 덕에 고생을 참 많이 한 편이다.^^

 

매일 한 시간의 대화는 내가 주로 듣고  남편이 강의를 하는 하는 형태이다. 오늘의 주제는 "무상급식"이었다. 전에도 여러 번 말했던 내용이긴 하다.

 

* 대청호에서 둘이 기념으로 찍은 사진:  제 키가 165cm입니다.옆의 아가는 모르는 아가입니다.

 

 

남편: 무상급식은 무조건 해야 해. 먹는 것 가지고  어린 학생들에게 수치심을 느끼게 하면 안되지.

 

모과:  급식은 우리 아이들 다 졸업하고 생겼어. 나는 새벽6시에 일어나서 우리 아이들 도시락 4개 씩 싸서 학교에 보냈는데 ....외국같은데서는 부자는 급식비를 많이 내고 가난한 집 학생들은 조금내는데  학생들은 모르게 한다던데..그게 참 좋은 것 같아.

 

남편:  그래. 제도가 문제라구. 부자들이 왜 우리가 가난한 아이들과  똑같이 먹어야 하느냐고 한다는게 말이 돼?

 

모과: 군대가면 다 똑같이 먹는데 .

 

남편:  부잣집 아이들은 다 군대도  안보내고 말이야. 오세훈 시장말이  말이 되냐구?  부자 3구( 송파구,강남구,서초구)에서 밀어줘서 시장이 됐잖아.  나머지는 한명숙에게 다 졌어.부자들만 위한 정책을 하면 되겠어?

 

모과; 오세훈 시장도 부잣집 아들이지.

 

남편은 청계천 공사만 안했어도 포항에 돈을 많이 보내지 않았어도 ...어쩌고 하면서 나를 두고 한참 연설을  했다. 경청하는 나의 태도를 아주 좋아 한다.

 

 

2. 남편의 도시락을 바꿔먹자던 초등학교 3학년 담임 선생님

 

남편:  나는 말이야 학교 다닐 때 도시락이 부끄러워서 가리고 먹을 수 밖에 없었어. 양은 도시락에 고추장 한 숟갈을 넣어 주었거든 . 그러면 학교에 가는 동안 에 고추장이 흘러서 범벅이 되는거야.  책에  스며들고 ...

 

모과; 어머니가 아파서 그렇게 싸주었나? 딱 고추장만 한 숟갈 넣어주었어? 

 

남편: 그럼 . 형제들이 다 그랬지. 그런데 담임선생님이 죽 지켜보다 " 네 도시락 맛있겠구나 " 하며 선생님 도시락하고 바꾸어 먹자고 하더라.

 

모과: 그래. 대전만 해도 그랬구나.   서울에서는 고2때 그때는 대부분 김치만 싸가지고 다녔지. 좀 잘 싸오는 아이들이 오뎅볶음 , 계란 후라이, 조금 더 잘 싸오면 장졸임이었어.  내가 고1때 한 친구가 깡보리밥에 단무지만 싸왔더라구,  도시락 통으로 반은 가리고 먹는데  얼굴에 부끄럼이 가득했어.그친구는 중학교를 못다니고 검정고시로 고등학교에 입학을 했어.나중에 교대에 진학해서 서울시내 초등학교 교사가 됐어.

 

남편: 사람을 먹는 것을 가지고 차별을 하면 안돼. 왜 먹는 것을 가지고 차별을 하느냐구. 무상급식보다 급한게 어린이 보호라구? 말도 안돼.  가난한 애들은 안 건드려. 부잣집 아이들이나  보호받아야 하겠지.

 

모과:  왜 ? 가난한 집 아이들도 보호는 해야지. 성폭행 당하는어린이는 대부분 서민 아이들이던데 ....그때는 미제 유리병을 사서 김치를 넣어 갔지.

 

남편: 그 유리병도 얼마나 귀했는지 도시락에 밥과 김치를 같이 넣어서 다 흐르고 책에 까지...

 

너무 심각한 대화는 좋지 않아서 내가 화제를 돌렸다. 남편은 밥을 다먹고 나를 위해서 시골집에서 가져온 은행알을 전자렌지에 1분을 돌려서 자기도 먹고 나에게도 주었다. 남편은 기관지가 약해서 감기에 잘 걸리는 나를 위해서 시골집에다 은행알로 술도 담가 두었다.

 

** 시골집에서  연산홍을 정리하고 있는 미국에서 왔다 간  시동생과 시고모부님의 모습.

 

교사의 처우가 좋아 진 것은 80년대 부터라고 할 수 가 있다. 본래 교사는 박봉이었다. 시할아버지가 고향집에서 농사를 지어서 쌀과 잡곡은 보내주었다. 손자들의  학비도 많이 내주었다.

 

 전근이 잦은  아버님을 따라서 큰아주버님과 둘째 아주버님은 도시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녔고 남편은 누나와 시동생과 함께 시골집에서 5학년부터 수덕초등학교를 다녔다. 수덕초등학교에 다닐 때 초등학교 교사였던  시작은아버님이  수덕초등학교에 발령이나서 시골집에 들어와 사셨다. 작은 아버님은  남편의 담임도 한 적이 있다. 남편은  수덕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예산중학교에 수석 합격했다.

 

모과: 당신 시골집에 살던 때 작은 어머니가 사촌들만 조용히 불러서 삶은 계란 준 것이 큰 상처였다면서...

 

남편: 섭섭했지. 그래도 나는 어려도 속으로 생각을 했어. 쟤들은 엄마가  있으니까...하고 속으로 참았지.그렇지만 먹는 것 가지고 사람을 차별하면  상처가 크게 남는거야.

 

초등학교 때 얼마나 섭섭했으면  마음이 넓은 남편이 여러번 내게 계란 이야기를 해주었다. 남편의 생모는 8살 때 병환으로 돌아 가셨다. 4남 1녀를 두고 30대 초반에 돌아 가셨다. 3년 후에 온 새엄마는 두동생을 낳은 후 근 40년동안 계속  병환 중이시다.

 

새어머니도 힘들었고 남편의 형제들도 힘들었던 세월이었다.  아버님은 새벽 5시 반에 나가셔서 밤 10시 30분에 귀가하셨다 .남의 자식을을 가르치는데 몰두하신 평생의 교직생활이시다.

 

 

식사를  다한  남편이  베란다에 나가서 담배를 피웠다. 막내와 남편이 담배를 피는데  나에 대한 배려로  꼭 베란다에 가서 담배를 핀다. 나는 깡통을 깨끗하게 씻어서  늘 물을 조금 넣어두고 있다.

 

모과: 당신 담배 좀 줄여라. 우리가 이제  20년 정도 남았는데 그전에 죽을 수도 있겠다. 아이들이 아직 장가도 안갔는데 건강해서  손자들 고등학교에 다니는 것도 보고 그 아이들이  힘들면 우리가 손자손녀를 돌봐주어야지.

 

남편: 나 요즘 담배 줄이고 있어.  술도 과음은 절대로 안하잖아.

 

모과: 당신은 나보다 오래 살아야 해.  내 속을  많이 썩였으니까  나를 먼저 보내야 한다구.

 

 

**우리 부부는 매일 이런 대화를 하고 삽니다. 아들들 하고도 그럽니다. 남편이 내게 제일 고마운 것은  아들들과 대화를 하며 키운 것이랍니다. 우리 식구는 모이면 무척 수다를 떠는 집입니다. 남편은  뉴스 채널을 보다 잠이 들었고 나는 블로그에 글을 쓰고 있습니다. 오전 3시24분.

 

 ** 교육코너 베스트로  선정해 주어서  고맙습니다.  더 고민하며 좋은 글을 쓰도록 노력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