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아들을 3일이나 진통을 하고 난산 끝에 겨우 낳고 보니 조산원에서 출산을 한 것을 알았다.
서울에서 안양까지 출퇴근을 하다 보니 병원에 갈 시간이 토요일 밖에 없었다.
집에서 가까운 개인 산부인과에 한 달에 한번 씩 가면 갈 때마다 간호사가 달랐다.
병원에 환자도 거의 없어서 의사에 대한 신뢰가 생기지 않았다.. 그 산부인과에서 아기를 낳고 싶지가 않았다.
가까이 살고 있던 시누이 형님에게 말했더니 당신이 가는 산부인과 여의사가 참 좋다고 소개를 해주었다.진통이 시작되고 시누이 형님과 남편을 따라서 병원에 갔다.
난산으로 사산을 할 뻔한 위험을 겪고 낳고 보니 조산원이었다.
3년후 막내를 날때 제왕 절개수술을 했는데 내몸의 구조는 제왕절개 로 출산을 해야 하는데 무식하게 아이를 낳다가 죽을 뻔한 것이다.
친정 어머니가 일찍돌아 가시고 시어머니는 늘 몸이 편찮으셔서 산후 조리를 해줄 사람이 없었다.
시누이 형님도 가게를 운영하고 있었다. 조산원에서 10일 있다가 집으로 왔다.
퇴원을 하고 집으로 돌아 와서 나는 깜짝놀랐다. 그리고 남편의 행동에 큰 감명을 받았다.
이층 독채를 전세들어 살고 있었는데 남편은 집안이 윤이 나게 깨끗히 청소를 해 두었다.
" 아가가 처음으로 집에 오는데 아빠가 환영하는 뜻에서 집안을 깨끗하게 청소해놨지"하며 미소를 지었다. 그날부터 남편은 내가 산후 조리를 하라고 집안 일을 다 해주었다.
남편은 기저귀를 너무 힘으로만 빨아서 손바닥이 다 얇아졌다.
밤에도 아가가 울면 얼른 일어나서 우유를 타서 먹였다.
한번도 짜증을 내지 않았다. 남편이 아이들에게 가장 신경을 쓴 것은 두상이었다.머리가 찌그러지지 않도록 여러번 머리의 방향을 바꾸어 주었다.
* 큰 아들을 낳고 한 달 후 ,얼굴의 부기가 다 빠지지 않아서 통통한 모습.
우리 아이들의 두상은 참 예쁘다 남편이 신경을 많이 써준 덕분이다. 자기가 학교에 다닐 때 한쪽으로 납작해진 두상 때문에 열등감이 있었다며 열심히 아이들의 머리를 살펴보고 방향을 바꾸어서 눕혀 놓았기 때문이다. 나는 생각도 못한 일이었다.
* 8개월된 큰 아들이 엄마를 못알아 보고 안오겠다고 울다가 과자를 주고 겨우 달래서 업고 찍은 사진 , 입덧이 심해서 콜라를 많이 먹었더니 아가의 피부가 새카맣다. 임신중에 너무 육체적으로 고생을 많이해서 남편은 아이를 그만 낳겠다고 했었다.
큰 아들은 내가 출근을 하면서 동네의 할머니에게 맡겼다. 먼저 퇴근하는 남편이 데리고 왔다.
멀리 출,퇴근하는 아내를 위해서 밤이면 대학원 공부나 번역일을 하면서 시간을 맞추어서 아기에게 우유를 먹였다. 먼저 퇴근하면 반찬은 할 줄 모르니까 전기솥에 밥만 해놓고 나를 기다렸다.
1979년도에는 아기를 맡기는 시설이 전무했다. 약간 귀가 어두운 동네 할머니에게 아기를 맡기는 일이 걱정스러워서 대전의 큰 형님댁으로 아기를 보냈다. 6개월 된 아기라도 버림받았다는 상실감을 느꼈는지 3일을 울어서 큰 엄마 아빠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서울서 대전으로 아기를 보러 다니는 일도 힘들고 남의 아이들 가르치며 내 자식은 못기르고 있는 상처가 너무 컸다. 큰 아들의 돌을 간소하게 치루고 ,사진도 카메라로 몇 장 찍어 주고 아기를 이사한 안양의 집으로 데리고 왔다. 큰아들은 집으로 돌아 온 그날 밤부터 울지 않고 잘잤다. 그때 나는 부모의 정은 천륜이라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아파트가 대단지라서 아기를 봐주는 아주머니를 쉽게 구했다. 내가 출근할 때 아기를 데리고 갔다가 퇴근하면 데려다 주었다. 남편은 늘 내가 푹 자도록 자기가 아기의 우유를 타서 먹이고 기저귀도 갈아 주었다. 자다가 아기가 울면 벌떡 일어 나면서 단 한번도 짜증을 내지 않았다.그 때 남편의 나이가 29살이었다.그런 남편의 온유하고 조용한 성격을 아들들은 닮았다. 참 좋은 인성을 유산으로 받은 것이다.
*둘째 아들이 돌이 지났을 때 사진이다
둘째를 갖고 우리는 부산으로 이사를 했고 나는 직장을 그만두고 전업 주부가 됐다.
. 임신 중에 아주 편하게 먹고,자고 해서 아가의 피부가 하얗고 성격도 여유가 많고 넓다. 내가 처음부터 키워서 늘 방글방글 웃고 밝았다. 위의 큰 아들 표정과 아주 대조적이다.
막내는 배가 고프거나 기저귀를 적셨을 때만 좀 울었고 늘 혼자 잘 놀다 조용하면 자고 있는 아가였다.
남편은 자고 있는 아가를 두상을 예쁘게 해야 한다며 얼굴을 돌려 놓아 주기를 자주했다.
어느날 부터 막내는 짱구라서 불편한지 스스로 엎드려서 잠을 잤다.
남편의 아들 교육은 밥먹을 때 소리나지 않고 먹기, 자세를 바르게 걷기, 고운 말쓰기에 엄격했다.
큰아들이 초등학교 4학년때 차롓 자세를 하면 어깨 한 쪽이 약간 올라갔다.
남편은 큰 아들이 울 때까지 차롓, 바로를 연습시켰다.
32세의 큰아들은 아주 반듯한 자세를 가진 키 큰 청년이 됐다. 아빠보다 15 cm나 키가 큰 아들을 남편은 늘 흐뭇하게 생각한다.
"자식은 90% 엄마 머리, 키를 닮는거야. 머리 나쁜 여자는 며느리로 안 된다." 자주 아들들에게 말하고 있다. 내가 기분 좋으라고 하는 소리 같았다. 이세 키 때문에 키 큰 여자와 결혼을 했다는 남편은 아주 그냥 ~ 키에 포부가 진 사람이다.
* 초등학교 1학년의 큰 아들과 5살인 막내 아들의 모습,남편을 닮아서 눈들이 모두 작고 미소가 많이 있는 아이들이다.
남편과 나는 3년간 회사 숙소에 살다 이사를 가는 아들의 이사를 돕기 위해서 서울에 갔다. 회사 숙소에서 5분 거리에 있는 곳에 원룸을 얻었다. 3년이나 살던 곳이라 익숙하고 교통이 편리해서 그곳으로 정했다고 했다. 나는 여동생과 같이 대전에서 가지고 간 이불과 동생집에서 얻어 온 그릇들을 정리를 했다. 남편은 아들과 회사 숙소에 가서 아들짐을 가지고 왔다.
이제 아들은 결혼할 때까지 이곳에서 혼자 생활을 할 것이다. 32년만에 처음으로 혼자 살아 보는 것이다.
혼자 살아 가면서 차분하게 생각도 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 이사 후에 서울의 5대 냉면집이라고 하는 " 필동면옥'에서 냉면을 먹었다. 우리 식구들은 모두 냉면을 좋아 한다. 필동면옥은 1985년에 생겼다는데 냉면 맛이 기가 막히게 좋았다.
한 그릇에 8,000원을 하는데 양이 무척 많았다.
큰아들이 이사 간다고 큰아버지 ,여동생, 남편, 나 모두 모여서 냉면을 먹으며 각자 딴 생각에 빠졌다. 나는 아들 덕분에 서울에 가서 유명한 냉면도 먹는 내가 참 좋았다.
남편과 나는 아들과 서울역에 있는 대형마트에 가서 필요한 살림살이를 샀다.
아들은 대부분 저렴한 것으로 골랐다. 몇 년 안 쓸거라면서 ..아마도 결혼을 염두에 둔 말을 하는 것일게다.
아들과 잘 어울리고 서로 행복을 줄 수 있는 아가씨와 만나서 잘 살았으면 좋겠다.
* 큰아들과 남편이 쇼핑한 물건을 차에 싣고 있는 모습
큰 아들은 3월2일 "필리핀의 세부"로 회사에서 주는 포상 휴가를 간다.
15.000명 직원 중에서 O등 안에 들었다.
작년에는 "발리"로 갔다 왔다. 작년에 이어서 올 해도 좋은 실적을 내고 있다.
회사에서 실적이 좋은 직원에게 보내주는 4박5일의 여행이다. 하룻밤 숙박료가 40만원인 특급 호텔에서 잔다고 좋아했다. 그리고 큰 아들은 참 좋은 회사라고 고마워했다.
원룸으로 돌아 오는 차에서 아들이 친구에 대해서 말했다.
" OO 는 하와이로 신혼여행을 갔다 왔는데 그곳이 참 좋데. 나도 결혼을 하면 하와이로 신혼 여행을 가야지."
'그래. 여자, 남자 모두 안 가본 데를 가는게 좋을 것 같지? 소중한 추억이 될테니 둘 다 안가본 데가 좋지 "
'그런데 엄마! OO이는 하와이로 신혼여행을 다녀 온 후에 바로 자기 엄마하고 장모님을 똑 같은 곳으로 같이 여행을 보내 드렸어. 참 좋은 생각을 한 친구야. 내가 여태껏 만난 애들 중에서 제일 좋은 아이야. 심성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어. 나도 OO이 같이 해드리고 싶어"
OO는 졸업 전에 입사했던 S 그룹 연수원에서 만난 친구이다. 모두 다른 계열사에서 한명씩 21명이 한 조였다. 그친구는 가끔 아들이 근무하는 은행에 과자를 한 보따리 사다가 주고 가고 한다는 것이다.
" 그냥 올 해 휴가는 제주도로 가족여행을 가면 좋겠다. 가족 여행을 가본지가 너무오래 됐고 막내와 엄마는 제주도에 못 가봤으니까"
"응 . 엄마! 내 카드는 쓰면 항공 포인트가 쌓이거든 이미 제주도 비행기표 한장은 나올 포인트야. 이번 휴가를 똑같이 잡아서 우리 가족끼리 가자"
막내는 근무를 해서 대전에 있고 우리 셋이서 간단하게 저녁을 먹고 모두 대전으로 내려왔다.
연휴니까 집에가서 푹자고 온다고 큰아들이 함께 남편 차를 타고 왔다.
밤 12시에 집에 도착해서 치킨과 소주, 맥주, 막걸리를 마시며 세 부자가 두런 두런 대화를 했다.
직장에 대해서, 상사에 대해서, 여자에 대해서, 집안에 대해서 ..대화의 소재를 다양하게 바꿔 가면서 대화를 한다.
남편은 자기의 시행착오를 허심탄회하게 말해준다. 그리고 아들들에게 그때 이렇게 했으면 좋았을 것을 하며 솔직하게 말해주고 있다. 그 때는 아빠뿐만 아니라 인생의 선배로서 진정성을 가지고 솔직하게 소통이 되는 것이다.
시부모님께 효를 직접 실천해서 산 교육을 시키는 것이 제일 좋은 점이다.
오늘도 남편은 아버님을 모시고 예산 시골집으로 내려갔다. 안산의 시누이형님 내외 분도 함께 계신다. 시골집에 연산홍을 가지치기를 해주러 갔다.
나는 그런 속 깊고 조용하고 따뜻한 남편이 곁에 있어서 행복하다.아들들에게 꼭 필요한 아빠여서 더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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