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다반사 /덕산 시골집

부부의 의미를 크게 느낀 박씨가족 송년모임

모과 2014. 1. 4. 06:30

 

예산군 덕산면 외라2리에 있는  시골집은  약130년이 된 집이다.  아버님은 시골 집에서 태어난 할아버지의 호를 따서 농은생가 (農隱生家)라고 정하셨다. 할아버지의 자손이 160명 정도 된다. 아버님은 내년 할아버지 생신인  단오날에 대문 앞에 돌로 된 비석을 세우고 싶다고 하셨다.

 

앞면은 농은생가라고 쓰고 뒷면은  할아버지의 자손의 이름을 모두 써서 집앞에 세울 계획이다. 아버님의 문패도 대문에 부착을 할 예정이다. 88세였던 미수연에 만들어 놓고  아직 부착을 안하고 있었다.

 

일년에 한번 시골집에 후손들이 모여서 함께 식사를 하고 침목을  도모하기로 했다. 아버님은 2004년부터 지금까지 집을 고치고 있다. 집을 보수하거나 고치는 비용은 모두 아버님이 감당했다. 그리고 시골집은 할아버지의 자손 모두의 공동소유라고 선포하셨다.

 

 

2013년을  보내며 28명의 가족들이 모였다. 제일 먼저 도착한 부부는 구미에 살고 있는 고종 사촌 서방님 부부였다. 동서는  고모님이 돌아가시고 당뇨병으로 고생하시던 고모부님을 구미로 모시고 가서  정성껏 병수발을 들었다. 올해 가을 82세의 고모부가 별세했다. 남편이 외국에 파견근무를 갔을 때도 한쪽 다리를 절단한 시아버지를  집에서 모셨다. 

 

구미동서가 식당을 하는 여동생에게 부탁을 해서 민물고기 어탕을 끓여서 가지고 왔다. 맛은 마치 추어탕과 같았다.

 

 

두번째로 오신 부부는 옆마을 복당리에 사는 큰고모님(93세)의 장남 부부였다. 큰고모님은  시집을 간 집에서 평생을 사신 분이다. 이제는 눈도 보이지 않고 치매도 와서 대소변을 다 받아내고 있다. 동서형님이 묵묵히 그일을 평생하고 있다.

 

 나는 위의 두동서들을 보고 누구도 감히 효에 대해서 말을 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우리 집안에 좋은 본을 보여주는  동서들이 두 명이나 있는게 자랑스러웠다.

 

 

여성들은 서로 일을 하려고 했고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송년회의 밤은 무르익어갔다.

 

 

마당에 차려진 숯불화덕 위에 덕산 오거리 정육점에서 사온 돼지고기가 익었다.  덕산막걸리로 건배를 외쳤다. 

 

해. 당.화.!!

해마다, 당당하게, 화려하게 ~

 

 

 큰아주버님이  특별히 주문 제작한  동그란 화로에서 장작불이 타오르고 있다.

 

 

 

구미동서 친정어머니가 재배한  유기농 배추와  생굴, 김치와 돼지고기 그리고 어탕에 밥을 말아먹었다.

 

 

홍성에 사시는 고모님(77세)은 노래로 흥을 올리며 연속으로 몇 곡 열창을 하셨다. 홍성군 노인합창 단원이기도 하다. 대표곡은 '내 나이가 어때서'이다.

 

*복당리  시고모님의 맏며느리 유순희 형님

 

 식사를 마친 후 돌아가면서 그 집안에 있었던 기쁜일과 특별한 일을  소개하고 부부가 노래를 했다.

 큰고모님의 장남인 아주버님(73세)이  동서형님에게 유머러스하나 진심어린  감사의 말을 했다.

 

" 못생긴 유순희가  잘 생긴 김태호에게 시집을 와서 고생을 정말 많이 했습니다.  우리 어머니에게  변함없이 잘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진심으로 고맙다는 말을 합니다"

 

69세의 동서형님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눈물이 글썽이며  고마워했고 놀라기도 한 모양이었다. 50년가까이 함께 산 부부가  서로를 고마워하고  믿는 모습이 감동적이었다.

 

 

그다음으로 감동적인  부부는 구미 시동생(54세)부부였다. 구미 공단에서 근무하면서 연애 결혼을 한 부부이다.

 

" 어머니가 돌아가신지 17년이 됐습니다. 제가 외국근무 5년을 하는 동안에도  집사람이 아버지를 모시느라고 고생 많이 했습니다. 사랑합니다."

 

나는 당뇨병이 심해서 다리를 자꾸 잘라내고 오줌주머니까지 차고 있는   홀시아버지를 번쩍 들어서 휠체어에 태우거나 차에 태우던 동서의 모습이 떠올랐다. 동서의 친정식구들이 우리가 함께 도우면 된다고 돌아가실 때까지 요양원에 모시지 않았다.  참 대단한 동서이고 대단한 사돈식구들이다.

 

다른 부부들은  크게 감동할 정도의 경우는 없다. 대부분 돈 걱정은 안하고 살았고 다른 집들 같이 기본도리를 하며 살고 있기 때문이다. 부모나 형제들을 위해서 희생적인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부모형제가 힘이 들 때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도움을 준 사람들은 생각보다 많지가 않은게 세상 이치이다.

 

 

시할아버지의 슬하에는 3남 6녀가 있었다. 셋째 고모님과 막내 삼촌이 일찍 돌아가셨다.  현재 생존해 있는 분은 네 분이다. 위의 사진 왼쪽부터  올해 92세인 시아버님,  막내 고모님(73세),  홍성고모님(78세),  복당리 큰고모님(94세) 의 모습이 정겹다.

 

* 시아버님과  홍성고모부님(82세)

 

우리집은  할아버지는  농사만 지으시던 분이다.  할아버지의 교육열이 높아서 아버님은 서울에서 고등학교와 대학을 나오신 인테리이다.  평생을 교육을 위해서 헌신적으로 일하셔서 지역사회에서 존경받는 어른이다. 

 

아버님은 자식들에게 총명한 두뇌와  올바르고  좋은  삶의 모습으로 울타리가 돼 주신 훌륭한 분이다.  모든 자식들이 아버님에게 도움을 받았으나 아버님은 자식들의 도움을 전혀 받지 않고 평생을 사셨다.  

 

남편은  나에 대해서 간단하게 말했다.

 

"저는 집사람을 핸드폰에 마누라라고 저장했습니다.  마누라는 좋을 때나 힘이 들 때나 함께 한 사람입니다. 우리 막내가 가을에 결혼을 했는데 집사람이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집사람이 37세에 오른 쪽 폐를 수술해서 한 쪽 폐가 없습니다.  일년의 대부분을 감기에 걸려있습니다. 오늘도 오기 힘들었는데  중요한 모임이라서 함께 왔습니다."

 

남편은 다같이 '사랑해'를 부르자고 했다.  마당에서의 모임은  '사랑해'를 합창하면서 끝났다.

 

 

밤이 깊어지자 날씨가 추워져서 모두 방으로 들어가서  집안 일을 의논했다. 내년에 '농은생가' 비석을 세우는 일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이었다.   이번 모임에 한 가족당 회비는 5만원이었다.  해마다 한 번씩 시골집에 모여서 친목을 도모하기로 약속을 했다.

 

다음 모임의 주최자는 복당리에 사시는 아주버님댁 순서이다. 가족은 자주 만나야 정도 생기고 서로의 안부도 알게 되는 것을 이번 송년회에서 크게 느꼈다. 아름다운  송년의 밤이었다.

 

 

* 이글은 충청남도 인터넷신문  소통 부문에 선정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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