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교육

공부에 한번도 최선을 다하지 못했던 나를 반성한다.

모과 2011. 7. 11. 06:00

 

나는  학창시절에 한번도 최선을 다해서 공부를 한 적이 없었다. 초,중,고 대학을 다니는 동안에는 마치 물고기 떼들 같이 몰려서 우루루  함께 입학을 하고 졸업을 했다.

 

학교에 갈 나이가 되서  입학을 했고 습관처럼 가방을 들고 학교에 갔다왔다.   부모님은 장사를 하느라고  자식들을  챙기지 못했다.  학교에 입학을 하고 나에게   왜 숙제를 꼭 해가야 하는지 말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나는 무척 산만했고  숙제를  잘해가지는  않았지만 학교는 결석하지 않는 학생이었다. 그러나  부모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밝고 명랑한 성격을 가졌다.

 

경기도 파주에서 초등학교 5학년까지 보낸 나는 들로 산으로 시냇가로 뛰놀던 나의 유년시절을 사랑한다.  서울로 전학을 오기 전까지 나는 마냥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나는 자연의 일부가 되서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 공부대신 선택했던 책 과 영화

 

학창시절에   누구도 내게 뭘 하고 싶은 목적을 가지도록  동기유발을 위한 대화를 해 준 사람이 없었다.  중학생이되니 공부보다는 책과 영화가 좋았다.  고입 준비 대신 영화와 소설에 몰입을 했더니 고입시험에 실패했다.

 

전혀 원하지 않았던 여고에 진학을 하고 정신적인 공황에 잠시 빠졌었다.  일종의 현실도피로  문학 속으로 빠져들었다.  단편문학전집을 다 읽고, 문학사별로 ,작가별로 소설을 읽었다. 그리고 세계문학을 읽었다. 그때부터 나의  문자 중독은 시작이었던 것 같다.

 

 

2. 최선을 다한 것은 독서뿐이다.

 

공부보다 책이 나를 더 행복하게 해주었다.  그냥  책 속의 이야기가 좋아서 무수한 소설을 읽었다. 글쓰기는 감히 나같은 사람이 할 수 없는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대학은 수학을 잘하고 좋아해서 이과쪽으로 진학을 했다. 전공보다는 대학을 보고 진학을 했던 시절이었다.  전공과목이 적성이 맞지도 않는데  학교는 2학기가 되면  유신 반대 데모를  막으려는 휴업령으로 수업을 하지 않았다. 전공과목이 더 어려워졌다.

 

 파주의 집을 정리하고 서울로 이사를 온 가정 형편이 갑자기 어려워져서  나는 대학 4년 내내 가정교사를 했다. 공부를 열심히 못한 이유도 된다. 대학시절에는 형이상학적인 철학책을 많이 읽었다.   안병욱,김형석교수전집을 읽고 인생에 대해서 깊이 고민했었다.

 

 

 3. 교사로서  가르치는 일에 최선을 다하지 못했다.

 

교직생활 약 8년 동안 나는  좀 더 최선을 다 하지 못한 것을 이제 반성한다.  유모에게 맡긴 아들을  받아야 하므로 나는  퇴근 후 가정방문을 하지 못했다.  문제아들에게 좀더 다정하게 찾아가서 다독거려주지 못했다.

 

교사시절, 한 때는 최선을 다한 적도 없지 않지만 나는 임신과 육아문제로 고민했다. 남의 집 아이들 가르치느라고 내 자식을 못키우는 점이 무척 괴로웠다.  둘째를 임신하자마자  사표를 낸 이유이기도  했다.

 

 

 

4. 자식교육에  최선을 다했다.

 

먼 타향에 가서  28년을 살면서  파란만장한 세월을 보냈다. 일생에 겪을 고난을 그곳에서 다 겪은 것 같다. 불행은 쌍으로 오고  악연도 필연이라는 것을 경험했다.  그 고통의 중심에서  나는  늘 두 아들의 교육이 화두였다.  

 

랑 끝에 놓이게 됐을 때,나는 오직 두아들 생각 뿐이었다. 나도 어머니를 닮아서 모성애가 남보다 강한 것을 느꼈다.  나는  못해 본  인생에 대한  최선과 성실을 아들들에게는 가르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아들들은  부족한 에미지만  자식에 대한 책임과 의리를 지키려 하는 모습을 보고 순종해주었다. 

 

나는  두아들은  부모보다 나아야 한다는 뚜렷한 목표를 세우고  정성껏 키웠다.  이제  두 아들들은 사회에서 자기 몫을 잘하고 인정받고 있다.

 

 

 5.  끓임없는 남편의 성실과 최선이 감동을 주었다.

 

40대 때 우리 부부는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냈다.  남편도 나도 자기주장이 강한 사람이다.  남편은 인생의 가던 길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어서 가족들을 정신적인 공황상태로 만들었다.

그후 하는 사업마다 실패를 거듭했다.  나는 평생을 돈 문제로 남편에게 바가지를 귺은 적은 없다. 그러나 실패 할 것이 뻔히 보이는 사업을 한다면 반대를 했다. 그러나 남편은 내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우리는 전쟁같은 사랑을 (나는 그시기에도 우리가 사랑했다고 믿는다) 하며 40대를 보냈다. 그 시기를 함께 견뎠기에 남편과 나는 절친이 됐다고 생각한다.

 

사업실패의 후유증으로 집에 , 가구에 압류 딱지가 붙고  몸만 나온 적이 두 번이었다.  내가 책대여점을 12년간 하던 시기와 같다.  아침 11시에 상점에 가서 밤 12시 30분까지 혼자 있었다.  나는 살면서 그때 가장 많이 들은 말이 있다. 

"아줌마 ! 참 독하다. 대단하다"

 

그냥 환경이 그래서 그렇게 살았을 뿐이다.  남편은  그후  중소기업인  서점 체인 본부 회사에 입사했다. 변함없이 성실하게  계속  일했다. 3년 전 고향인 대전에  시집 형제와  함께 프렌차이즈로 서점을 냈다. 남편은 나와 아들들에게 헌신적으로 잘했다.  지금도 성실하고 조용하고 부모님에게 효자이다. 

 

 남편의 고향으로 이사를 오고 나의 심각했던 우울증을   극복했다.  블로그에 글쓰기에 몰입했던 것은  일종의 현실도피였다하루에 15시간 이상 몰입을 하며 저절로 최선을 다했다.  남의 글도 정독을 했다.  블로그에서  글쓰기 연습을  많이 했으니  독학인 셈이다.

 

 

6. 평생하고 싶었던 글쓰기에 최선을 다하고 싶다.

 

몇 년 전부터  가족들은 내가 방송아카데미에  합격을 하면  등록금을 내주겠다고 했다. 

 

내가 평생 간절히  하고 싶었던 것은 글쓰기 뿐인 것같다.  지난 4월 나는  방송아카데미 드라마 작가반에 입학을 했다. 가서 바로 느낀 것이 나의 나이, 느림, 기초가 안돼 있는 것등이다. 

드라마나 영화의 필사를 하는데 문예창작과를 나온 25세 학생이  10시간 이상이 걸렸다. 나는 그들보다 3~5배 느리다.  이 노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평소에도  나이는 숫자에 불과 하다는 말을 나는 하지 않는다. 나이에서 오는 현상을 내 스스로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영화와 책, 드라마를 꾸준히 30년 이상 본 것은  드라마를 쓰는데 큰 도움이 되겠지만 컴퓨터  자판을 치는 속도 ,  교재를 이해하는 속도는 몇 배 더  느리다.

 

이제 젊은 학생들보다  더 노력을 하는 수 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그들이 2년이 걸린다면 나는 5년 이상을 생각하고 노력을 할 것이다.

 

 

 

나는 요즈음 건강때문에  방송아카데미를 못가고 있다.  왼쪽 다리의 신경통 치료와 치과 치료로 하루에 3시간을 병원에서 보내고 있다. 1월에 검사했던 갑상선 암조직 검사를 다시 해야한다.  몸이 피곤해서 그런지 목이 다시 부어올랐다.  매주 서울로  올라가서 공부만 한게 아니고 동창도 만나고 , 인터뷰도 하러 다니고 무리를 해서 생긴 일이다. 

 

우선 건강부터 다스리고 새로 제대로 시작할  생각이다. 

 내가 평생하고 싶었던 일에  최선을 다해보고 싶다. 반드시 좋은 결과가 있도록  여러 방법으로 노력 할 것이다. 나만을 위한 귀한 시간이 주어진 소중한 기회이기 때문이다.

 

 

**저의 시아버님은 89세십니다.  아침에 제 글을 읽으시는 것을 즐겁게 생각합니다.  저는 우리 아버님을 위해서 베스트나 메인에 뜬 기사는 캡쳐를 하고 있습니다.  일부 블로거들이  제가 편집자들에게 아부를 하는 것으로 오해를  하셨답니다.  저는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좀 많이 놀랐습니다.

처음에는 캡쳐를 할 줄 몰라서 '베스트로 선택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는 글로 아버님에게 알렸습니다 그후 막내 아들에게 캡쳐를 배우고 연습을 하느라고 계속 하다보니 습관이 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