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 사는 큰아들의 책꽂이에서 박범신의'은교'와 몇가지 베스트셀러와 인문학 책을 봤다. 꾸준히 책을 읽고 있는 아들이 대견했다 . 나는 대전에 가서 영화로 '은교'를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나의 대학시절에는 이문열, 조정래, 박범신과 최인호, 황석영, 한수산, 이외수, 박완서 ,김홍신의 소설이 주류였다. 문자 중독이었던 나는 그들의 대부분의 작품을 찾아 읽었다. 박범신의 소설은 상당히 섬세하고 감성적이어서 여성의 마음을 설레게 했었다. 그의 많은 작품들이 영화화되기도 했다.
내가 '은교'를 영화로 보고 싶은 이유는 주인공이 박해일이였기 때문이다. 그가 출연한 영화'국화꽃 향기'를 보고 나는 박해일의 작품은 거의 다 영화관에서 봤다. 큰 아들보다 두 살이 더 많은 그가 배우로서 이룬 업적은 대단하다. '괴물'과 '이끼'에서 특히 그의 연기는 좋았다.
그러나 영화를 보면서 나의 마음은 갈등이 생겼다. '은교'를 소설로 읽었으면 더 좋았겠다는 생각이 자꾸 나서였다. 어둡고 심각한 대사들이 박범신 소설의 섬세한 묘사를 상상하게 했다.
1. 시인이 바라보는 세상의 다양성을 말해주다.
공지영이 시를 전공했으나 소설가 된 이유를 어느 에세이에서 읽은 적이 있다. 시인은 태어나는 것이고 소설가는 노력하면 될 수 있다고 했다.
국민시인으로 불리는 이적요 시인(70세/박해일)은 산 속의 외딴 집에서 혼자 살고 있다. 공대 무기공학과 출신의 작가 지망생 서지우 (김무열)가 문하생이다. 집에는 가끔 서지우만 오고 갔다.
이적요 시인이 뾰족한 연필은 슬프게 보인다고 은교에게 말하는 장면이 있다. 바로 시인의 시각으로 바라본 것이다. 외롭고 적막한 노년을 보내는 그에게 은교는 잊고 있던 젊은 날을 기억하게 한다. 17살의 은교를 보고 17살이었던 누이를 생각한다 . 은교를 보면서 그는 잊고 살았던 젊은 날의 이적요를 기억한다. 실제로 상상 속의 이적요는 젊은 모습의 박해일이 나온다.
2. 여고생 은교에겐 외로움이 친구처럼 같이 다닌다.
때밀이를 하는 은교의 엄마는 은교를 자주 때린다. 엄마에게 맞고 시인의 집에 들어와서 잠이 든 은교와 이적요 시인은 서로 마음을 교감하는 사이가 된다.
엄마에게 맞으면서도 은교는 엄마의 발뒷꿈치의 각질에서 어머니의 고달픈 삶을 이해하고 사랑을 갈구한다. 은교에게 필요한 것은 애정과 배려이다. 늘 외로운 그녀에게 누군가의 따뜻한 사랑이 필요했다.
나는 은교역의 김고은(22세)이 실제 17살로 보였다. 그녀는 밝고 화사하고 천진했다. 무엇보다 연기를 잘 했다. 역시 한국예술종합대학교 연기원 출신이었다. 실기로만 학생들을 뽑는 국립대학교의 목표대로 우수한 연기자가 속속 배출되고있다.
김고은은 여고생 은교의 다큐를 찍은 것 같이 잘 어울렸다. 그녀의 연기는 자연스럽고 감탄 할 만 했다. 이슈가 됐던 노출신은 그녀의 가녀린 몸매로 인해서 크게 야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김고은의 노출에 대한 용기는 대단했다. 연기에 목숨 건 사람같이 보였다. 전도연보다 더 대담한 여배우가 탄생한 것 같다. 그녀의 외모가 주는 느낌과는 전혀 다른 반전이었다.
노시인이 살고 있는 숲 속의 집에 매주 토요일마다 아르바이트를 하러 다니는 은교는 할아버지에게 따뜻한 정을 느낀다. 은교는 친할아버지를 따르듯이 노시인을 대한다.
3. 공대출신 서지우(김무열)에겐 문학에 대한 갈망은 많으나 재능이 없다.
이적요 시인이 쓴 통속소설 '심장'을 자기 이름으로 출간한 문하생 서지우에겐 열등감이 크다. 소설 '심장'이 대박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감당하지 못할 사태가 온다.
서지우도 은교를 사모하게 되고 노시인과 문하생 간의 묘한 갈등이 생기기 시작한다. 이적요시인은 은교와 노시인의 로멘스를 주제로 한 단편소설 '은교 '를 써서 작품 보관 상자에 둔다. 서지우는 그 작품' 은교'를 훔쳐서 공모전에 자기 이름으로 제출한다.
단편소설 '은교'는 제35회 이상문학상에 당선작이 된다. 실제로 제 35회 이상문학 대상은 공지영의 '맨발로 글목을 돌다' 였다.
은교는 참 예쁘고 밝은 여고생이다. 엄마에게 맞으면서 살면서도 엄마가 처음으로 선물한 거울을 소중하게 여긴다. 거울을 엄마의 사랑이라고 믿고 싶기 때문이다.
서지우의 실수로 엄마가 선물로 준 거울이 벼랑 끝 바위에 겨우 걸쳐졌을 때 공대생 서지우는 같은 공장에서 만든 거울은 다 같다며 똑같은 것을 사준다고 한다. 은교는 똑 같은 모양이라도 똑 같은 게 아니라고 울어버린다.
노시인은 말 없이 벼랑 끝 바위에 걸쳐져 있는 거울을 집으러 간다. 나는 이 장면에서 공대생과 노시인의 시적인 감성의 차이를 느꼈다. 박범신 소설다운 묘사라고 생각한다.
4. 세 사람에게 부족한 것은 현실적으로 채울 길이 없고 서로 갈등만 심화 된다.
늙은 이적요 시인은 과거의 청춘을 그리워한다. 그는 자기 작품을 훔쳐간 제자를 용서 못해서 결국 죽음으로 몰아 버린다. 노시인의 감성은 섬세하고 시적이나 감정은 성숙하지 못한 것 같았다.
은교에 대한 감정이 늙은이의 추한 욕정이 아닌 것이 영화에 묘사가 잘 돼 있다. 그런데 제자 서지우는 노시인과 은교의 관계를 상식 밖의 남녀 관계로 보기 때문에 분노가 폭팔했다.
여고생 은교가 어른들과 자는 이유는 외로워서라고 했다. 세 사람 모두 자기에게 부족한 점이나 채워질 수 없는 것을 갈망하고 있다. 서로 위로하고 위로받지 못하고 상처를 더 만들 뿐이었다.
나는 안개꽃을 좋아하는 여자를 싫어한다. 나의 고등학교 동창 중에 은교같이 청순하고 예쁜 아이가 사실은 남자 관계가 아주 복잡한 경우를 봤기 때문이다. 물론 대학에 진학한 후의 일이다. 안개꽃을 좋아했던 그녀에게 남자들은 줄을 섰었다.
은교는 청순한 모습을 하고 있지만 외로움을 핑개로 삶이 청순하지가 않아서 마음에 들지 않았다.
5. 늙음은 나무로 된 옷을 입는 것
영화에서 이적요 시인은 말 한다. 아마도 '은교'의 원작자 박범신의 생각일 것이다.
" 젊음이 너희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이 나의 늙음도 벌이 아니다"
" 젊은 너희의 아름다움이 너희의 노력에 의해서 얻은 것이 아니듯이 늙은이의 주름 살도 늙은이의 과오에 의해서 얻은 것이 아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을 하지 않는다.
늙음은 젊음의 연장선에 있다. 죽음이 삶의 연장선에 있듯이 자연스런 일이다.
내 나이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환갑이 됐는데 , 아는 것보다는 모르는 게 더 많은 것에 자주 당황하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성실하게 열심히 살아왔다는 것이다. 나의 젊은 날을 돌아보면 아쉬움은 좀 있지만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또 다시 그렇게 처절하게 인생과 사투를 벌이고 싶지가 않아서이다.
앞으로 내게 주어진 인생의 양이 얼마가 되던 간에 지금 살아온 것 처럼 그냥 그대로 묵묵히 살아 가면 된다. 늙음은 벌이 아니고 아름다운 마무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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