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업에 실패하다.
지금까지 살아 오면서 경제적으로 가장 힘이 들었을 때는 "대형 할인 마트"에 식품을 납품을 하는 사업을 할 때 였다.
돈이 없이 "대형마트"에 납품을 하면 곧 부자가 된다는 환상을 가지고 무작정 시작한 것이 잘못이었다.
내 이름으로 상가가 있어서 식품 사업도 "사업자 등록증"을 내 것으로 하였다.
냉동탑 차도 사고 운전기사도 구하고 식품을 시식하는 아줌마 사원도 5명을 채용하였다.
본사가 인천에 있어서 구미에서 상품을 받아서 돌아 오면서 구미, 대구, 울산, 부산의 대형마트와 소형 마트의 매대에 남편이 직접 진열하였다.
교직에 있었던 남편은 장사에 대해서 잘 몰랐고 본사와의 계약서는 처음 부터 우리에게 불리한 것도 망한 후에야 알았다.
그 동안 냉동탑 차를 세 번이나 바꾸었다....1.5톤에서 4.5톤으로 다시 2.5톤으로.....어리석은 짓을 한 것이다.
남편이 새벽 2시에 집을 나가서 구미에서 물건을 받아서 운전을 하며 전 마트를 돌고 집에 오면 오후 6시경이 되었다. 그때까지 먹은 것이라고 우동 한 그릇-운전중에 졸음이 올까 봐 먹지를 못하였다.
즉석 식품이라서 시식을 하지 않으면 팔리지가 않았다.
한달에 인건비와 차의 기름 값이 700만원정도 들었다.
매달 500만원씩 적자를 보고 있었다.
6개월 동안은 언젠가는 잘 되리라는 환상에 있었지만 그후엔 빨리 접는 것이 손해를 적게 보는 것이라는 판단이 섰다.
그러나 소개를 해 준 친척이 다른 식품과 함께 하면 잘 될 거라며 좀 더 해보라고 했다.
결국 평생 빚이 없었던 나는 "빚쟁이"가 되고서 사업을 그만 두었다.
남편의 고생과 인건비는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동안 은행에 신용을 잘 지켜서 최우수 고객이었던 나는 신용대출과 카드 현금 서비스의 한도도 높았
다.
사업이 망한 후에 남은 빚을 갚을 길이 없어서 카드를 돌려 막기 하다가 막히면 시댁에, 큰 동서에게, 여동생에게, 동창에게 빌려서 갚고 빌려서 갚고 한 달에 두번 카드 결제일이 면 정말 머리에서 쥐가 나는 것 처럼 몸도 머리도 아팠다.
그러다 이제는 돈을 빌릴데도 없었고 그동안 신세진 친구나 친척에게 미안하여서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부산에 살고 있던 막내 남동생도 1000만원 대출하는 데 기꺼이 보증을 서 주었고 이자 없이 800만원도 빌려 주었다.
2, 아들대 아들을 담보로 돈을 빌렸다.
남동생에게는 남매가 있었는데 큰 아들 (정원:가명)이가 고1이었는데 성적이 최하위권이었다.
인문계고등학교에 커트라인으로 합격을 하였고 공부에 흥미가 없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학교 생활에 흥미가 없는 정원이는 동네의 중학교 동창인 실업계 학교 친구들과 어울려서 놀았다.
그 들과 어울려 다니다가 어찌 잘못 되어서 한 반 친구를 그들과 몰매를 주어서 크게 문제가 되었다.
올케가 학교에 가서 사정을 하고 피해 학생집에 치료비와 한약을 가지고 가서 빌다시피 하여서 마무리 지었다.
문제는 다음 부터였다.
정원이는 반 학생 전체에게 왕따를 당하기 시작하였다.
성적도 하위권이 아이가 잘난 척 나서서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학급 친구를 때려서 입원까지 시켰으니
그 심도가 더 강해졌다.
돈으로 고생하던 나는 올케를 찾아가서 솔직하게 말하였다.
"자네가 신용대출로 1000만원을 해주면 내가 일주일에 3번씩 자네 집에 와서 정원이를 가르치겠네.
고모부가 퇴근해서 책방에 8시까지 오시면 자네 집에 10시까지와서 가르치고 자고 다음날 아이들 학교에 갈때 집에 가겠네"
올케는 기쁜 마음으로 그러겠다고 하였다.
"이자는 내가 내겠네. 자네는 우리 큰 애의 기숙사 비를 졸업 할 때까지 주게나. 이 다음에 우리 아들이 기억하기도 좋지 않나? 외숙모가 대학 때 기숙사비를 내 주었다고..."
그후 20개월을 일주일에 3일씩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몸이 아프나 정원이네 집으로 가서 자고 다음 날 아침에 돌아왔다. 하루 종일 책방을 보다가 남편이 퇴근을 하여서 가게에 오면 가는 것이었다.
우리 아들들도 방학때 내려 오면 외숙모가 고마워서 큰아이는 영어를 작은 아이는 수학을 가르쳐 주었다.
아이가 공부에 흥미가 없는데 야간 자율 학습까지 하려니 매일 학교에 가서 졸았다.
성적으로는 대학 진학이 어렵고 자격증 전형으로 수시합격을 하도록 계획을 세웠다.
10시에 정원이 집에 가면 찬물을 한 잔 마시고 학교 숙제와 예습 복습을 시켰다.
5분도 못 견디고 냉장고 문을 열었고 화장실을 갔고 , 담배를 피우러 갔다.
새벽 1시까지 지키고 있다가 정원이 여동생 방에서 자고 다음날 세수만 하고 집으로 돌아 왔다.
정원이와 의논 끝에 조리사 자격증을 따서 "호텔 조리학과"에 진학 하기로 결정 하였다.
담임과 의논하여 야간 자율 학습을 하지 않고 "조리 학원"에 다니기 시작 하였다.
조리 학원에서 사귄 실업계 학생들은 모두 모범적이었고 학교 성적도 좋은 아이들이 었다.
모두 담배를 피지 않았다.
우리 정원이만 담배를 자주 피웠다.
우선 필기 시험에 합격을 해야하니 45분 공부를 시키고 15분을 쉬게 하였다.
옆에서 나도 책을 보며 지키고 앉아 있어야 겨우 20분 정도 견디고 좀 쉬자고 하였다.
어느날은 대화를 많이 하였다.
정원이는 부모가 맞벌이 부부였기 때문에 경제적으로는 풍요로운 환경이었지만 늘 외로웠던 아이였다.
동생 부부는 아이들을 자유 방임형으로 키운 대표적인 경우였다.
아이들은 밝고 명랑하고 착하고 예의 바르게 잘 키웠는데 남에 대한 배려와 질서 의식을 가르치지 않았다.
동생이 직장에 올인 하여 대기업 임원으로 성공한 경우였고 올케는 정원이가 원하는 것은 거의 다 해주었다.
필기 시험 공부를 책이 다 닳도록 시켰는데 딱 60점으로 합격을 하였다.
실기는 조리학원에 가서 배웠는데 우선 "양식"부터 배웠다.
학원 선생님과 상담을 하니 실습 시간에 정원이가 자기 마음 대로 돌아 다니고 물도 먹으러 가고 유리창 밖의 다음 반에 공부를 하러온 친구에게 손을 흔들고 매우 산만하다고 하였다.
정원이에게 이유를 물으니 그렇게 한 것은 기억이 나는 데 왜 그랬는 지는 모르겠다고 하였다.
나는 정원이가 사귄 친구들이 어떤 아이들인지 알기 위해서 친구들과 밥을 사주면서 대화를 하였다.
모두 착하고 예의 바르고 성실한 학생들이었다.
양식 자격증 시험에 한번에 합격을 할 수 있다고 장담을 하던 정원이는 자꾸 불합격하였다.
나는 주말에 집에서 실습을 시키고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어서 학원 선생님께 보여 드리라고 하였다.
일요일에는 생활 요리를 하게 하여 가족에게 시식 하게 하였다.
6번 만에 합격하고나니 눈물을 다 글썽이었다.
그 사이에 정원이에게는 충격적인 사건이 있었다.
한 동네에 살던 중학교 친구들과 멀어지려다가 학교 운동장에서 그들에게 몰매를 맞아서 2학년에 올라 가자 마자 학교를 일주일 쉬고 병원에 입원을 하였다.
동생부부는 분노하여 경찰에 고발하려 하였지만 내가 말렸다.
그 아이들은 모두 퇴학을 당하고 집을 나온 아이도 있었다.
보복은 한번으로 끝나지 계속 되지 않는 다는 이웃의 충고대로 경찰에 고발을 하지 않았고 그일은 마무리 되었다.
일식 자격증은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학원에서 실습을 두번을 시켜서 그런지 한번에 합격을 하였다.
정원이는 "호텔 조리학과"로 유명해진 전문대학 1학기 수시로 합격을 하였다.
2학기에는 컴퓨터 학원을 다니기로 의논을 하니 대답이 걸작이었다.
"고모 말씀을 들어서 손해 본 적이 없으니 시키는 대로 할게요"
컴퓨터 자격증도 3개를 땄다
대학에 입학을 하고 한학기가 지난 후에 정원이는 과 수석을 하여서 장학금을 탔다고 모두 고모 덕분이라고 하였다.
지난주 정원이는 "해병대"에 입대를 하였다.
집으로 인사를 하러 와서 밥을 해주고 마침 방학이라 집에 와 있던 막내와 술을 한잔 한다고 나갔다.
막내 아들에게 고모는" 제2의 어머니"라며 외롭고 정신적으로 방황하던 자기를 옳은 길로 이끌어 주어서 고맙다고 말했다고 한다.
자기 부모보다도 더 많은 대화를 큰 고모와 하였다고....
해병대의 취사 특기병으로 자원 입대한 정원이.
이제 네 걱정은 하지 않는다.
네 갈길도 생각의 길도 다 정도를 찾았기 때문이다.
정원이와 함께한 20개월은 나의 인생에 아름다움으로 기억의 창고 한켠에 저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