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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아버님은 전생에 친정아버지

모과 2007. 1. 13. 11:46

어렵기만 하던 시아버님이 마음의 아버지로 자리 잡게 된 것은 결혼 후 10년이 넘어서 였다.

 

친정 아버지가 신장암으로 68세의 나이로 돌아가셨을 때 시아버님은 초라한 영안실에 소복을 입고 있는 세째 며느리를 보시고 그때부터 나를 당신의 딸로 생각하신 것 같다.

 

어머니는 내가 결혼도 하기 전 45세의 나이로 갑자기 교통 사고로 돌아가셨다.

 

이북에서 큰 아버지와 단 두분이 월남을 하신 아버지는 친척이 거의 없었다.

큰 집에는 자녀가 없으니 영안 실에는 우리  4남매와 올케 둘과 손주 다섯명뿐......나는 맏딸이고  37살이었고 오른쪽 폐절제 수술로 몸이 많이 힘든 때였다       

 부산에 살고 있어서 아버지가 임종을 앞두고 한달 간 입원을 하신 병원에 매주 토요일에만 올라 갈수 있었다.

 

어머니가 돌아 가신후에 아버지는 자식들의 마음을 무던히도 아프게 하였다.

 

평생을 어머니를 힘들게 하던 마작을 계속하셨고 몇 번의 여자 문제로 맏딸인 나를 마음 아프게 하였다.

동생들에게 나는 형같이 의지되던 누나와 언니였지만 가난한 대학원생과 결혼 한 나는 동생들에게 경제적인 도움을 줄 수 없었다.

 

결혼전 남자 중학교의 과학교사였던 나는 4년간의 봉급을 어머니에게 드렸고 친정집을 사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식생활은 어머니가 하시던 시외 버스터미널 앞의 조그만 식당이 있었으니 해결 되었지만 동생들 생각에 혼수는 거의 하지 않고 그냔 몸만가지고 결혼을 했다.

 

결혼후에 시댁의 여자 분들 중에 "시부모님 이불도 해오지 않는 며느리가 어디있느냐?'는 소리도 들려 왔지만 죄송한 생각은 들지 않았다.

행여 누가 혼수로 흉을 보더라도 당연하다고 생각을 하였다.

내가 해오지 않았으니까 말들을 하는게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다.

 

혼수 대신에 나는 대학까지교육을 받았고 직장이 있으니 체면 때문에 동생들을 생각하지 않고 나만 생각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시부모님께 효도하려는 마음과 사람을 사랑하는 따뜻한 마음을 혼수로 가지고 왔다고 생각하였다.

남편또한 몸만 가지고 결혼을 하기는 마찬가지 였고 대학원을 다니며 직장에 다녔으니 봉급이 내가 더 많았다.

다행히 남편의 직장에서 사택으로 이층집의 이층의 방 두칸을 전세로 얻어 주었다.

 

나의 직장은 안양의 인덕원 사거리에 있었고 집은 마포구 공덕동이어서 매일 새벽 6시에 집을 나와서 영등포까지 버스로 영등포에서 전철로 안양까지 안양역에서 시내를 가로 질러 뛰다시피하여 스쿨 버스를 타는 왕복 3시간의 고단한 통근을 일년을 하였다.

 

마침 큰 아이를 임신하여 심한 입덫을 하며 심하면 아무 정거장에서 내려 골목을 찾아서 토를하고 다시 버스를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 당시의 사립학교는 주 34시간의 빡빡한 일정이어서 하루에 6,7시간의 수업을 해야했다.

큰 아들을 3월에 갖아서 12월19일에 낳았는데 ...겨울 방학은 17일에 하였다.

 

그후 안양으로 이사를 하였다.

 

시아버님은 친정아버지와 동갑인데 두 분의 삶의 질이 많은 생각을 하게 하였다.

 

이북에서 부유한 집의 아들로 태어 나셔서 어머니가 일찍 돌아 가셔서 할머니손에서 크신 아버지.

큰 아버지가 일본유학을 가셔서 수의사 자격증을 가지신 것과는 달리 아버지는 기생집만을 다니시다 여러 번 학교를 옮긴후 고등학교를 졸업하셨다고 한다.

초라한 나의 아버지는 경제력은 없고 마음만 착하시고 의지력도 없으신데...

 

돌아 가시기전 하신말씀은 ..."미안하다. 고맙다"

그 말이 아버지에게 들은 마지막 말이 었다.

그 아버지의 모습을 꼭 닮은 나는 거울 속의 나의 모습에서 아버지를 가끔 보게된다.

10년을 아버지에 대한 미움을 가지고 살았는데 아버지도 어쩔수 없었던게 아닌가 깨닫고 나니 자연히 용서가 사랑으로 변하였다.

 

시아버님은 예산의 깡촌에서 홍성의 초등학교를 (홍성에 가까운 시골집) 나오시고 연고가 아무도 없는 서울로 유학오셔서 배제학교와 연희 전문 학교 상과를 나오시고 평생을 교직에 계시다 대전 광역시의 명문 여고에서 교장으로 퇴임을 하신 분이다.

 

나라에서 교육 문화훈장도 두 번이나 타신 훌륭한 교육자시다.

 

아버님은 날이 흐리거나 비가 오는 날에는 내게 꼭 전화를 주셨다.

"날씨가 흐린데 몸은 어떠니?' 하고

 

그러나 당신이 몇 번이나 병원에 입원을 하셨어도 부산에사는 우리에게는 연락을 못하게 하셨다.

"부산애들까지 알게 할 필요가 없다"하셔서

나는 늘 아버님이 퇴원후에 그것도 한참 후에 시댁에 가서야 그 사실을 알곤하였다.

 

시어머님은 평생을 퇴행성 관절염으로 몸이 아프신데 아버님은 한번도 짜증을 내거나 화를 내시는 것을 보지 못했다.

한 달에 한번 꼭 어머님과 서울의 큰 병원에 검진을 받으러 다니시 곤 하셨다.

 

남편의 계속되는 사업 실패로 고생하는 며느리가 안스러우셔서 마음 한 귀퉁이에 호용에미의 몫을 남겨두시고 깊고 넓은 사랑을 주시고 계신다.

 

두 아들아이를 남을 배려하고 성실하고 예의바른 아이로 키우려고 노력을 많이 하는 나의 모습도 흐믓해 하셨다.

두 아이 다 재수를 하여 원하던 학과에 진학을 했고 큰아이는 장학금과 고학년은 들어 가기 어려운 기숙사에 계속 있었고 졸업을 앞두고 10월 말에 취업도 하는 것을 보시고 우리 아이들과 나를 인정하셨다.

 

2년전 남편은 사업을 접고 남들은 퇴직할 나이에 대형서점에 취업이 되었다.

남편의 회사는 봄 ,가을에 전국 약70개 대학에서 "대학생을 위한 책 할인 행사"를 한다.

그때는 사원이 부족하여서 나도 7개 대학에서 행사를 맡아서 했다.

 

대전, 광주, 군산, 대구, 아산만의 도시에서 모텔에 머물며 행사를 했는데 매일 마감 시간이면 전화를 주시고 그날의 매상을 아시고 기뻐하셨다.

 

요즈음 대형 마트의 조리제안의 한 코너에 취업이 된 나를 호기심있게 보고 계신다.

전화를 주셔서 '힘들지 않니?' 하시기에

 

"아버님! 재미있어요. 다음에 갈 때 제가 여기서 배운 음식을 만들어 갈게요."

"그려,그려,허허허..."

 

큰아들이 웃으며 "엄마! 할아버지는 엄마가 신기하고 재미있어서 전화를 자주 하시는 것 같아.

엄마는 변화 무쌍하잖아"

 

"허허 맞다. 모두 단조롭게 살고 있잖아. 아버지도 외로우신 분이거든."

남편이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올해로 85세가 되신 아버님.

지금 하시고 있는 회사를 88세까지 하시고 시골집으로 귀향 하신다고 3년 전 부터 아들과 사위 들을 주말마다 모이게 하여서 거의다 고치셨다.

 

내가 아버님에게 들은 가장 멋진 말은

 

"그애는 한다면 하는애여."

 

예 아버님. 저는 한다면 하는 사람입니다.

아버님, 어머님께 지금은 걱정을 드리고 있지만 꼭 효도하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아버님!

아버님의 심성을 꼭 닮은 남편을 낳아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