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정 아버지는 육이오때 큰아버지와 단 두분이 월남을 하셨고 큰 집에는 사촌형제가 없으므로
나는 친척이라고는 외가 식구만이 있는 쓸쓸한 친정이 명절때만 되면 싫었다.
어머니도 내가 25살 되던해, 45세의 나이로 갑자기 교통사고로 돌아가셔서 그후로 외가와도 단절된 생활을 하게되었다.
어머니가 돌아 가신뒤 생활력이 약하고 의지력도 약하면서 마음만 착하셨던 아버지는 자식에 대한 책임감 또한 없으셨다. 어머니가 돌아 가신후 몇번의 여자 문제로 장녀인 나의 마음을 아프게 하시더니 아버지 마져 68세의 나이에 신장암으로 돌아가셨다.
시아버님과 아버지는 같은 나이신데......
아버님은 친정 아버지 돌아가신 영안실에 당시로는 큰 돈을 부주로 가지고 오셔서 문상을 하셨다.
아버지의 장례식이 추석전 날이라서 문상객이 더 없었다.
아버님은 초라한 문상객이 거의 없는 상가에 우리 네 형제만이 달랑 있는 모습을 보시고 그때부터 나를 당신의 딸로 생각하셨나 보다.
어릴때부터 온갖 병치레를 다 한 나는 겉으로는 건강하고 밝고 맑다는 소리도 많이 들었지만
아버지가 돌아 가시기 6개월전에 "기관지 확장증"으로 오른 쪽 폐를 절제하는 큰 수술을 받았었다.
나는 무능력하고 마작을 즐기며 생업을 등한시한 아버지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장녀로서 도리는 다해야한다고 생각하였기에 부산에서 매주 서울로 올라갔다.
페절제 수술을 한 후 한 일년은 숨 쉴때마다 가슴이 뻐근하고 숨이찼다.
그당시에 아버지는 인천에서 새어머니라고 부르기도 뭐하고 안 부르기도 애매한 관계인 아주머니와 살고 계셨다.
그 분이 아버지 병간호를 하셨는데 내가 서울에 가면 그분을 신촌의 여관에서 푹 주무시고 목욕도 하시게 하였다.
아버지는 말기암으로 병원에거 계속 몰핀을 주사해 주어도 별 효과가 없었고 고통스러워 하셨다.
자랄때 유난히 사랑을 받은 내가 옆에 있으면 아픈 것을 참으시며 신음소리도 내지 않으려고 얼굴에 굵은 땀방울이 송글 송글 맺혔다.
"미안하다. 고맙다."를 가끔씩 하시며.....마음만 착했던 친정 아버지는 그렇게 세상을 떠나셨다.
내가 토요일마다 서울을 다닌지 한 달만이었다.
어머니가 고생하여 사 놓은 집을 팔 수 있어서 아버지는 돌아가실 때까지 신촌의 세브란스병원에서 치료를 받으셨고 그 곳 영안 실에서 장례식도 마쳤다.
문상객이 없어서 쓸쓸하였지만 어머니가 계신 "탄현의 기독교인 묘지"의 어머니 곁으로 가셨다.
그 후에 시아버님은 비가 올때나 날씨가 굳을 때 꼭 내게 전화를 주셨다.
"비가 오는데 수술한 데는 아프지 않느냐?"하시고
당신이 수술을 하실 경우에 부산에 사는 애들 까지 알일 필요 없다고 퇴원 후에야 다른 형제들에게 듣게 하셨다.
남편이 학교에 있다가 사연을 안고 그만 둔후에 고지식한 남편은 하는 일마다 싶패를 하였다.
그럴때는 만나는 인연도 악연으로 끝나게 마련인가보다.
설상 가상으로 사기까지 당해서 집도 압류되어서 쫒겨 나다시피나오고 ....남편은 오랫동안 집을 떠나서
아이들과 나 만의 생활이 한 동안 계속 되었다.
형제들은 무서울 만큼 냉정했고 남편에게 매일 걸려 오던 그 많던 전화도 어느 날 갑자기 안부 전화조차 한 통화 없었다.
아버님은 내게 미안하다며 방 두칸짜리 아파트를 월세로 얻을 돈을 보내주시고 생활비도 한 달 분을 보내셨다.
4년동안 아버님과 남편의 바로 위 누님인 큰 시누이만이 통화를 하며 내게 많은 위로와 힘을 주었다.
동서는 남인가 형제인가?
크게 성공한 형제도 있었지만 동서는 명품을 휘두르고 다니면서도 조카들의 등록금 한번을 내 주지 않았다.
4년후에 큰아이가 서울의 사립대학에 장학생으로 합격했을 때에야 형제들과 아버님이 모아 준 돈이 450만원가량 되었다.
나는 그 동안 시댁에 가지 않았다. 아니 갈 수가 없었다.
사는 게 너무 고달프고 우는 것 조차 사치였으므로.....
시댁에서 모이는 일은 생신 때와 제사 때였다.
나는 친정이 초대 기독교 장로의 집안이라서 제사를 모르고 자랐다.
제사는 우상숭배이므로 죄를 짓는 것이라고 교회에서 듣고 자랐다.
시아버님은 기독교학교인 배제학교와 연희전문학교를 나오신 교육자 이셨기에 기독교를 잘 알고 계신 분이다.
시할머니 장례식때 우리를 불러 놓고 말씀하셨다.
"네 에미가 교회권사이고 교회 다니는 사람도 있으나 장례식은 돌아 가신 할머니의 소망대로 불교식으로 하는게 좋겠다. 내가 죽은 후에는 어떻게 해도 좋으나 할머니,할아버지는 그 분들의 소망대로 하는게 도리라고 생각한다."
할머니가 오랫동안 다니셨던 절의 여스님 세분이 3일 밤,낮을 한 분씩 순번대로 계속 불경을 외우셨다. 잠은 근처의 여관에서 주무시며, 장례식에는 유명한 그 절의 주지스님이 장지까지 계속 종을 딸랑이시며 불경을 쉬지 않고 외우시며 ...장례식 마칠때까지 정성은 계속 되었다.
나는 제사에 거의 참석을 하지않았다.
장사를 한 이유로 집을 비우기도 어려웠으나 제사에 참석하는 자체를 기피한 것이다.
지난 3월에 가게를 그만 둔 뒤로 시댁의 모든행사에 참여하고있다.
제사때에도 꼭 갔으나 큰형님댁의 부엌에서 음식을 만드는데 조수 노릇이나 했지 제사상에는 남자분들이 음식을 진열했으므로 구체적으로 제사상에 대해서 아는게 별로 없었다.
제사가 진행되는 동안 부엌에서 제사가 끝나고 잡수실 과일과 식혜등을 준비하며 기다리곤 하였다.
그런데 지난 번 돌아 가신 시어머니 (현재의 어머니는 새어머니지만 50년 가까이 되셔서 남편이나 손위 시누이님은 엄마라고부른다) 제사 때 였다.
제사 지내기 전에 미리 모두들 저녁을 먹었는데 남편이 저녁을 먹지 않고 제사 직전에 왔다.
제사를 지낸후에 남편의 밥을 가지고 상으로 갔는데 신기하게도 제사 지낸 밥 그릇에 위가 수북히 파여있었다.
"어머! 이 밥이 왜 이래요.?"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더니
남자 어른들..아버님 ,작은아버님,아주버님들...이 모두 크게 웃으며 재밌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고 말씀하셨다.
"영혼이 오셔서 잡수셨어요,"하고 큰 아주버님이 하하하 웃으셨다.
"진짜예요.?"
"아이구, 물에 한 숟가락 말아 놓았던거야.'하며 남편도 웃었다.
"아니 그런데 제삿날에 귀신이 와서 잡수신다면 왜 제삿날에만 오셔요. 다른 날에는 굶어요,?"
"다른 날에는 다른 집 제사에 가서 먹지." 큰형님이 말했다.
"에이, 그럼 귀신들은 다 거지네요. 자기 제삿날에만 제대로 먹고 다른 때는 거지같이 얻어 먹고 다니고...
죽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나는 귀신이 없다고 보네요. 나는 만약 영혼이 정말로 잡수시러 오신다면 수 많은 기독교인 큰 죄를 짓고 있는게 아닐까?생각했는데 제사의 뜻은 그게 아닌것 같아요."
귀신들이 모두 거지라고 하니까 모두 깔깔 웃으시다가 내 이야기를 경청하고 계셨다.
내가 제사음식을 만드는 큰 형님을 도우며 느낀 것은 조상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살아있는 후손들이 제사를 통해서 서로 사이좋게 음식을 만들고 ,그동안의 소식도 알고, 어려운 형편의 형제를 알고 돕고...우애를 지키게 하기위한 조상님들의 지혜라고 생각되었다.
출세를 했던 사업실패로 어렵게 생활을 하던, 한 뿌리를 가진 형제가 한자리에 모일수 있는것은 어른들의 생신이나 제사,또는 경조사때이다.
자주 만나야 정도 생기고 우애도 깊어지는 것을 느꼈고 서로의 사정과 마음의 고민도 알 수 있고
한 번이라도 다정한 눈으로 서로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볼때 제사는 우상숭배는아니다.
조상님이 우상이 될 수도 없고 명절날에 어른에게 세배를 하듯이 제사는 하나의 미풍양속이라고 결론을 마음으로 내렸다.
그래서 제사를 인정하는 "천주교"로 개종을하고 부모님에게 더 기쁨을 드리기 위해서 자주 찾아 뵈야겠다.
제사,생신, 모든 경조사에 적극적인 참여를 해야하겠다.
참고:이글을 읽고 생각을 달리 하는 개신교인들의 댓글을 사양합니다.
종교는 마음안에 있으니 각자의 마음 속에 있는 신앙을 존중하는 사회가 됩시다.
당신의 믿음이 중요하다고 다른 사람의 믿음을 고치려는 일을 하지맙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