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세 때 9월, 나는 경기도 시골 학교 교사였다. 대학졸업 전에 발병한 결핵성늑막염으로 투병 한지 1년이 지난 후 신문광고를 보고 간 남중에 취직이 됐다. 학교 앞에서 하숙을 하며 서울집에는 일주일에 한번 갔다.
어느날 수업도중 어머니가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얼이 빠져서 찾아간 병원. 어머니는 이미 영안실에 모셔져있었다. 45세 젊은 엄마는 늘 120세까지 살고 싶다고 했다.
아버지는 한쪽 눈을 수술해서 실명했고 나머지 눈도 한달 후에 수술예정인데 실명할 수도 있다고 한 상태였다. 아버지는 착한 사람이었지만 경제적으로 무능했고 자식에 대한 책임감도 없는 편이었다.
실질적으로 가장이었던 엄마와 나는 20살 차이다. 어머니는 무학으로 자신이 배우지 못한 한을 자식들에게는 물려주지 않으려는 굳은 의지로 교육열이 남다른 분이었다.
병원에 도착하니 아버지가 달려와서 나를 안으며 통곡했다. 그와중에 시신을 영안실로 옮기는 직원이 어머니 손에 낀 반지와 현금을 훔쳐갔다가 들켜서 장레식이 끝난 후 집으로 사과를 하러오기도 했다.
아버지가 이북에서 윌남해서 친척이 거의 없는 우리집. 군에 간 큰남동생이 와서 어머니 시신을 확인했다. 여동생은 아팠고 막내 남동생은 고2였다.
어머니가 다니던 교희 교인들의 도움으로 장례식을 치루며 7번 기절 했다 깨어났다. 그러면서 나는 모든 게 헛된 것을 깨달았다. 25세의 처녀가 어머니 무덤에서 인생의 덧없음을 느끼고 그리 많이 가지고 있지도 않은 욕심 마저 버렸다.
소박하고 검소한 삶을 살리라. 그후 정말 인생이 그렇게 흘러갔다. 나의 인생관의 첫번째는 '남과 우리 가족을 비교하지 않는다' 이다.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면서 어떤 상황에서도 두 아들을 위해서는 든든한 바위 같은 어미가 되고 싶었다. 45세에 떠난 엄마에게 다 받지 못한 정을 내 자식에게 주고 싶었다.
지금 나는 45세였던 엄마보다 19세나 더 나이든 노인이 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