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아들의 생일에 서울에 가지 못하고 전화만 했다. 대학부터 서울에서 생활하며 객지밥을 먹은지 어느새 15년이 지났다. 생일날에는 늘 친구들이나 혼자 밥을 먹을 아들 생각을 하면 마음 한 켠이 아팠다.
전화 통화 중에 아들이 뜻밖에 말을 했다.
" 엄마! 여직원들이 고급 머플러를 사길래 나도 엄마 머플러 하나 샀어요. 명품인데 할인해서 싸게 샀어요. 집으로 보냈으니 받으세요. 그리고 나 낳느라고 고생 한 날이니까 맛있는 음식 아빠와 함께 사드세요. 돈은 송금할게요"
바로 돈을 나의 계좌로 송금했다. 올해 과장으로 진급 하더니 생각이 더 깊어지고 배려심이 많아졌다.
큰아들은 결혼을 하고 새학교로 전근을 간 해에 임신을 했다. 임신 중에는 긴거리 통근으로 왕복 3시간 씩 엄마 뱃 속에서 고생을 했다. 출산 때는 진통을 하기 시작해 3일 만에 힘들게 낳았다. 얼마나 출산의 고통이 심했는지 나의 얼굴과 목은 실핏줄이 터져서 보기 흉할 정도였다.
큰아들은 어미 몸에서 나오느라고 고생을 너무 해서 태어난 후 울지도 못한 채 새파랗게 질려있었다. 친정어머니는 일찍 돌아가신 나의 출산 모습을 지켜 본 사람은 서울에 사시는 시고모님과 큰 시누이형님이었다. 두 달 후에 출산예정이었던 시누이 형님은 나의 출산 모습을 보고 놀라서 조카딸을 한 달 먼저 조산했다.
큰아들은 성격이 온유하고 조용한 아이다. 웃을 때도 크게 소리를 내서 웃지 않고 빙그레 미소를 짓는 편이다. 36세가 된 지금까지 부모에게 기쁨 만을 준 아들이다. 학교에 가면 선생님들은 듣기 민망할 정도로 과찬을 하곤 했다.
오히려 부모가 사업실패와 건강문제로 아들의 마음을 아프게 한 편이다. 군에 다녀온 후 부터 어미를 여동생같이 돌보는 마음이 보였다. 졸업하고 직장에 취업을 하고는 부모의 보호자 처럼 행동했다.
나는 직장 일로 고단한 남편과 함께 집 근처 고기집에 가서 '한우 모듬고기'를 함께 먹었다. 이제 아들에게 부모가 해줄 일은 건강하고 둘이서 정겹게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나는 기관지 확장증으로 수술을 해서 오른 쪽 폐가 없다. 기관지가 선천적으로 약해서 밍크 목도리는 건강에 좋지않다. 그러나 아들이 고마워서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어미를 위해서 목도리를 고르고 돈을 치뤘으면서도 부담을 느낄까봐 그리 비싸지 않다고 애써 변명하는 아들의 마음이 보여서였다.
좋은 아들들은 나의 인생에 가장 큰 축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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