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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순 교장, 대전에는 전설적인 "교육의 신"이 살고 있다.

모과 2010. 2. 23. 05:27

오늘은  충남 육상 8연패의 신화였던 전 대전여고 교장이었던 박민순 교장선생님의 실화를 소개하겠습니다.

요즘 "공부의 신"이라는 드라마가 인기가 있고 저도 재미있게 보고 있습니다.

김수로가 연기하는 강석호 교사 보다 더 했던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교육자 박민순  전 대전 여고 교장 선생님의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저는 박교장 선생님의 며느리로 33년을 살아오면서 교육자보다는 존경하며 사랑하는 시아버님으로 모셨습니다. 저는 며느리라기보다는 딸같은 사랑을 받은 셋째 며느리입니다.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외라리 박 민순교장선생님의 생가 앞에서 어머님과 함께 찍은 사진입니다

 

 

1. 충청도 깡촌  외라리에서 연희 전문학교까지 유학을 갔습니다.

 

121년된 고향집은  7대 째 내려오고 있습니다. 돌아 가신 시할아버님과 아버님, 남편의 형제들이 태어난 집입니다. 이집에서  아버님은 홍성 보통학교를 6년간 다니셨습니다. 걸어서 한 시간이 넘게 걸리는 거리입니다.

시할아버님은 (박상윤) 교육열이 대단한 분이셨습니다. 전형적인 농부로서 5살부터   서당을 다니셨습니다. 서당 훈장님이  할아버지의 총명함에 반해서 당신의 따님과 결혼을 시키셨습니다 .

99세 에 돌아 가신 할아버지는 제게 아버님을 4년제 대학인  경성 대학에 못보내고 연희 전문에 보낸 것이 미안하다고 하셨습니다.

아버님은 홍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의 배제 중학교에 진학을 했습니다.보통학교 동창의 외삼촌댁이었습니다. 그집에서 연희 전문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하숙을 하셨답니다. 당시의 하숙비는 쌀 한 가마 였답니다.

** 아래 내용은  통일한국 1989년 4월호 94쪽 : 이철승 전신민당 대표 최고위원이 기고하신 내용 중에 발췌했습니다. 이하 내용에는 시아버님이시지만 극존칭은 생략하겠습니다.

 

 

 

1945년말 전국의 중학생수는 71,700명, 전문대학이상 고등 교육기관의 학생수는 7,110명이었다.

1945년 8월25일 순수한 학생조직체로서 학도대의 발족을 했다.

당시 사회 상황은 해방의 기쁨도 맛보지 못한채 정부가 들어 서기에 앞서 무질서와 혼돈을 겪어야 했으며 일제가 아직도 무장을 하고  주둔한 상태였다.

 이에 박민순 학생을 비롯한 서울지역의 대학 대표자들이 치안과 질서를 잡는데 앞장서기로 했다.

해방 직후 나타난 최초의 학생 단체로서 치안 유지와 구호 활동을 하면서 일제의 무장 해제를 위해서 뭉친 것이다. 학도병 징집에 시달리면서 울분을 삼키며 해방을 고대했던 대학생들에게 조국의 해방은 무엇인가 의무감을 느끼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박민순학생은  당시 연희 학생들을 이끌고 성북경찰서로 달려갔다.

일본의 항복 선언에 따라 일제 무장 해제는 당연한 것이었으나 주둔중인 일본군은 무장한 채 경찰서에 집결해 있었다.연희 대학생들은 경찰서에 진입했으나 무장 일본군들의 반격을 받았으며 무차별총격 속에 두 명의 학생이 숨을 거두고 말았다.

 

 

 

결국 일제의 무장 해제는 됐으나 그 과정 중에 박민순학생의 친구인 휘문 중학교 동기 두 명이 일본군의 총에 맞아서 숨졌다.그들의 장례식은 이른 아침부터  휘문중학교 교정에서 장례식을 하고 종로,을지로, 광화문, 아현동,신촌을 거쳐서 어둠이 내릴 때 연희 학교 본관 앞에 도착했다.

당시 장례 행렬은 전국에서 모여든 추도객들이 서울시내를 뒤덮을 정도로 장엄했으며 날이 밝은 다음 날에야 연세 동산에 그들을 안치 하면서 장례식을 마쳤다.

당시 신문에는  그 기사가 전혀 나지 않았다.

 

그 때는 무질서한 해방직 후의 상황에서 해가 밝을 때마다 원인 모를 주검들이 수북히 쌓인 채 발견된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의 부모님이 와서  박민순 학생을 고향 예산으로 데리고 갔다.

 

* 1999년 2월17일 청주 내일신문 : 황우선의 인물평론/박민순 대청기업(주) 대표이사

 

제목: 올곧은 교육자의 표상

 

고향에 내려온 박민순 선생님은 지인 몇 사람과 뜻을 모아 지금의 서산 중학교 전신인 서산 중학원 설립에 참여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교육계에 인연을 맺었으며 예산여중과 병천중,한밭중, 신흥중(충남 중학교 전신),연기중, 예산 여고에  상업과 수학 교사로 재직했습니다.임천중 교장과 충남교육위원회 사회 체육 과장을 지낸 후 대전 여고 교장으로 정년 퇴임을 하셨습니다.반 백 년넘는 동안 교육자로서 아버님의 생활은 불의에 굴하지 않고 올바른 교육을 바로 세우려는 의지와 노력 그 자체였습니다. 

 

 

1987년. 3월 20일 일간 스포츠 5면 기사 전문입니다. (宋瑛株 기자)

 

**.꿈을 가꾸는 사람들: 대전여고 교장 박민순(朴敏淳) 씨

 

젊음을 모두 충남 체육 발전에 바친 박민순 교장은  헌신적인 노력으로 충남 육상 8연패의 신화를  창조했습니다. 기본 종목인 체조, 수영등 전국 꼴찌 수준이었는데 해마다 전국 수위를 달리는 밑걸음이 되셨습니다.1985년 대전여고 교장으로 오기 전까지 21년동안 충남 교육위원회 사회 체육과에 재직하셨습니다.

 

2. 매일 선수 합숙소를 순회 하였습니다.

 

해가 뜨기도 전 어슴프레할 때 대전, 당진, 금산,논산등 충남 곳곳의 수영장, 육상장, 선수 합숙소를 찾아 다녔습니다. 돈이 부족하면 대부분 자비를 들여서 다녔습니다.

도내 선수들과 지도자들을 독려 해서 충남의 스포츠 관계자들에게는 잘 알려졌지만 정작 명예로운 시간과 장소에서는 사라지는 분이셨습니다.

충남도지사,  각 시의 시장님께  부탁을 드려서 새벽에 선수들이 있는 곳을 찾아가 격려하게 했습니다.

 

박민순 선생님이 스포츠와 인연을 맺은 것은 1951년 병천 중고등학교 교사로 부임을 하면서 부터 입니다.

당시에 젊은 수학 교사였던 그는  이 학교가 도내 역전 경주대회에 출전하게 되자 자연히 학생 지도를 맡게 됐습니다.

가난한 촌에서 제대로 먹지 못한 선수들이 고된 훈련을 못 견디고 졸도를 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그 학생은  이틀만에 깨어 났다가 도로 졸도했습니다. 그 후 이틀만에 깨어나는 학생을 보고 깊이 깨달았다고 했습니다.

"과연 이 체력으로 공부가 ,체육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이왕 교직에 몸담은 이상  체육을 통한 국민 건강을 위해서  일생을 바치겠다"  박민순 선생님이 체육 교육에 올인을 결심을 한 계기입니다.

 

박민순 선생님이 가는 학교마다 선수들은 왕성하게 자랐습니다.

 

3. 평생을 오전 6시에 출근을 하셨습니다.

 

1964년에 박민순 선생님은 충남 교육 위원회 사회 교육과에 발령을 받으면서 체육 발전에 추진력을 발휘하기 시작했습니다.

매일 아침 6시에 출근을 해서 충남안의 시,면소재의 중고등학교의 상황을 체크했습니다.

새벽 6시 출근은  대전 여고 교장으로 정년  퇴직 할 때까지 계속 됐습니다.

충남의 각 학교마다 육상, 수영, 체조팀을 조직해 나갔습니다.

선수 합숙소를 다니며  꾸준히 격려해서 국가 대표를 양성했습니다.

그 결과 1971년도에 충남이 제1회 소년체전에서  1위를 하는 쾌거를  했습니다.

 

4. 비닐 수영장 설치, 각 학교에 보급시켰습니다.

 

1974년 충남에 최초로 수영장이 들어섰습니다. 한밭중, 대전여중, 논산중에 광주 사레지오학교의 수영장을 본 따서 조립식 수영장을 만들었습니다.

옥외 수영장에서 수영하는 기간이 너무 짧아서 고안해 낸 것이 비닐 수영장이었습니다. 주위의 반대를 물리치고 한밭 중학교에 비닐 수영장을 만들어서 성공했습니다. 비닐 덕분에 실내 온도가 올라가서 전보다 3개월 정도 더 수영 연습을 할 수 있었습니다.그 후 연탄 보일러 까지 설치해서 일 년 내내 수영장을 이용할 수 있던 적도 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재미있는 일이 되겠지요.

비닐 수영장으로 바꾸면서 황금의 꿈나무들이 쏱아져 나왔습니다.

박민순 사회 체육 과장은  스포츠 지도자들이 좋은 성과를 올리면 사례 논문집으로 발표케 했습니다.고과에도 반영해서 활력을 주었습니다.

또한 서울로 발탁된 충남 선수들을 보러 매주 토요일에는 서울로 갔습니다.

대부분의 경비는 자비로 했습니다.

 

아버님의 외길 인생의 집념은 풍요로운 생활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7남매(5남2녀)의 학교 등록금 뿐만 아니라 식량까지도 모두 할아버지가 해주셨습니다.

40년 가까이 살고 있는  대전시 석교동의 3칸 주택도 할아버지께서 사주신 겁니다.

아버님은 공무원의 박봉에도 불구하고 그 돈을 모두 선수들을 위해서 쓰셨습니다. 할아버지는 그런 아드님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셨습니다.

 

5. 교장 사택을 매각해서 체육관을 지으셨습니다.

 

아버님은 대전여고 교장으로 발령이 나자 교장 사택으로 이사를 하지 않으셨습니다.당시 문교부에서 매각처분 승인을 받았습니다.

300평이 넘는 사택을 팔아서 기숙사가 딸린 체육관을 지으셨습니다.

대전 여고 졸업생들의 기부도 많았습니다.

 

체육교사가  따로 없던 시절 자연스럽게 체육 특기생을 지도할 기회가 있었고, 아버님의 뜻에 따라 근면과 성실로 연습한 제자들이 여러 대회에서 입상하거나 나라를 대표하는 선수로 성장해서 나중에는 그들 역시 지도자가 됐습니다.

정년 퇴직을 앞둔 아버님을 위해서 대전 여고 정구 선수들이 강훈을 했다고 우승 소감을 밝혀서 화제가 됐습니다.

 

5. 대전여고에 장학재단을 설립하시고 법인화 했습니다.

 

장학재단을 설립하려고 했으나 자금이 전혀 없었습니다.

고심 끝에 학교 매점을 운영해서 나오는 수익금과  대전여고  동창생들이 참여해준 돈으로 만들었습니다.

아버님은 각종 상을 받을 때 부상으로 나오는 현금은 모두 장학금으로 내 놓았습니다.

대전 여고에 발령받기 전의 상금은 충남 도지사에게 장학금으로 쓰라고 기부하셨습니다..

 

7. 국가에서 훈장과 표창장을 받으셨습니다.

 

* 한국교육대상

*충남도 문화상

*국무총리 표창

* 대통령 표창

*국민훈장 동백장

* 한밭교육상

 

* 대한민국 교육대상  

                      * 한밭교육상

                       * 국민훈장:동백장

                       * 젊은 날의 아버님 모습

 

* 대통령 표창장

  

* 국무총리 표창장 

 

* 이 상장 말고도 각 종 상장과 감사장이 한 박스나 있습니다. 지인이 모두 한장 씩 촬영을 해서 병풍을 만들라고 조언을 했답니다.  만들어서 시골집 강당에 전시할 계획입니다. 

 * 이표창장이 아버님이 제일 소중하게 여기는 상입니다.

 

" 위의 사람은 공무원으로서 평소 헌신적 봉사정신과 성실한 집무태세로서

맡은바 임무수행에  충실하였음은 물론 국가 이익과 발전에 기여한 바 컸을 뿐아니라 타 공무원의 모범이 되었으므로 그공을 찬양하여 이를 표창함...문교부장관  이규효, 1963년 8월15일"

 

 

6. 체육 동호인들이 마련한 환갑 잔치

 

예전에는 교사 정년이 65세였습니다.  아버님의 환갑 잔치는 하지 않았습니다.시할아버님과 할머님이 계셔서 집에서 가족끼리 식사를 하고  조용히 보냈습니다.

그런데 전국의 체육 동호인들이 아버님 몰래 환갑 잔치를 준비했답니다.

예전의  대전 동양 백화점 4층을  빌려서 모두 준비해놓고 아버님과 어머님을 초청한 겁니다.

진실로 존경하지 않았으면 그렇게 해드릴 수가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 환갑 잔치 때의 부모님 모습입니다. 

 

* 케익의 초가 큰게 6개 작은게 1개군요.^^ 환갑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젊으시지요.

지금은 88세,미수이십니다. 

 

아버님은 교장 정년 퇴임 후 경비 용역업체인 대청 기업을 설립하셨습니다.

한국 경비협회 대전 충청 지역회장을 초대부터 3대까지 하셨습니다.

아버님이 추구하는 사회봉사란 반대 급부를 기대하지 않는 것으로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는 것입니다. 아버님은 유교를 믿으십니다.

아버님이 주관하거나 참여하고 있는 단체는 모두 17개입니다.

전직 중등 교장단 회장, 연세대 대전 동문회장, 등을 역임하셨습니다.

.

"공통점이라면 구성원들이 박 회장을 큰 교육자이자 지역의 어른으로 존경하는 것이며 그가 누구보다 열성을 다해 모임에 참여하면서 사회봉사를 유도 하는 것, 추앙받는 교육자로서 ,사회봉사에 앞장서는 기업가로서 박 회장의 인생 역정은 우리 교육을 바로 세우고 내일의 지표가 되어 줄 소금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황우선의 인물 평론 중에서 발췌했습니다.

 

**저는 이글을 쓰면서 밤을 꼬박 샜습니다.

 

자료를 다시 보고 ,다시 보고  아버님의 일생을 되돌아 보며 글을 썼습니다.

내일이면 드라마 '공부의 신"도 끝이 납니다.

공부의신이 제시하는 강석호라는 인물은 우리 시대가 요구하는 교사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전국에 우리 아버님 같은 "교육의신'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는 분들이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의 아이들 모두가 우리 기성 세대가 책임을 져야 할 소중한 아이들입니다.

 

** 인생에서 책임을 빼면 남는게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