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큰 아들이 준 가장 큰 설 명절 선물

모과 2010. 2. 15. 08:54

어린 시절 나는 명절에 할머니 집에  가는 친구들이 너무 부러웠다.

이북에서 월남하신 아버지는 북에 할머니와  고생과 친척들을 북에 계신다.

 나는 명절이면 설빔을 입고  북적이는 기차를 타고 가는 사람들을 뉴스로 보며 무척 부러웠다.

 

전형적인 충청도 대가족 집안으로 시집을 와서 해마다 명절이 오면 기분이 들뜨고 좋았다.

대전으로 이사를 하고는  더  자주  다니니 정겹다.

큰형님은 당신이 아직도 시집살이를 하시면서 당신의 두 며느리에도 한없이 주고  계신다.

시댁과  작은 집 모두 한 동네에 살고 있다.

며느리만 7명, 손주 며느리 4명 , 손자 7명,손녀 4명 (미국 3명,외손주4명은 제외)증손주 6명 ....아들들 7명, ... 모두 큰형님 집에 모였다.

손주 며느리들은   부엌에 들어 올 수도 없었다.

모두 방송으로 찜질방에서 ,목욕탕에서 시어머니의 자세에 대해서만 가르치기 때문에 형님들은 세뇌가 됐다.  당신의 며느리들을 일을 시키지 않았다. 며느리들도 차분히 잘 있었다.

음식 장만 부터 설걷이 까지 모두 큰형님과 우리 작은 엄마들이 하고 전혀 시키지를 하지 않으니 힘들 일이 전혀 없다.과일이나 깎고 식혜정도 나를 뿐이다.

 

 

 

 *우리 시댁은 설날에는 제사 상에 떡국을 올린다. 설날에는 시골집에 가지 않고 큰형님 댁에서  설을 지낸다.

아버님이  작은 아버님과 형제 뿐인데  한동네에 살고 있다.

큰집, 둘째 형님댁, 막내 동서도 다 같은 동네에 살고 있다.

큰동서 형님은 제사 지내기 일주일 전 부터 혼자 차근 차근  제사 준비를 하신다.

 우리 들은 설날 전 오후에 가서 전만 조금 부치다 오면 된다.

각자  자기들 집에 가서 자고 아침 7시 까지 큰동서 집에 가서  함께 준비 하면 된다.

" 이일을 힘들다고 하면 못하지. 내가 좀 수고하면 모두 즐겁게 보낸다고 일을 즐겁게 생각을 하며 해야 해"

어제 형님의큰 며느리가 " 어머님! 고생이 많으시지요?" 하며 미리 전화를 했을 때 그렇게 대답했다고 말했다. 참으로 덕이 있는 분이 큰동서여서  다행이다.

 

 

 절하는 손부와 일어나는 증손녀, 중구난방이나 즐겁고 재미 있는 명절 풍경.

 * 세배 받는 아버님 , 옆에 서 있는  남편은,셋째 아들이다.

어머님과 작은 아버님은  편찮으셔서 작은 어머님까지  참석을 못 하셨다.

아버님은 며느리들에게 세배돈 20,000원, 아들들에게는 10,000원을 주셨다.

손자,손녀들에게는 모두 10,000원씩을 주셨다.

큰 형님과 둘째 형님은  조카들에게 세배돈을 10,000원씩을 주셨지만 나는 신권으로 5,000원을 줬다.

" 경제적인 문제로 5,000원씩 준다" 말하고 웃으며 내가 나눠 주니까  모두 웃으며 공손히 받았다

며느리 대표로 큰 동서 형님이 아버님께 받아서 며느리들에게 나눠주고, 아들 대표로 큰 아주버님이 나눠 주셨다. 아버님은 세배 돈으로 50만원이 나갔다고 말씀하셨다.

 

 모두 박씨들만 모였다. 규정 공파 26대,27대, 28대손 ...29대는 방에 있다. 박씨 4대가 모두 모였다.

 

 *  아버님이 건배를 하기 전에 "복을 받는 사람이 되지 말고 복을 주는 사람이 되자"  라고 말씀 하셨다. 88세 미수인 아버님은  우리 들의 정신적인 지주이다.

 28대, 29대가 모인 작은 방 3살부터 고2까지 ....

 * 떡국은 가스렌지 에서 다 못끓이고 ,바닥에서도  떡국을 끓이고 ..일사 분란하게 움직였다.

  많이 편찮으셔서 못오신 작은 댁에 가서 모두 세배를 했다.

벽에 큰 손자가 작은 아버님께 드린 감사장 "최고의 할아버지, 할머니상"이 미소를 짓게 한다.

작년에  대전 성모 병원에서 위기를 겨우 넘기고 다행히 건강을 유지하고 계신 작은 아버님,내외 분이 살고 계신다. 며느리들이 모두 맞벌이고 부산, 안산에 살고 있다.

작은 집의 큰동서는 대전 근교의 보건지소에 근무하며 그 곳에 살고 있다.

 

올 해 나는 결혼 후 33년만에 명절에 서울 동생집에 남편과 큰 아들과  왔다.

큰동생은 인천에 막내 남동생은 부산에 살고 있고 친정 부모님이 계시지 않아서 모두 처가집에서 명절을 보내왔다. 부산에서 대전으로 이사를 오니 동생집에 올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대전에서 장장 8시간이 걸려서 서울 휘경동에 있는 여동생 집에 도착을 했다.

차가 막혔으나  큰아들과 남편 그리고 나는 계속 대화를 하며 왔다.

 

자상하고 다정 다감한 아들은 서울에서 있있던 일을 말해 주었다.

" 엄마 ! 나이가 드니까 여자를 보면 알겠더라구요. 결혼을 하면 편한 여자가 좋을 것 같아요."

" 너는  그 동안 연애는 했니?"

" 그럼 했지 ?"

" 그런데 엄마에게 왜 말을 안 했니?"

" 엄마에게 일일이 말하지 않기로 했어. 결혼 할 여자가 생기면 말씀 드릴께요"

 회사 이야기, 본가 이야기, 동생이야기 , 서로 도란 도란 대화를 했다..

차가 밀려서  길가의 짬뽕집에서 "굴짬뽕"을 한 그릇 씩 먹고 계속 서울로 향했다.

아들이 갑자기 엉뚱한 말을 했다.

" 엄마 ! 나는 이 다음에 대학에 장학금을 줄 정도로 성공했으면 좋겠어요"

"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해 . 자기만 잘 살기 위해서 성공하는 것은 성공의 의미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 대학에 "김성희 장학금"을 만들어야지"

나는 깜짝 놀랐다. 김성희는 내 이름이다.

" 왜 ? 네가 성공했으면 박 OO 장학금이라고 해야지.왜 엄마 이름을 붙여?"

...아들은 소리 없는 미소를 짓더니 말했다.

" 엄마가 대학교에 보내 주었으니까 엄마 이름을 붙여야지.우리 대학교는 장학금 내면 건물 벽에 기증자 이름을 새겨 준다. 엄마 이름을 새겨야지..."

 

큰 아들이 대학에 떨어졌을 때 집안의 경제가  무척 어려웠다. 그러나 나는 재수를 하겠다는 큰 아들의 말을 존중했었다. 재수는 성공적이었고 대학에 가서 정말 열심히 공부를 했다.

" 엄마 ! 엄마니까 나를 재수를 하게 해주었고 서울로 유학을 보내 준 것을 알고 있어. 내가 성공하면 엄마,아빠에게 집도 사드리고 잘 할게요. "

그런 말을 하였다.대학 졸업 전에 취업을 했던 회사도 , 적성에 맞지 않아서 그만 두고 다시 입사한  회사도 , 수석 합격을 했다.

인복이 많아서 새로 입사한 회사는 복지나 대우도 좋고 무엇보다도 상사들을 잘 만났다.

 

 큰 아들이 물질적인 것에 욕심을 크게 내지 않고, 자기가 하는 일이 적성에 맞는게 정말 다행이다.

자기 일에 성공 하면 이룰 수 있는 소박한 꿈이다.

큰 아들 또한 모교에서 7번의 장학금을 받았다. 분명히 돌려주어야 할 사랑의 빚을 지고 있다.

 

아들이 정말 잘 살아내고 성공해서 에미 이름으로 모교에 장학금을 만들 수 있는 자랑스런 선배가 되기를 소망한다.

늘 겸손하고 성실하며 무엇보다도강하기를  에미는 기도 할 뿐이다.

 

**아들도 딸 못지 않게 아기 자기하고 섬세하게 엄마를 사랑하고 있음을 알리고 싶습니다.

제가 글을 쓰는 의도는 인생을 59년을 산  가정 주부의 경험이 인생의 후배들에게 도움이 되길 바라서 쓰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