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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동갑인 박근혜를 보면 마음이 애잔해 진다.

모과 2010. 1. 14. 12:37

나는 서울 성동구 청구동의 청구 초등학교를 나왔다.

당시 청구동 중심에는 김종필 총리의 집이 있었다.

김종필의 총리의 딸도 나와 동갑이다.

 김종필씨의 딸은  청구동에 살면서도 길 하나 건너 편에 있는 장충초등학교에  다녔다.

장충동에 살고 있던 박정희 의장의 딸인 박근혜, 정일권 국무총리의 딸도 장충 초등학교에 다닌다고 들었었다. 부자 동네의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였다.

청구 초등학교 아이들은 금호동 쪽의 산동네와 청구동의 서민아이들이 다녔다.

우리 집은 김종필 씨의 집에서 좀 더 올라 가면 지금은  문화재로 지정됐다는 한옥촌에서 살았다.  약 15평 정도의 한옥으로 방 두칸, 마루 ,부엌, 마당에 수돗가 ,대문입구의 재래식 화장실이 있는 작은 한옥이었다. 어머니는 남의 집 전세 보다는 작은 집이라도 우리 집의 좋다고 그집을 사서 외할머니와 살게 했다. 나는 초등학교 5학년부터 고 1까지 이집에서 살았다.

 

 

 

내가 진명중학교에 진학했을 때 박근혜씨는 성심여중으로 진학을 했다고 들었다.물론 그녀는 나를 모르고 당시에 청와대에 살고 있었다.

아마도 경호 문제로 작은 학교면서 실력도 괜찮은 학교에 진학했다고 생각했다.

 내가 중2때 청와대를  개방을 해서 국민들에게 보여 준 적이 있었다.

효자동에 있었던 진명여중에서는 학생들을  가까이 있었던 청와대로 인솔해서 청와대를 한바퀴 돌아서 경복궁 으로 내보냈다.

우리들은 청와대에 장독대가 참 신기해 보였다.

나는 그때 박근혜를 생각했다. 참 답답하고 친구도 별로 없을 것 같았다.

신분 상승이  급격히  높아져서  어려움도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내가  이화여대에 진학을 했을 때 그녀의 소식을 신문에서 봤다.

서강대학교 전자 공학과에 진학을 했다는소식을 듣고 역시 경호 문제로 작고 실력있는 학교에 입학을 했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다녔던 성심여고와 같은 예수회 소속의 대학교이다.

그녀는 천주교인이고 세례명이 율리아나 라고 오늘 알았다.  daum의 위키백과를 보고 알았다.

* 사진 출처 : 다음 검색 에서  발췌

 

그리고 그녀를 잊고 살았다.   그  충격적인  사건이 나던 날에  나는 대학을 졸업 하기 전에 발병한 결핵성 늑막염으로 취업도 결혼도 못하고 집에서 투병중이었다.

1974년도 8월15일 일 8.15 기념식장에서 육영수여사는  조총련의 문세광에게 저격당해서 서거 했다.  앞 날이 암울했던 나는 그냥 국가적인 충격사건이라고 받아 들였다.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서  한동안 멍했던 기억이 난다.

 

 * 사진 출처: 다음 뉴스: 육영수 여사 84회 탄신제에 참석한 박근혜

 

당시 프랑스 유학중인던 23세의 박근혜는 급히 귀국했다.

육영수 여사를 싫어하는 국민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늘 한복을 입고 목련같은 자태를 보여준 지금까지 최고의 영부인으로 평가 받고 있는 분이다.

뉴스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꽃으로 장식된  영구차를 조심 조심 쓰다듬으며 눈가를 닦던 모습이 잔잔하게 떠오른다.

지어미를 보내는 남편의 모습이 소박한 모습으로 다가 왔다.

그후 박근혜는 어머니의 역할을 수행했다.

아마도 그때의 경험이  정치를 알고 배우고 하게 된  계기가 된 것같았다.

 

내가 기억하는 박정희 대통령은 새마을 운동과 고속도로와 유신반대 운동과 남영동과 남산과  억울한 사람들과  김재규와 열사와 독재와 안가와 심수봉이 기억이 난다.

훗날 심수봉의 "사랑밖엔 난  몰라 1,2편을 읽었다"

박정희 대통령 저격사건이 자세히 기록돼 있었다.

 

 그 때 나는 일년의 투병생활 중에 우연히 본 신문광고를  보고 찾아 간 경기도의 소읍의 교사로 9월부터 근무하게 됐다. 결핵성 늑막염이라도 전염이 되않는 결핵이어서  "절대안정"하라는 의사의 말을 무시하고 그냥 취업을 했다. 일년 후 재발을 해서 무척 고생을 했다.

 

* 출처: 다음 검색: 현충원의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여사의 묘지  

 

 어머니 육영수 여사가 서거하고 정확히 5년 후인 1979년 10월 26일에 아버지인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됐다. 참 여자로서 아니 남자도 겪어내기 어려운  감당하기 어려운 역경의 연속이었다.  박근혜가 28세 때 였다.

 

그때 나는 남편과 중매 결혼을 하고 경기도  OO시의 한 남중에서 교편생활을 하고 있었다. OO시에 살면서 뉴스로 그 엄청난 사건을 알게 됐다.

나는 속으로 참 운명도 기구하다 . 엄마, 아빠가 다  저렇게 돌아 가시다니! 생각했다.그때 나는 큰아들을 낳아서 두살이 됐었다. 그녀와  동갑이니  나도 28세였다.

그후 그녀는 계속 정치에 몸 담고 가끔 뉴스에서 봤다. 볼 때마다  마음이 애잔해졌다. 그냥 그랬다.

 

 

 1981년부터 부산에 28년을 살면서 박근혜에 대한 민심을 알 수가 있었다.

만약 여자가 대통령이 된다면 박근혜 뿐이라고 그들은 말했다.

대구에 살고 있던 막내 남동생(현 52세)은  열렬한 지지자였다. 대구 경북 부산 경남은 그런 사람이 많은 듯했다.

나는  먹고 살기 바빠서 정치에 관심이 없어져서  그런가 보다  했다.

 

그런데 경산에 있는 영남 대학교에 출장을 갔다. 그 아름답고 광활한 캠퍼스, 제2도서관 앞에서 학생들을 상대로 책을 파는 일을 했다.  그때 영남대학교는 박근혜가 이사장으로  있었을 때였다. 당시 허무맹랑한 루머가 돌아 다닐 때였다.

2주일을 경산에 머물면서 자연히 박근혜가 생각이 났다.

"이 좋고  넓은  캠퍼스에 교수를 하면서 학자로서 여자로서 행복하게 살면 좋았을 텐데, 왜 이런 저런 수모와 고통을 당하면서 정치를 하는걸까? 교수를 하면  사람들 기억에서 계속 머물지 않았을 텐데.... 대통령의 딸이 되서 너무가혹한 운명을 겪어야 하는 그녀가 참 안타까웠다"

동생 박지만이 엄청 가슴 아프게 하더니 이제 가정을 가지고 아들도 낳고 잘살게 되서 다행이다.

 

 

물론 평범하고 정치를 잘 모르는 그리고 문외한인 아줌마의 단순한 생각일 수도 있다.

 

  작년에 나의 본적지이자 남편의 고향 대전으로 영구이주했다.

충청도는 대한민국  중심에 있는 교통이  아주 좋고 평야가 많은 곳이다.

그래서인지 전국의 사람들이 골고루 모여 살고 있다.

충청도가 충청도 사람만이 있는 곳이 아니고 대한민국의 축소판 이라고  말하고 싶다.

충청도 사람의 속을 모르겠다는 말을 이사와서  일년을 살아보고 알게 됐다.

금산과 논산이 본래 전라도 였었고 전라도 사람들이 제일 많이 살고 있다.

전라도와 충청도가 경계선에 있기 때문이다.

모두 충청도 사투리나 표준말을 써서 고향이 어디인지 잘 모른다.

 

특히 대전은 지역색도 없고 애향심도 없다. 본래 자기 고향이 아니니 아주 객관적이다. 선거때 사람만 보고 투표를 하는 유일한 곳이기도 하다.

단 전에 김종필 씨가 대통령에 출마했을 때 그때는 달랐었다.

그후 전 국민은 경험을 했다.

우리가 평생을 존경했던 분들이 대통령이 됐어도  그리 좋은 사회가 안됐다.

 

이제 박근혜는 59세가 됐다. 이제  정치가로서 계속 가야한다.

오늘 이글을 쓰면서 daum의 검색을 통해서 위키백과를 읽었다.

박근혜는 두가지 좋은 점이 있다는 것을  읽게 됐다.

1. 말을 잘못해서 잡음이 없었다.

2, 부패와 연루된 전력이 없다.

 

23세부터 정치판에서 생활을 하고 끝없이 자기 성찰과 인내를 거듭했을 것이다. 부모로 인해서 얻는 득도 있고 커다란 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부모는 선택할 수없는 운명이지 않는가?

 

 내게 박근혜는 정치가로 보일  때보다  동갑내기 여성으로만 보일 때가 많다.

나는 정치를 모르지만 대한민국 대표  여성 정치가로서 박근혜는 부디 객관적으로 판단하고 일할 것을 바란다.

박정희 대통령으로 인해서 한이 생긴분들이  많이 있다면 박근혜가 정직하고 바른 정치로  보상해 주어야 한다.

 

여자가 더  의리있고 바른 정치를 한다는 롤모델이 됐으면 좋겠다.

남녀평등은 국회에서도 언젠가는 이루어질 것이다.

의석수도 남녀 비가 50:50이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성 정치가 들의 몫이 크다고 생각한다.

박근혜는 그 중심에 있다.

여자 대통령이 되는 것보다 존경받는 여정치가로 역사에 기록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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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한 사람이 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