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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난 자녀교육이 최고였던 엄마

모과 2010. 1. 5. 08:03

아이들이 6살 ,9살이었던 때 였다.

부산의  대연동에 있던  OO아파트는  5층 아파트로  10동이 모두  똑같이 21평이었다.300세대중에 세대주가 교사인 가구가 100세대나 됐었다.

주변에 초,중,고등학교가 엄청 많고 학군도 좋은 곳이었다.

아파트에 공부 잘한다고 소문이 난 학생들이 많았다.

혜민이(가명) 엄마는 나와 다른 동에 살고 있는 5살 더 많은 분이었다.

딸만 둘이었는데 고3, 중2였다. 둘다 공부를 무척 잘했다.

큰딸 혜림(가명)은 여고에서 전교 1등을  했고  혜림이는  여중에서 전교  20등안에 들었다.

혜민이 엄마는 경희대학교 국문과를 나온 분이었다. 늘 조용조용하고 날씬한 몸에 긴치마와  블라우스가 유행이 좀 지났지만 멋있게 입고 다녔다. 옷차림이 예전에 멋쟁이었던 표시가 많이 났다.

* 공부의 신에 출연중인 고아성양의 미소: 내용과 관계 없습니다.

 

혜림이와 혜민이가 특별히 공부를 잘해서 그 엄마를 칭찬을 하는 것은 아니다.

세상에는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도 많기 때문이다.

그엄마의 교육 방법과  생활지도가 잘 조화가 되기 때문이었다.

그엄마의  좋은 점을  보고 들은 것을 적어 보겠다.

 

1. 매일 9곡밥과  7가지 도시락 반찬을 해주었다.

 

 그때는 급식이 시행하기 전이었다. 혜민이 엄마는 9가지 곡식으로 매일 아침 밥을 해서 먹이고 도시락도 싸주었다.

도시락을 세 개를  쌌는데 밑반찬 3가지에 매일 아침 4가지 반찬을 새로해서 넣어 주었다.

매일 새벽 4시 30분에 일어 난다고 했다. 6시 40분에 고3딸이 봉고차를 타고 학교에 갔기 때문이었다.

 

2.  일층의 화단을 예전의 꽃밭같이 가꾸었다.

 

 혜민이네는 일층에 살았다. 혜민이 엄마는 아이들이 학교에 가거나 해가 떨어지면 꽃삽을 들고 화단을 가꾸었다. 우리가 어렸을 때 주택에 살때 장독대에 심었던 꽃들을 거의 다 심었다.

봉숭아, 채송화 접시꽃, 채송화, 나팔꽃, 칸나, 백일홍, 다알리아, 국화, ....누구나 지나 가다  걸음을 멈추고 화단을 들여다 볼 정도로 예뻤다.

혜민이네 작은 거실에는 쇼파가 없었고 1/3이  화분이 놓여 있었다.

정성 들여서 가꾸어서 화분의 잎새들이 반짝 반짝 윤이 났다.

 

혜민이 엄마는 6살에 부모가 이혼을 해서 새엄마 밑에서 설움을 받고 자랐다고 했다.은행 지점장이었던 아버지 때문에  경제적으로 어렵게는 살지 않았지만 아주 어렸을 때부터 "현모양처"가 되는게 꿈이었다고 했다. 

 

* 이미지 사진 :조선대학교 장미원 사진,겨울이라서 꽃밭 사진이 구하기 어려워서
 
3. 민간요법이 전문가 수준이었다.
 
아침 8시가 좀 못되서 모자를 쓰고 흰 장갑을 낀 혜민이 엄마가 아파트 뒤의 언덕에서 쑥을 캐는 모습을 자주 보았다.
봄에는  해가 중천에 오기 전에 그늘에서 쑥을 캐서 살짝 데쳐서 냉동실에 보관을 했다. 여름에는 아파트 화단에 지천으로 있는광나무의 열매를 따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  열매의 물을 달여 먹으면 눈에 좋다고 했다.
그밖에  것도 설명을 많이 들었지만 지금 기억이 나는것은 그 두 가지이다.
 
4. 부족한 과목을 적절하게 사교육을 시켰다.
 
혜민이 엄마는 방학 때마다 서울에서 귀향한 명문 대학생에게  혜민이를 과외를 시켰다. 서울에서 대학생활을 하는 언니에게  대학 생활에 대한 소식을 듣게 하고 얼마큼 공부를 하면 서울로 유학을 할 수 있는지 듣게 하기 위해서 라고 했다.
암기 과목을 공부하는 방법도 배우고 많은 대화가 과외의 목적이라고 했다.
학기 중에는 피아노 과외를 시켰다. 중학교 2학년에게 초등학교 때 못 시킨 피아노 래슨을 시키는 것이 좀 색다르게 보였다.
큰딸인 혜림이가 국어 성적이 좀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같은 아파트에 사는 시내의 입시학원 원장인 국어 강사에게 전교 10등안에 드는  학생들만 모아서 일주일에 한번 과외를 시켰다. 그 강사의 딸도 함께 공부해서 과외비는그리 비싸지 않았다.혜림이는모르는 문제가 있으면 밤12시라도 전화를 하기를 허락을 받았다.
 
5. 초등 학교까지는 전과로 엄마가 직접 가르쳤다.
 
이점은 나와 같은 점이었다. 나도  아이들이 초등학교 졸업을 할 때까지 내가 집에서 아들을 가르쳤다. 대학을 나온 엄마로서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혜민이 엄마는 국문과 출신이었으나 은행원을 했다. 그러나 전과를 보면 엄마들이 충분히 가르칠 수가 있다.
내가 자녀교육의 방법을 알려 달라고 했더니 한 번 집으로 오라고 했다.
혜민네 집으로 찾아 간 내게 한 말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 OO이 엄마는 진심으로 알고 싶어해서 말해주고 싶었어요. 학교 자모 회의에 가도 잘 차려 입은 엄마들이 누가  전교 일등을 하는 애 엄마냐고 자기들끼리 수근거리다 나를 보고는 비웃듯이 소근거리는 것을 들었어요.내가 유행에 뒤지는 옷을 입었기 때문이지요. 요즘은  아주 공부를 잘하는 애는 못사는 집 애들이라고 ...^^"
 
나는  그말을 듣고 좀 놀랐다.  나도 옷차림은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 성격이기 때문이다.
" 어머 ! 그런 말도 해요?"
내가 진심으로 알고 싶어하자  웃으며 말해주었다.
 
"내가 뭐라고 말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거려도 더 어리숙한 표정으로 가만히 있다가 와요. 공부를 잘한다면 무슨 코투리를 잡아서 애를 헐뜯으려고 하는 것을 많이 겪어서요"
 
아파트에서도 엄마들이 모두 밖에 나와서 아파트 화단이나 그늘에서 학교에서 돌아 오는 아이들을 기다리며 수다들을 떨게 마련이었다.
대체적으로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이 누구인가 하고 자기 애가 똑똑한 것을 간접적으로 자랑들을 하기 일수였다.
 
초등학교 때 공부 좀 하는 학생 엄마치고 자기 아이가 국립 서울 대학교에 입학하는 꿈을 꾸지 않은 엄마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자기 애가 서울 대학을 못들어 가고 나중에 말들을 하는 것을 들어 보면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은 어딘가 성격에 결함이 있는 듯이 말하기도 자주한다.
 
6. 예능 교육을 골고루 시켰다.
 
대연동은 학군이 좋다. 부경대학교와  경성대학교도 가까이 있고 못골 시장 쪽으로 쪽으로 가면 입시 전문 미술학원도 여러 곳이 있다.
우리는 혜민이 엄마의 소개로 아이들을  입시 위주의 미술학원에 6개월을 보냈다.
그때 배운 미술실력으로 대회에서 상들도 많이 받아 왔다.
서예 학원도 6개월이상 시켰다.
학과는 집에서 예습,복습을 시키고 예능을 시켰던 그 기간이 잘한 것같다.
큰 아들은 피아노를 6학년까지 배웠다. 본인이 계속 가고 싶어해서 보냈다.
막내는 6개월을배우고  하기 싫어 해서 그만두었다
그대신 태권도 학원을 2년정도 다녔다.
 
7. 혜림이와 혜민이의 입시 결과
 
혜림이는 수능도 잘보고 그당시 선풍적으로 인기가 있었던 서울대학교 "고분자 공학과"에 합격을 했다.
수능 성적분포도를 보니 전국 100등 안에 드는 성적이었다.
혜림이가 합격을  하고 혜림이 아빠가 명예 퇴직을 해서 모두 서울로 이사를 갔다.
"호사다마"라고 말하며 혜림이 엄마는 이사를 갔다.
 나와 같은 아파트에 살던 대학 동창이  혜민 내 보다 먼저 서울 명일동으로 이사를 갔었다.
혜림이네도 명일동으로 이사를 가서 친구의 딸과 혜민이가 같은 여고에서 만났다.
중2 때 피아노를 시작했던 혜민이는 연세 대학교 작곡과에 입학을 했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다.
 큰 딸 혜림이는 서울대학교에 입학을 하니 밤을 새고 공부하는 남학생들에게 체력적으로 힘에 딸리고 적성도 맞지 않아서 다시 입시 공부를  했다.
CC로 만난 남학생이 의과 대학생이고 집안이 모두 의사 집안이라서 자격을 갖추려고  서울대학교 의과 대학교를 다시 입학을 했다.
혜림이 엄마는 어느 여고 앞에서 화방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끝이다.
나의 대학동창이 제주도로 영구 이주를 했기 때문이다.
 
** 혜민이 엄마가 자식을 키우면서 제일 미안하고 가슴이 아팠던 일은 초등학교 6학년까지 집이 어려워서 책상을 못 사주고 밥상을 펴고 공부를 하게 한 점이라고 했다.
 
혜민이 엄마는 자신의 꿈이었던  현모양처의 생활을 실현한 좋은 엄마였다.
내가 읽었던 교육서의 그 어떤 엄마보다 훌륭한 엄마로 기억이 된다.
그분도 이제 64세가 됐을 것이다.
현모양처도 여성들이 꾸는 큰 꿈이 될 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