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도 출신의 무드라고는 꽝인 남편을 만나서 살아 온지가 어느새 33년이다 돼간다..
시댁은 남녀 평등이었던 친정과 정반대로 남존여비 사상의 잔재가 많이 남아 있는 전형적인 충청도 집안이다. 99세까지 장수하신 시할아버지께서 농사로 집안을 일으킨 전형적인 농부의 집안이었다.
중,고등학교 수학 교사였던 아버님이 전근을 자주 다녀서 7남매의 넷째인 남편은 초등학교는 시골집에서 마을 입구의 수덕 초등학교를 다녔다.
그때 작은 아버님이 수덕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을 해서 작은 집의 사촌 형제들과 함께 살았다. 8살인 남편과 3살 아래 남동생은 5살이었다.
학교에 갈 때도 동생을 데리고 가서 옆자리에 앉혀 놓고 공부를 했다.
큰 아주버님과 들째 아주버님은 중 고등학교에 다녀야 하므로 아버님의 부임지로 따라 다녔다.남편 형제들은 모두 조용하고 착했으며 성실하고 예의바른 효자이다.
남편은 4년동안이나 주말마다 부산서 대전에 사시는 아버님을 모시고 시골집을 다녔다.아버님의 지휘 아래 가서 부터 올 때까지 일을 하고 돌아왔다.
말도 없이 그냥 묵묵히 일을 하고 식사 때가 되면 막걸리 한 잔을 마셨을 뿐이다. 시골 집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덕산 온천에도 같이 간 것이 10번도 안된다.
내가 결혼한 후 단 한 번도 가족끼리 단체 여행을 간 적이 없었다.
모두 착하고 조용하기만 했지 즐길 줄을 몰랐다.
그러나 제사나 명절, 생신 때는 모두 모였기 때문에 자주 만나는 편이었다.
시골집에 못가는 형제들도 그때는 큰형님 집에 모였다.
아버님은 형제 간에 모일 기회를 마련하고 싶으셔서 15년 간이나 비워 두었던 시골집을 고치기 시작했다.토요일에 들어 갔다 일요일에 대전으로 돌아 오면 아버님은 저녁 식사를 식당에서 내셨다. 시골집에 못간 자식들을 위해서였다.
그리고 자식들이 돌아 가면서 식대를 내기를 소망하셨다.
그러나 성장기를 다 함께 지내 본 적이 없는 형제들은 잘 어울릴줄을 몰랐다.
만나도 필요한 말만 하고 모두 조용했다.
나는 신혼 초에 시댁에 가면 숨막혀서 죽는 줄 알았다.
대전의 OO 동에 아버님 ,작은 아버지, 큰 아주버님, 둘째 아주버님, 막내 서방님이 모두 근거리에 살고 있다.
올해 처음으로 작은집 큰 서방님이 남편에게 전화로 형제들끼리 모여서 망년회를 하자고 했다. 회비는 50,000원씩이었다.
남편이 모두 연락을 해서 6쌍의 부부가 모였다.
큰형님, 둘째 형님, 우리, 큰시누이형님, 막내 시누이, 작은 집 큰서방님 ..부부가 모두 12명이었다.
돼지 갈비집에서 모두 저녁을 함께 먹고 근처의 노래방으로 갔다.
** 노래 방안에서 오른쪽에 박수치는 남편 박씨 아저씨이다.
아 ! 웃겨서 죽는 줄 알았다.
노래 방에 가자 큰 아주버님이 "산토끼"를 부르겠다고 했다.
모두 노래방 책에 없다고 하자 무반주로 "산토끼"를 가요식으로 불렀다.
형제들의 나이는 평균 59.6세 였다.
안산 시누이형님 아주버님이 "똑똑한 여자"를 불렀다.
"전국 노래 자랑"에 나가도 될 실력이었다. 기가 막히게 노래를 불렀다.
둘째 형님이 "오동동 타령'를 구성지게 불렀다. 성악과 출신이라서 노래 실력이 대단했다. 작은 집 큰동서는 두 주먹을 쥐고 동동동 뛰어 다녔다.
그후에 네 박자, 돌아 와요 부산항에, 하숙생, 편지, 사랑으로 , 아침이슬, 잘있어요 잘가세요. ........ 중간에 트위스트들을 추고 흥이 많은 둘째 형님은 아주버님을 붙들고 부르스를 추고 ,,,대체적으로 매우 유쾌하고 즐거운 시간이 2시간이 흘렀다.
남편이 갑자기 나를 붙잡고 마이크를주었다.
최진희의 "사랑의 미로'를 남편과 합창을 했다.
노사연의 "만남"을 모두 합창하고 그날의 회식을 마쳤다.
'며칠있으면 59살인데 노래방에 3번 째 왔어요"
내가 큰아주버님에게 말했다.
"나는 낼 모레가 70살인데 노래방에 3번 왔어요" 아주버님이 대답했다.
큰아주버님은 교육청에 근무하시다가 정년퇴직을 했다.
노래 하던 중간에 "옹달샘"을 부른 사람도 큰 아주버님이었다.
아주 기분좋은 모임이고 몇번을 고개들을 숙이며 잘가라고 인사를 했다.
남편이 그날 아버님을 모시고 가지 않았고 안산에서 온 큰시누이형님 내외 분과 함께 다음날 점심 식사 대접을 하고 싶어 했다.
그런데 다음날 둘째 아주버님이 시댁에 전화를 해서 점심을 내시겠다고 했다.내가 결혼한 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무슨 공식적인 날이 아니고 밥을 사는 일은 처음이었다.
금산 가는 국도에 있는 추부마을에 있는 유명한 추어탕집에서 다시 모였다.
모두 13명이었다.
* 마을에 추어탕집이 모여 있었다. 상위에 미꾸라지튀김은 한접시에 30,000원이었다. 추어탕은 한그릇에 7,000원,오른쪽 골덴콤비를 입은 사람이 남편 박씨 아저씨이다.
* 진국인 추어탕은 맛이 있었다.
* 일요일 낮 12시 ,신발장이 다차서 그냥 벗어 놓은 신발들이다. 가족들이 단체로 외식을 하러 많이들 왔다.
결혼 생활들을 모두 30년이상씩 해보니 모두가 비슷비슷한 기쁨과 상처들을 가지고 살아 가는 것을 알게 됐다.
자식들의 성적이나 직장문제, 결혼등도 모두 겪으면서 형님들은 많이 변했다.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의 형제나 평범한 공무원이나 사업에 실패한 우리 집이나 30년이 넘는 세월을 함께 하면서 형제들을 경쟁자로 생각했던 젊은 날들이 어리석었음을 서로 깨달았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살았다.
욕심을 버리고 남과 비교하지 않고 성실하게 앞만 보고 살면 하늘이 도와 준다고 믿고 살았다. 세월은 나를 배반하지 않았다..
두아들도 온순하게 자랐고 부모를 끔찍하게 아는 아빠를 닮아서 우리에게 잘하고 있다.
한 때는 사는게 너무 힘들어서 도와 주지 않는 형제를 원망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인생을 잘못 경영해서 못살게 된 우리가 더 잘못이 많은 것을 깨달았다. 우리가 사업에 실패를 하지 않았다면 남의 도움 따위는 바라지 않앗을 것이다. 쓰나미 같이 불행과 고난이 휩쓸고 갔지만 우리 가족은 잘 극복하고
이제 형제들과 웃으며 만날 수 있어서 좋다.
앞으로 일년에 두 번 정도 형제들 부부가 만나서 식사를 하기로 약속을 했다.
정말 33년만에 "다함께 차차차 "즐거운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