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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들에게 샐프 교육을 시킨 이유

모과 2009. 12. 29. 09:16

 며칠 전 외출하고 돌아오니 막내 아들이 비빔국수를 해서 남편과 먹고 있었다.

" 엄마도 좀 잡수세요" 하며 그릇에 담아 주었다.

골뱅이와 김치를 채설어서 고추장으로  만든 양념이 맛있었다.

" 와~ 맛있다. 그런데 좀 맵지 않니?"

" 좀 맵지? 그럼 국수를 좀 더 삶아서 넣을까?"

하더니  막내는  얼른 일어나서 국수를 삶았다.

" 국수는 엄마보다 내가 잘 삶지?"

" 그래. 나는 국수를 잘 못 삶겠더라. 막둥이가 하면 참 맛있어. 라면도 그렇고 . 뭐든지 잘하는 사람이 해야지"

 내가 말하면서 웃었더니 모두 웃었다.

 

15년정도 집안에서 샐프교육을 시킨 결과가 잘 나타나는 사례이다.

우리 집은 누구든지 먼저 들어 온 사람이 세탁기를 돌린다.

바지의 다림질은 하사관으로 제대한 남편과 병장 제대한 아들들이 더 잘한다. 남자들이 다림질은 주로 한다.

모두 밤늦게 집에 오는 직업을 가진  것이 이유이다.

 

 

나는 친정 부모님에게 여성우대 교육을 받고 자랐다.

신의주가 고향인 아버지와 강원도 원주가 고향인 어머니는 맏딸인 나에게 많은 사랑을 주셨다.내 밑으로 연년생인 여동생과 남동생을 두 명이 있다.

자라면서 남녀 차별을 받지 않았고  남동생들도 큰누나 말을 잘 들었다.

이런 환경때문에 나는 남녀가 동등하다고 생각하고 살았다.

내 나이로서는 좀 독특한 교육을 받고 자란 셈이다.

 

충청도 남편과 결혼을 했는데 시어머니께서 퇴행성 관절염으로 오래 투병하셔서인지 남자들이 집안 일을 잘 도와주는 습관이  있었다.

시댁에서도 남자가 여자를 도와주는 것이 당연시 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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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라마 수상한 삼형제: 아들만 3형제인 집안 [내용과는 관계 없습니다]

 

교편생활을 하던 나는   막내 아들을 갖고 사직서를 냈다.

임신이 되는 순간부터 입덧을 하는 특이 체질에다 마침 남편이 부산에 부임하게 되서 전업 주부가 됐다.

큰 아들이 3살이었다. 그때부터 13년간 전업주부를 하면서 오직 아이들 교육에 전념을 했다. 아이들의 생활교육과 학과 교육을 위해서 수 많은 책들을 읽은 기간이기도 했다.

그동안에는 내가 집안일을 모두 했다. 그게 또 당연한 일이었다.

 

남편이 갑자기 사직을 하게 되고 생각지도 않았던 사업을 하게 됐다.

갑자기 주말 부부가 됐다.남편이 하는 일은 미래가 불투명해서 불안했다.

평소 책을 좋아 하던 나는 당시에 성수기였던 "책대여점"을 내가 살고 있던  신도시에 냈다.비디오는 취급하지 않고 책만 대여 해주었고 동화책은 초등학생을 위해서 , 에세이종류는 내가 읽기 위해서 많이 구비해 두었다.

 

아이들이 고1, 중1 이었다.

 나는 아침 11시부터 밤 12시 까지 주로 혼자서 상점 안에 있었다.

집에 돌아 오면 설걷이 부터 빨래를 해야하고 , 내일 도시락 반찬도 준비해야 했다.

집안일을 마치면 새벽2시가 다 됐다. 다음날 새벽 6시에 일어나서 도시락 3개를 싸서 학교를 보내고 잠시 눈을 부치고 다시 상점에 나가야 했다.

직업의 특성상 주말에도 쉬지 못했다.

아이들은 나보다  1~3시간 정도 일찍 집에 왔다. 일찍 와서는 주로  T V를 시청하고 있었다.  고1이었던 큰 아들은  집에 오면 좀 쉬고 새벽 1시까지 공부를 했다.

 

남자 아이들이라서 안 해 본 일을 스스로 하지는 않았다.

이대로 나혼자 모든 일을 해서는 안되겠다는 판단이 섰다.

두 아들을 앞에 앉혀 놓고 조용조용 말했다.

" 엄마가  혼자 가게 일과 집안 일을 다 하려니 몸이 너무 힘이 든다. 그리고 세탁기를 늦게 돌리면  아파트에서 민폐를 끼치니까 이제 부터 너희 들이 좀 도와 주어야겠다."

두  아들들은  갑자기 미안해진 얼굴로  변했다. 안해 본 일은 미처 깨닫지 못한 것에 대한 부끄러움이 보였다. 두 아들 모두 알았다고 했다.

 

" 학교에서 돌아 오면 도시락을 설걷이통 안의 물속에 담궈 놓고 , 먼저 온 사람이 세탁기를 돌려서 끝나면 줄에 널어놔라. 그리고 하복 교복은 샤워 하면서 세수 비누로 세면대에서 빨아서 한 두번 탁탁 털어서 줄에 널어라.교복바지는 너희들이 다려서 입어라"

 

두 아들은 모두 알겠다고 했다. 처음에는 여러 번 잊고  안해 놨다.

몇번 짜증을 동반한 화를 내고 다시 아이들을 불러 앉히고  말했다.

 

" 엄마가 지금이 육체적으로 제일 힘이 든다. 너희들은 남자이고 엄마보다는 덜힘들잖아. 가족중에서 한 사람은 힘이 들어서 죽을 지경인데 ,너희들은 누워서  T V를 보면서 쉬고 있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물론 학교에서 하루종일 공부를 하고 온 것도 알고 있다. 그것은 너희들 미래를 위해서 하는 일이다. 앞으로 남자가 집안일을 하지 않으면 살기 힘든 시대가 온다고 엄마는 보고 있다.그리고 엄마에게 나중에 효도 한다는 생각은 하지 말아라 . 지금 힘든 엄마를 보고도 안도와주는데 이다음이 무슨 소용이냐? 지금 힘든 나를 도와 주는게 바로 효도이다. 이다음에  어른이 되면 바뻐서 엄마를 찾아 다닐 시간이 어디있니? 지금부터 습관이 돼야 한다"

 

길게 타일렀더니 그 다음부터 두 아이가  모두 집안 일을 잘하고 있다.

그것은 고3 때도 마찬 가지였다. 고3이라고 24시간 다 공부를 하는 것도 아니고 그 정도 시간은 일해도 된다고 생각해서 시켰다.

고3이었던 큰 아들은 엄마가 고생하는 것이 안스러워서  집안 일도 조금 도와 주었지만 고2 때까지 주말이면 가게도 봐주었다. 중1였던 막내 아들도 마찬 가지였다.

 

두 아이들이 중,고등 학교 다닐 때 집안이 기울어서 육체적,경제적으로 힘들었던 시기였다. 그러나 가족이라는 사랑의 힘으로 우리는 똘똘 뭉쳐서 잘 극복했다.

가족중에서 한 사람이 힘이 들때 나머지 가족들이 힘을 합쳐서 도와 주는 것도 그 때 생긴 습관이었다. 객지에서 대학교를 다니던  두 아들들은 좋은 음식을 먹으면 부모를 기억했다가 만나면 꼭 안내 해주기도 했다.

 

우리 가족은 서로의 뒤에 세 명의 부모 형제가 바위처럼 든든히 버티고 있는 것을 믿고 있다. 서로 떨어져 있어도 가족의 사랑과 배려를 기억하고 열심히 성실히 일하고 있다. 십여년을 계속 사업 실패를 했던 남편은 이제 자기일을 찾았고 열심히 일하고 있다. 가족에게 헌신적으로 봉사하고 있다.

 우리는 모두 가족에게 기쁜 소식을 전해 주려고 노력들을 하면서 살고 있다.

 

나는 그때 아들들에게 샐프교육을 시킨 것은 탁월한 결정이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 교육의 가장 장점은 어느 곳에 가도 남을 둘러보고 배려 할 줄 알게 됐다는 것이다.

직장에서 동료 여사원에게 커피를 타주는 것도 아주 자연스럽게 하고 있다.

앞으로 결혼을 해도 아내와 가사를 분담해서 잘 살 것을 믿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