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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저는 자유인이 되고 싶어요.

모과 2009. 7. 13. 18:50

이틀 째 두 아이가 연락도 없이 결석을 하고  있다.

전화도 없어서 가까이 살고 있는 학생에게 가보라고 했더니 학교에 간다고 하고 나가서 돌아 오지 않는다고  소식만 가져왔다.

 

조금 일찍 학교를 나와서 가정방문을 갔다.

희숙(가명)이는  학교가 있는 읍에서  버스로 20분 거리의 농촌에 살고 있었다.

담임의 갑작스런 방문에 속치마 바람으로 누워 있다가 일어 났다.

선생님이 왔으면 급하게 옷을 입는게 상식인데 속치마 바람으로 그냥 앉아있었다.

희숙이 할머니는 담임 선생님이 왔다고 동네 가게로 뛰어 가서  사이다와 과자를 사오셨다.

밥공기에 미지근한 사이다를 가득 따라주시며 고개를 조아리는 할머니의 모습이 무척 낯설고 송구스러웠다.

"희숙아! 옷좀 바로 입어라 . 고 2면 다큰 처녀인데 속치마 바람으로 있으면 보기 좋지 않잖니?"

희숙이는 수줍게 웃으며 부라우스를 찾아서 입었다.

아버지는 일찍 돌아 가시고 엄마는 개가를 해서 할머니하고 살고 있었다.

얼굴 표정에는 의욕이라고는 찾아 볼 수가 없는 무표정을 하고 있었다.

다음날 꼭 학교에 온다는 약속을 받아내고 돌아 왔다.

 

미진이는 읍에서 가까운 기지촌에서 학교에 다녔다.

가정방문을 가니 온몸이 멍으로 시퍼렇게 돼 있었다. 아버지는 전직 경찰관 출신이며 클럽에서 양공주와 미군을 상대로 사진을 찍어주는 사진사였다.

아빠에게 쇠파이프로 맞아서 온몸이 멍이 들어있었다.

화가 나면 술을 먹고  가족들을  때리면서 스트레스를 푸는 아버지였다.

미진이는 눈가에 눈물이 맺히면서도 26살 담임인 내게  다음날 학교에 꼭 오겠다고 약속을 했다.

 

미진이도 속치마 바람으로 누워 있었다.

아버지가 또 가출을 할 까봐 옷을 숨겨뒀다고 했다.

어머니도 아버지의 매가 무서워서 도망을 갔다고  했다.

하숙집으로 돌아 오면서 나와 8살 차이인 내 막내 동생과 같은 나이의 그아이들에게 담임으로서 무엇을 해줄수 있을까 생각이 들면서 가슴이 먹먹해졌다.

 

 * 울 학교 이티에서 박보영의 밝은 모습과 뒷자리의 어두운 표정의 문채원의 모습.[이미지:다음 영화]

 

 다음날 두 아이가  다 등교했다.

불러서 다시 한번 가출의 이유를 물었다.

희숙이가 대답을 했다.

 

"선생님! 저는 자유인이고 싶어요.  그냥  바다가 보고 싶어서 수진이하고 부산행 기차를 탔어요. 부산에 가서 해운대 바다도 보고 유람선을 타고 태종대도 구경하고 부산시내를 구경하다가 야간열차를 타고 새벽에 도착했어요 저는 제가 하고 싶은 데로 하고 살고 싶어요"

 

" 부산에 가고 싶었던 것은 내가 이해를 한다. 바다가 보고 싶었던 것도 이해를 하고 그렇지만 학생이니까 다음에 방학 때 부모님 허락을 받고 가면 좋았잖아"

 

" 허락도 해주지도 않을 거고 . 저는 학교에 다니기가 싫어요. 선생님들이 제가 책을 잘 챙겨오면 "네가 웬일이니? 하고 안가지고 오면 "네가 역시 그렇지"하세요."

수진이도 같은  내용이었다.

 

" 내가 솔직하게 말하마. 학교에서는 너희들이 1학년 때부터 속을 썩였다고 퇴학을 시키라고 한다. 내가 여고로 전임을 오자마자 맡은 아이들인데 나는 너희들이 나와 함께 공부했으면 좋겠다. 학교를 그만 두면 [자유인]이 될 것 같니 ? 내가 징계위원회에 가서 너희들은 내가 책임진다고 말씀드릴려면 너희들과 약속을 해야 한다. 학교 빠지지 않고 계속 잘 다니겠다고 약속하자."

두 아이다 대답이 없었다.

내가 계속 타이르자 작은 목소리로 둘 다  [예]하고 답했다

나는 두 아이가 쉽게 약속을 못하는 이유를 알고 있다.

나도 고 1말 때 선생님과 공부를 열심히 하겠다고 힘들게 약속한 일이 있기 때문이다.

 

"이제 부터 나는 너희 둘의 말을 믿을 것이다. 누가 뭐라든지 너희들은 규칙을 잘 지키고 학교에 잘 나오너라. 나는 너희 둘에게 교사 생명을 걸겠다. 너희들이 학교 그만 두면 나도 퇴직 할 거다"

두 아이의 문제는 잦은 무단 결석이었다.

무단 결석 3일이면 퇴학이라는 학칙이 있었다.

 

 40대의 여자  학생 과장은  흥분도 하지 않고 조용히 말했다.

 

" 둘 다 퇴학 처리해요. 일학년 때도 자주 그래서 또 한번 그러면 퇴학 시킨다고 다짐을 받고 진급을 시켰는데..선생이 순진해 보이니까 아이들이 선생을 가지고 놀라고 하는 것 같아요"

 

"과장님! 제가 한번 잘 지도 해 볼께요. 집에 가보니 마음을 붙일데가 없는 것같아요. 제게 한번만 맡겨주세요"

 

징계위원회에는 교감,학생과장,그리고 학생과 교사들과 담임인 내가 참석을 했다.

대부분 [퇴학]을 시키자는 분위기였지만 담임이 책임을 진다고 하면 선처를 해주곤 했던 기억이 나서 선처를 강하게 부탁드렸다.

 

"이 학생들을 학교에서 퇴학을 하면 사회에 나가서 더 나쁜 일이 생길 것 입니다.

앞으로 인생을 살아 가는데 고등학교 졸업장은 있어야 하고, 제가 계속 지도해서 말썽을 일으키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결국 7일간의 유기 정학으로 매일 등교해서 학생과에서 반성문을 쓰고 교무실 청소를 하는 것으로 결정이 났다.

 

* 울 학교 이티 이미지 사진에서 검색: 행복한 여고생들의 모습.

 

나는 두 학생을 교단 앞 에 나란히 앉혔다.

매일 눈인사를 하고 따뜻한 미소를 보내고 학급 학생들에게도 함께 하도록 부탁을 했다.

그 때(1977년도) 만해도 왕따라는 말이 없었고 내가 근무하던 곳은 경기도의 소읍 소재지에 있었다.

한 울타리에 남중,남고,여중,여고가 같이 있는 사립학교였는데 남중에서 3년간 근무하다가 여고 교장으로 전임가시는 교장 선생님께 부탁드려서 자청해서 따라 간 여고에서  2학년 담임을 하면서 있었던 일이다.

 

나는 그 때 학교 앞에서 하숙을 하고 있었다.

읍내에 사는 학생들과 등교 전에 모여서 학교 뒷산을 오르며 운동을 하고 집에 돌아와서 식사를 하고 등교했다.60명학생 중에 15명정도 나왔었다.

나는 늘 수업시간보다 한시간 먼저 등교해서 맨 앞자리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학생들도 일찍 등교하기 시작했다.

저녁을 먹고 학교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었다.

 

1번부터 칠판에 좋아 하는 시를 매일 한가지씩 써놓으라고 했다.

종례 시간까지 외워야 했다.

학생들은 모두 다 잘 외웠다.

일 년동안에 약 200편의 시를 외울 수 있었다.

 

가을에는 우리 반 만의 시화전을 했다.

등교하는 길 양옆에 쭉 늘어선 플라타나스 나무에 작품을 걸어 전시했다.

모두 의무적으로 참석을 했다. 담임인 나도 시를 한 편 제출했다.

미술반 아이들이 밤을 새고 제출한 시를 쓰고 그림을 그렸다.

비가 오면 아이들이 모두 뛰어 나가  작품을 싸안고 들어 왔다.

남학교 학생들도 구경을 왔다.

 

나는 아이들에게 추억을 만들어 주고 싶었었다.

우리반은 다른 반보다 평균 5점이 높은  반성적 차이로  늘 일등을 했다.

 

나의 8년의 교사 생활중에 제일 보람이 있었던 일이 가을 운동회 때 나타났다.

남녀 중,고등학교가 같은 날 운동회를 해서 많이 화려하고 바쁜 날이었다.

점심 시간에 희숙이와 수진이가  웬 보자기를 들고 뛰어 왔다.

 

"선생님~."

 

아주 수줍고 겸손한 표정으로 두손으로 공손히 보따리를  내밀었다.

뒤에 희숙이 할머니가 웃으시며 서 계셨다.

 

"두 아이가 꼭 선생님에게 드리고 싶다고 해서 절편을 좀 해왔어요. 선생님 고맙습니다."

 

 나는 그 해 한 해만 여고생들을 가르쳤다.

근무하던 학교 교장선생님의 중매로 남편과 결혼해서 그 학교를 떠나게 됐다.

 

마지막 날 고속 버스 속까지 간식을 사가지고 온  수 십명의 우리 반 여학생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 까?

지금은 50살의 아주머니로 나와 비슷하게 나이들어 가고 있을 텐데....

 

자유인이고 싶었던 희숙이와 수진이가 제일 기억에 남는 제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