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 너무 심하다.
자기 고향으로 이사를 왔다고 얼굴도 생기가 돌고 신이나서 돌아 다닌다.
마누라는 이사 오자 마자 고달픈 인생의 여정의 끝자락을 놓은 듯 죽도록 아팠는데,.
매주 아버님 모시고 시골집에 가서 줄 장미도 심고, 마당의 풀도 뽑고 나서 덕산 막걸리를 먹고 알딸딸해서 사랑방에서 코를 골고 자고 온다.
시골집 근처에서 살고 계신 시고모님들도 오셔서 모두 밀양 박씨들끼리 띵가띵가 흥이 나서 단체로 물김치를 담궈서 내게도 두통을 보내주었다.
홍성에 사시는 고모님은 내가 좋아서 줄창 김치를 담궈 주시겠다고 했다.
발목 아킬레스건 염증은 이사 오기 전부터 9개월을 치료 받아도 완쾌가 되지 않는다.
체중감량이 우선인데 발목이 아프니 운동을 할 수가 없다.
병원에서 물리치료를 받고 오면 방안에 찌그러져 누워 있거나, 블러그에 글을 쓰는 것이 전부이다.
31년을 다닌 도시지만 동네 이름이 모두 생소하고 아는 사람도 없고 완전히 외톨이 신세가 됐다.
이번주에는 고등학교 동기동창 7명이 실로 40여년 만에 만나서 옛추억을 하며 동심으로 돌아 갔다.
모인 곳은 시골본가, 회비 5만원 ....서울에서 두 명, 아산에서 한 명,대전에서 네명 이 예산 시골집이 있는 동네 어귀의 [수덕 초등학교]에서 만나기로 했단다.
* 사골집으로 들어 가는 길목
* 사랑방에서 본 신작로, 차가 다니는 것이 다 보인다.
* 이곳에 평상을 깔고 [덕산막걸리]와 [삽겹살]을 먹으며 40년전의 추억 여행을 떠났던 남편 친구 할아버지들..* 한 친구가 메일로 보낸 사진은 너무 얼굴이 빨개져서 못올립니다.
* 수돗가에서 생수도 받아오고 설걷이도 합니다.
* 가마솥이 달여 있는 사랑방 마루밑에 쌓여 있는 장작으로 불을 때고 황토방에서잠을 자면 몸이 개운하다.
남편친구 7명이 모두 함께자고 하모니카로 동요도 부르고, 고스톱도 치고 재미 있게 놀았다.
* 130년 된 안채 제비가 해마다 찾아와서 집을 짓는다. 마을 어귀의 수덕초등학교를 5학년 때부터 졸업 할 때까지 다녀서 초등학교 동창회에도 참석했다.
17살 미소년(?) 들이 60의 할아버지들이 되서 하모니카를 불면서 동요를 불렀단다.
[나의 살던 고향은 ],[해는 져서 어두운데],[뜸북뜸북 뜸북새].....마당에 평상을 펴고 돼지고기에 묵은지를 싸서 먹으며 덕산 막걸리 잔을 부딪치며....그 옛날 어머니께서가마솥에 해주시던 밥을 생각도 하고 추억에 잠겨서 밤12시까지 신나게 놀았단다.
시골 수재들인 남편의 친구들은 대전의 명문고를 졸업을 해서인지 모두 작은 성공을 거둔 편이다.
대기업을 퇴직한 두명, 대덕 연구단지에 한명, 은행지점장으로 퇴직을 한 친구, 중소기업을 하는 친구, 공기업 한명, 그리고 남편이다.
오직 과거의 추억을 말했을 뿐,가족에 대해서 묻지도 알고 싶어 하지 않았다고 했다.
큰방에 대가족 단체 사진이 붙어 있었는데 남편은 우리 애들이 뒤에 서 있는 애들이라고 말하지 않았다고 했다.
각자 40년의 추 억을 되새기는 시간이었다.
모두 추억을 되새기고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마누라는 아픈 발목을 참으며 서점에서 책을 열심히 팔고 있었다.
그날 밤 발목은 다시 탁구공 반쪽을 붙여 놓은 것 같이 부었다.
마누라는 집에 와서 발목에 진통제를 바르고 찌그러져서 잤다.
남편이라도 힘들었던 과거를 잊고 밝은 생활을 해서 다행이라고 진심으로 생각하면서 찌그러져서 잤다.
대전으로 오니 어머님이나 동서들이 나보다 모두 더 아프거나 대수술을 받아서 발목 아픈 것은 명함도 내밀지 못하겠다.
와~
전화 한통 하는 사람도 없고 나도 가뵙지 못하니 전화도 자주 못하겠다.
남편의 고향이라서 자주 다녔으나 낯선 곳이 많은 도시이다.
60이 다 되서 또 타향으로 왔으니 어디를 가나 외톨이 신세가 됐다.
친구들은 모두 서울에 있으나 30년이 넘는 세월을 보내고 나니 남편처럼 세월을 떠나서 만나게 되지 않는다.
고등학교 동창을 만나더니 다음 주는 수덕초등학교 동창 12명이 (여자 포함) 모여서 또 띵가띵가 놀고 왔다.
좀 양심에 걸리는지 자세히는 말하지 않았다.
덕산막걸리를 먹으며 너무 오랜 세월이지나서 (47년) 다들 기억이 나지 않드라고 말했다.
그 분들은 일년에 몇번 만나 왔는데 한 사람이 남편이 시골집을 다니면서 아저씨뻘인 분이 동창이라서 연락이 됐다.
요즈음 남편은 자기가 성장한 도시에 돌아 와서 부모님과 형제들과 자주만나며 표정이 많이 밝아졌다.
걷는 것도 자신이 보였다.
그런 남편을 보는 나도 마음이 편하다.
남편과 함께 여생을 마감 할 때까지 살아 갈 도시라서 그런지 정이 먼저 들고 있다.
두 아들이 결혼을 하면 이제 둘이 오붓이 남아서 오손도손 정겹게 살아가야 하는 곳이
다.
든든한 내편이라도 친구들을 만나서 행복했으면 됐다.
이제 나도 몸이 아프다고 한쪽에 찌그러져 자지 말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나하나 하면서 살 것이다.
찌그러져 있다고 남편이 알아주나,아들들이 알아주나, 나만 더 쓸쓸하겠지.
건강해서 여기저기 대전시를 동네마다 싸돌아 다니며 내가 인사를 하고 다녀야겠다.
인터넷 검색해서 가고 싶은 곳을 다 다녀보고 ,5일장도 가보고 근교도시도 가보고 ...
대전시가 나를 자연스레 받아 들여 주도록 노력할 것이다.
나 스스로를 행복하게 해주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