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마, 그 아주머니의 사진을 올릴 수가 없다.
그 아주머니를 처음 본 것은 아파트의 월요장이 있던 날이었다.
매일 가는 정형외과의 계단 밑, 일층 입구에 농사를 진 야채를 조금씩 펴놓고 앉아 있던 서 너명의 아주머니들 눈에 띄게 왜소한 모습의 아주머니가 보였다.
처음에는 난장이인줄 알았는데 키가 너무 작아서 그렇게 보인 것이다.
두손이 안쪽으로 오그러들어서 굳어 있는 모습이 보는 사람이 더 불편했다.
작은 두 발도 안 쪽으로 오그러 들어서 휘어져 굳어 있었다.
그 녀의 앞자리에는 직접 농사를 진 꽈리꼬추, 가지,파,상추, 풋고추, 강남콩들이 조금씩 놓여 있었다.
멸치볶음에 넣으려고 꽈리 고추를 2,000원어치를 달라고 했다.
불편한 손으로 비닐봉투에 꽈리 고추를 넣는 시간은 좀 길게 느껴졌다.
덤을 더 주려고 두 손으로 꽈리 고추를 더 집어서 넣었다.
"이모! 그만 줘요. 장사는 남으려고 하는 건데 그렇게 많이 줘서 남겠어요?"
우리는 마주 보고 웃었다.
* 채소 가꾸기 사진은 블러그 이웃 [사노라면님]의 블러그에서 복사 해 왔습니다.
객지에서 오랜 생활을 끝내고 남편의 고향으로 아주 이사를 온 후 7개월을 계속 아팠다.
고단했으나 늘 긴장한 생활에 맥을 놓아서 몸과 마음에 병이 찾아 온 것이다.
성실하고 열심히 살어온 흔적으로 [발목 아킬레스건 염증]이 심해서 발목의 심줄이 마치 뼈가 튀어 나온 것 같이 불룩하고 딱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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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 대해서 염세적인 나의 속 마음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좋은 집,좋은 옷,출세,많은 돈의 의미가 그리 커보이지 않은 것은 20대부터였다.
그 후의 삶은 주로 책임감과 의리로 지탱을 해 왔다.
이사 후에 그병이 다시 도졌다.
좋게 말하면 형이상학적인 회의겠지만 삶의 의욕이 없어졌다.
그 때 꽈리 고추를 파는 아주머니를 만났다.
왜 이리 부끄러운 마음이 들까?
나의 고민은 사치같이 느껴졌다.
저 아주머니를 저렇게 열심히 살게하는 힘은 무엇일까?
그 의문이 풀렸다.
일요일에 성당에 다녀 오면서 동네를 한바퀴 천천히 돌아 다녔다.
한번도 동네 구경을 한적이 없었던 생각이 났기 때문이었다.
대부분 상가가 문을 닫거나 점심 준비를 하는 음식점만 문을 열고 있었다.
그 병원 앞, 그자리에 혼자 나와서 장을 펴고 앉아 있었다.
그런데 그 옆에 깔끔한 차림의 아주머니 한분이 앉아 있었다.
"꽈리 고추 4,000원어치 주세요. 이모! 나는 이모 보고 제 자신이 부끄럽게 생각했어요.너무 열심히 살고 있는 모습이 정말 좋아요"
" 글쎄 말이예요. 이 아줌마 아들이 박사 학위를 하고 있대요. 큰 아들은 현대 자동차에 다니고. 얘기를 듣고 내가 찾아 왔어요. 들어 보려구요"
"어머 ! 그래요. 정말 잘 키우셨네요."
그 아주머니는 55세이고 남편과 함께 농사를 짓고 있다고 했다.
" 이모는 이지역에 땅 값이 올라서 부자 됐겠네요."
"우리는 땅은 없어유. 남의 땅을 빌려서 농사를 짓고 있어유."
큰 아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현대자동차에 입사를 했고 막내 아들은 국비장학생으로 일본 유학 후에 서울 대학원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하고 ,다시 박사 공부를 하고 있다고 했다. 두 아들의 나이는 30,28세이고 둘 다 미혼이라고 했다.
"이모! 너무 잘됐어요. 훌륭해요. 이모가 나보다 3살 아래네요."
"더 두구 봐야지유"
"뭘 두구 봐요. 계속 잘 될 거예요. 종교가있으면 그 종교대로 기도를 해요. 기독교,불교,유교, 어떤 방법이든지요.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거는 기도밖에 없어요.어머니의 기도는 간절해서 이뤄진다고 봐요"
돈을 받느라고 일어섰는데 키가 내 허리보다 좀 더 컸다.
내가 웃으며 아주머니의 어깨를 짚고 말했다.
"내가 그대에게 박사학위를 수여합니다. 부끄러움을 가르쳐주어서...."
하느님을 믿고 있는 나는 우연히 만나는 이웃에게서 하느님의 모습을 발견하곤 한다.
나태하고 늘어진 정신력이 내게 올 때 장신이 번쩍 들게 만드는 그들이 나의 하느님이다.
나는 진심으로 그 아주머니의 아들들이 잘될 것을 밎고 있다.
나도 정신 바짝 차리고 열심히 살아야 겠다.
그리고 내가 가진 것으로 이웃을 위해서 나눠 가지며 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