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 내가 당신에게 문자 보내 볼께"
"뭐야? 당신! 아직 문자 할 줄 몰랐어?"
"OO이에게 배우기는 했는데 ..."
아! 그래서 내게 문자를 안보냈구나. 무심해서 안보내는 줄 알았는데 ...
남편이 바로 눈앞에서 문자를 보내니까 내 핸드폰에서 띠링하고 소리가 금방 났다.
* 핸드폰의 번호가 표시된 것을 지울 줄 몰라서 단골 사진관에 부탁해서 올렸다.
"나는 할배, 당신은 아가씨인가?"(짝꿍)
60살인 남편이 내게 보낸 첫 문자였다.
"하하하하, 내가 무신 아가씨야?"
나도 남편에게 문자를 보냈다.
"나도 할매, 서로 아끼며 삽시다"(마누라)
나는 몇년 전에 새로 핸드폰을 구입하고 부산에서 대전으로 오는 중에 추풍령 휴게소에서 막내 아들에게 10분을 배우고 알았다.
알고 보니 별로 어려운 것도 없고 ,그것이 계기가 되서 컴퓨터도 독학으로 블러그도 만들고 독수리 타법으로 글을 쓰기 시작해서 3년 째 하고 있다.
남편도 막내에게 배운 모양이었다.
2살 차이가 나는 남편과 나는 중매로 만나서 3달 만에 결혼을 했다
충청도 중에도 충청도라는 예산 사람인 남편은 늘 오빠같이 아버지같이 나를 대해 주었다.
바꿔 말하면 늘 내 앞에서 잘난 척을 하고 살아 온 것이다.
친정 부모가 이북 출신이라서 여성 우대 교육을 받고 자란 나는 서울에서 대부분 성장기를 보냈다.
할 말은 대부분 다 하고 자란 나는 부모에게 따뜻한 마음과 정직성과 교육열을 주로 배운 것 같다.
남편은 교육자 집안의 7남매 중에서 딱 중간인 네 째이다.
위로 형 둘과 누나가 있고 아래로 남동생 둘과 여동생이 있다.
위로 두 형님은 아버님의 부임지를 따라서 다녔고 남편과 시동생은 예산 본가 깡촌에 있는 시골집에서 할아버지,할머니 밑에서 자랐다.
마을 어귀에 있는 [수덕초등학교]를 5살 짜리 동생은 늘 옆자리에 앉혀 두고 다녔다.
전기도 없는 산골에서 해만 지면 바로 자야하는 엄숙한 분위기에서 살았다.
늘 참고 양보하는 표도 나지 않는 네 째여서 어느 곳에서도 조용히 있는 무표정한 남자였다.
중,고등학교는 대전에서 다녔고 대학과 대학원은 서울에서 나왔다.
나는 키가 크고 남편은 작은 편이고 나는 혈액형이 O 형이고 남편은 A형이고 ....O형과 결혼한 사람은 많이 참고 살아야 한다는 글을 읽은 적있다.
그러나 생각하는 인생관이 일치해서 잘 살고 있다.
시어머님이 늘 편찮으셔서 샐프서비스 교육이 잘 되 있는 시댁의 남자분들은 모두 아내에게 잘한다.
집안은 늘 좀 먼지가 있어야 마음이 편하다는 남편과 잘 치우지 않는 나는 그 점도 잘 맞는다.
단점으로 볼 수 있는 나의 게으름은 여러 번 대 수술을 한 후유증일 수 있지만 남편은 말없이 집안 일도 잘 도와 준다.
책만 들면 하루 종일 다 읽을 때까지 아무일도 하지 않는 아내. 그러나 부모님에 대한 미안함과 보답하고자 하는 마음은 일치하고 있다.
아이들과 친구같은 나, 웃고 떠드는 분위기와 동떨어진 남편은 자랄 때 가족끼리 대화를 해보지 않아서 그렇다고 말했다.
대전으로 이사를 하고 충남대에 다니던 아들도 졸업후에 함께 살게 되고 남편은 막내와 자주 술자리를 만들며 가까워지고 있다.
큰 아들은 자기모습을 보는 것 같고 정많고 유머어 있는 외탁을 한 막내가 좋다고 한다.
키작은 남편이 걷는 모습을 보며 (164cm) 막내가 내게 말했다
'엄마! 아빠 걷는 모습이 아장 아장 걷는 것 같지?"
"야! 임마! 아빠 한테 그게 무슨 말이야? 하하하 여보!"
내가 남편에게 말해주었더니 자기도 웃는다.
충대 앞 에 있는 [막걸리와 정구지 지짐] 집으로 아빠를 모시고 가서 술대접을 하면서
"아빠! 이 주점이 생긴 이래로 아빠가 최고령 입장객이야"
부자가 함께 취해서 자취집에서 자고 부산의 집으로 내려온 적도 있다.
남편은 31년동안 이벤트라든가 사랑 표현을 한 적이 거의 없다.
" 늘 사랑하는데 무슨 말이 필요해"가 전부이다.
그러나 몸과 마음으로 느끼고 있다.
대화를 하지 않아도 그와 함께 있으면 편하다.
폐 절제 수술을 한 나를 위해서 조용히 베란다로 나가서 담배를 피우는 부자의 모습 속에서 가족의 사랑을 느낀다.
""더우니까 집에서 쉬어요"(짝꿍)
좀 전에 남편이 내게 보낸 문자이다
난 남편을 [짝꿍]으로 남편은 나를 [마누라]라고 저장해 놓았다.
남편과의 31년의 결혼 생활을 파란만장하게 보내고 고향으로 돌아 왔다.
두 아들은 아빠가 결혼을 했던 29살을 넘겼다. 32세,29세이다.
어느날 막내가 물었다.
" 엄마,아빠는 그렇게 다르면서 어떻게 그렇게 오래 같이 살 수가 있어?"
남편이 망설이지 않고 대답을 했다.
"다르니까 살 수 있었지, 같으면 못 살았지"
남편과 나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그래서 서로 보완하며 살고 있는 것 같다.
평균 수명만큼 산다해도 앞으로 우리 앞의 생이 20년 정도 남았다.
사랑하고 살기에도 짧은 기간이다.
우린 그동안 충분히 싸우며 서로에게 맞춰와서 잘 사는 방법을 터득했다.
서로 건강해야 행복한 노후가 될 것이므로 더욱 아끼고 살아야 한다.
남편은 호적으로는 나와 같은 1952년생이고 학교는 중,고,대학교를 같은 해에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