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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는 조상들의 제일 현명한 지혜이다.

모과 2009. 4. 27. 14:22

친정이 개신교를 믿어서 제사를 하는 모습을 본적이 없다.

형제중에 우리만 부산에 오래 살아서 제사에 참석을 거의 하지 않았다.

아니,남편만 보내고 나는 가지 않았다.

교회에서 교육받은 것은 제사는 우상숭배이며  제사음식을 먹으면 안되는 것으로 배웠기 때문이다.

솔직히 고백하면 제사를 피했던 편이었다.

▶ 제 례
제사상 차림 그림
 

 

제사상 그림은 [야후 ,산촌 김옥남님의 블러그]에서 발췌했습니다.

 

개인적인 불행한 일에 개신교인들이 많이 개입이 됐고 ,나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는 결혼식이라도 참석하지 못 할 정도로 심장이 떨리는 고통을 느끼는 병을 얻었다.

16년이라는 긴 세월을 교회를 다니지 않았다. 

그러나 마음에 하느님은 나를 사랑으로 돌보고 계심을 느끼고 살았다.

가는 외 줄 하나에 매달려서 간신히 절벽에서 위로 기어 오르는  것 같은 고난을 견뎠다.

그러나 하느님이 나를 지켜보고 도와 주신다는 믿음을 잡고 있었던 것이다.

 

남편의 고향인 대전으로 작년 11월에 이사를 오면서 성당에 다니기로  했다.

제사문제에 자유롭고 싶어서,그리고 부족한 내가 의지 하는 하느님의 말씀을 일주일에 한 번씩 듣고 바르게 살고 싶어서다.

 

고향으로 이사를 오고  어제 두번 째 제사가 있었다.

증조 할머니의 제사였는데 아버님은 예산의 시골 집에 남편과 시고부님과 가셔서 하루 주무시면서  연산홍 2,000그루 사이에 솟아 오르는 잡초를 깨끗이 뽑고 오셨다.

 

"할머니가 시골집에 들려서 장손 집에 진지잡수시러 오시라"고 그러셨다고 했다.

 

대전으로 돌아 오면서 나를 태우고  작은 아버님이 입원중인 성모병원으로 함께 갔다.

허리디스크 수술을 하셨는데 장이 꽉 막혀 가스로 인해서 정신을 잃으셔서 응급실을 거쳐서 입원해 계셨다.

79세의 동생을 위해서 87세의 아버님은 아침 저녁으로 병원에 들리신다.

결혼을 하고 31년동안 나는 시댁 어른들의 인품에 감동되서 효심이 저절로 생기는 것을 느끼고 있다.

 

5남 2녀중에서 넷 째인  시동생이 미국에 이민을 간지 30년이 됐다.

몇 년에 한 두달씩 부모님을 초청해서 미국의 유명한 관광지를 대부분 모시고 다녔다.

넷째 동서의 친정은 모두 이민을 갔다.

조카들이 워싱턴 주립대학과  M I T 주립대학,유타주립대학을 졸업을 할 때마다 모시고 갔다.

아들도, 며느리를 잘 보면 외국 여행을  원없이 하실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넷째 동서는 고아원을 운영하시던 장로님의 딸이다.

며느리 5명 중에서 제일 났다는  어머니의 말씀을 인정한다.

 

큰 동서 형님은 일주일 전부터 혼자 김치를 담구고, 나물을 준비해서 다 다듬어 놓고 전거리를 사다 놓고, 하루 전에 식혜를 해놓고, ..모든 준비를 해놓고 주방 바닥에 신문지를 쫙 깔아 놓고 두부,생선, 녹두 전을 부치게만 해 놓고 기다린다.

3시~4시경에 가니 큰 형님 이웃에 사는 둘째,다섯 째가 전을 부치기 시작하고 있었다.

 

나는 그 동안 참석도 못하고 제사에 보태는 돈도 드리지 못했다.

형님에게 우리의 형편대로 5만원을 봉투에 넣어서 드렸다.

 

둘째 형님은 손도 빠르고 일도 앞장서서 잘한다.

변호사 부인이면서도 몸 사리지 않고 나물도 손으로  주물러서 맛나게 잘 무친다.

일하면서 큰형님 댁 막내며느리가 분만실에 들어 갔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 순산을 하기를 기도하는 마음이었다.

" 제가 개신교 집안에서 자라서 제사를 자세히 모릅니다. 제가 직접 대해보니 제사는 산사람을 위한 모임입니다. 그동안 제가 참석을 못했으니 앞으로 열심히 제사에 참석하고 일하겠어요" 하고 공식적으로 발표(?) 했다.

 

영혼이 와서 밥을 먹고 간다면 하루에 세끼다 제사를 드려야 할 것이다.

여러 곳에 떨어져서 살고 있는 자손들이 모여서 맛난 음식을 함께 만들고 그동안의 소식도 주고 받으라고 제사가 생긴 것같다.

서로 건강도 걱정해주고, 조카들의 소식을 듣고 덕담을 주고 받으며 서로 일하려고 하는 모습들이 아름답다.

 

제사 지낼 음식을 따로 차려 놓고 ,둘째 형님 내외분이 작은 아버님을 문병을 하러 갔다.

제사 때나  부모님 생신 때만  만나는  둘째 형님은 일하면서 기분이 좋아져서 언변좋은 솜씨로 좋은 정보를 주었다.

초보 고지혈증 환자인 내게 호두는 먹지 말라고 말해주었다.

형님도 고지혈,고혈압약을 먹고 있다고 하면서..

막내 시누이가 작은 아버님을 문병 왔다가  다섯째 언니를 데려다 주며 한집에 한봉지씩 준 호두를 보고 말해주었다.

 

밤을 물에 불려서  아버님이 깍으시는데  옆에서 나도 하나 깍으니까  아버님이 보시고

"너는 그만 둬라. 너 하기 싫으니까 이렇게 깠지?"하고 웃으셨다.

본래 큰아주버님이 하시는 일인데  며느리가 산기가 있다고 해서 서울에 갔다 내려오셔서 늦어졌다.

아주버님은 지방을 쓰고 아버님과 큰형님이 밤을 깎았다.

"어! 이것 봐라. 다 썩었네" 하시더니 썩은 곳을 잘라내고,나머지를  잡수시더니 나도 한쪽 주셨다.
"저는 썩은 것은 안 먹습니다" 하며 웃었다.

"애 봐라. 내가 언제 썩은 것을 줬니?" 하시며 웃으셨다.

새밤을 하나 잘 깍으시더니 옆에 있는 내게 하나 주셨다.

 

7시 30분에  부모님과 둘째형님 내외분, 며느리 셋이서 식사를 했다.

화기 애애하고  복된 대화를 나누었다.

집이 가까운 사람들은 갔다가 12시 전에 다시 온다.

큰 형님이  중3,고1이 있는 막내동서에게 국, 잡채,조기구이,전등을 싸서 주었다.

 큰 형님이 어머니와 막내 동서를 집까지 태워 주고 돌아 왔다.

 

10시 30분쯤 [순산,득남, 3Kg] 의 희소식이 왔다.

37세,33세의 부모를 가진 박씨 가문의 종손이 태어났다.

큰 조카가 딸만 셋을 낳아서 기다리던 아들이었다.

 

증조 할머니가 큰 선물을 주셨다고 모두 기뻐했다.

 

나는 다른 동서보다 시댁에 한일이 너무 없다.

입장을 바꿔서 생각을 해봐도 나는 큰동서 같이 못한다.

그러니 토를 달지 말고 열심히 참석하고 말조심을 하고 어른을 존중해야겠다.

그동안 시댁에서 받은 사랑이 너무 많다.

이제 시댁이 있는 도시로 이사를 왔으니 최선을 다해서 받은 사랑을 보답해야한다.

일은 못해도 나로 인해서 시댁 식구들이 더 즐겁고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내가 어릴 때 어머니는 늘 날를 위해서 기도를 해주었다.

"어디를 가든지 꽃과 같이 곱게 , 다른 사람들이 보고 기쁨을 느끼는 사람이 되라"고.

 

나이 60이 다 돼가는 나를 마치 막내 딸 같이 사랑으로 돌봐주시는 시댁 어른들께 감사함을 전한다.

 

 제사는 우상숭배가 아니고 [후손들의 친목회]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계속 열심히 참석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