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의 미모가 뛰어나서 나는 20살이 될 때까지 외모에 대한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다.
누구든지 우리 집에 오면 한 살 아래의 여동생의 빛나는 얼굴을 칭찬부터 했다.
나는 늘 동생보다 못났다고 생각했다.
대학교 입학을 하고 그 열등감에서 벗어났다.
** 연년생이지만 18개월 차이가 나는 여동생과 나의 어린 시절, 내가 3살,동생이 돌때 기념으로 찍은 사진이다. 자금은 58세,57세의 할머니들이 됐다. 평생을 싸우며 화해하고 서로 비밀이 없는 친구 사이다.**
*34년전 45세의 젊은 엄마는 교통사고로 돌아 가셨다. 나, 여동생, 남동생,막내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것 같다. 나는 늘 불만이 있는 표정으로 입을 내밀고 사진을 찍었다. 여동생의 파마 머리와 귀걸이가 인상적이다.*
* 중학교 2학년인 나, 중1인 여동생, 초등학교 4학년이었단던 남동생,입학 전인막내동생
중학교 2학년 때 심한 감기몸살을 앓고 나서 생긴 쌍커플로 짝눈이 됐다 나중에 두쪽 다 생겼다. 서울 변두리 초등학교는 반에서 1등을 해야 진명 여중에 진학 했다. 중학교를 수석으로 입학한 동기는 공주의 경찰 서장님 딸이었다. 현모양처를 육성하는 학교로 유명했다*
여동생 아래로 남동생 둘이 태어났다.
우리 집은 경기도 파주에 살고 있었는데 대전에 살았던 큰 아버지가 다니러 오셨다.
사람을 잘 따르는 여동생이 5살 때였는데 큰아버지 무릎에 앉아 가만히 있어서 큰 집에 가서 살자니까 큰아버지를 따라갔다.
큰 집에는 자녀가 없었다.
어머니가 여동생이 보고 싶어서 데리러 갈 때 나도 함께 갔다.
대전의 부자 동네인 대흥동에 있는 큰집에 가니 여동생은 백화점에서 산 빨간 원피스를 입고 머리는 파마를 한 곱슬머리가 예뻤다.
쌍커플이 굵게 진 동그랗고 까만 눈은 아직도 그대로 예쁘다.
끈으로 묶는 까만 구두도 참 예뻤다.
나는 경기도 면소재지의 촌 년인 내모습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읍 소재지 시장에서는 볼 수 없는 옷과 구두였다.
동생 모르게 구두를 신어 보다 들켰다.
" 애! 너 왜 내 구두를 신니? 벗어 놔."
쌀쌀맞게 말하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여동생은 큰 아버지 집에 계속 있겠다고 했다.
이글을 쓰면서 동생에게 다시 물어보니 엄마가 가기전에 아버지도 데리러 갔다고 한다.
가보니 동생에게 [엄마!]{아빠!]라고 부르라고 시키고 있어서 자식 없는 형한테 딸을 다시 달라고 할수 없어서 돌아 온적이 있었다.
여동생이 열 살 때 큰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형편이 어려워지자 동생은 시골 집으로 돌아 왔다.
대도시에서 학교를 다니다 한 학년이 두 반인 촌 학교로 전학을 온 여동생은 자기 집에 간다고 한 동안 울었다.
남동생 둘은 나와 자랐기 때문에 늘 내편이었고 여동생은 고집이 쎄고 잘못해도 빌지않아서 엄마에게 많이 맞았다.
나는 잘못을 하면 무릅을 꿇고 두 손을 비비며 잘못했다고 해서 덜 맞았다.^^
여동생의 고집을 고치려고 크게 잘못했을 때 매로 때려도 잘못했다고 하지 않아서
엄마는 방문을 잠가놓고 때렸다.
여동생은 번번히 끝까지 잘못했다고 하지 않아서 많이 맞았다.
우리들이 시골 학교에서 공부를 잘 못하고 부모님이 장사를 해서 돌봐줄 수도 없어서 엄마는 서울로 유학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얼마나 공부를 못했으면 초등학교 6학년에 올라 가는 나를 서울로 전학을 시킬 때는 5학년 그대로 전학을 시켰다.
6살에 입학을 했던 나는 나이도 1살 어려서 같은 나이의 학생들과 공부하게 된 것이다
나는 2월생이다.
서울의 청구동은 길건너 장충동과는 대조적으로 서민의 아이들이 많이 다녔다.
당시에 장충초등학교에는 김종필 총리의 딸, 박정희 대통령의 딸 박근혜씨, 정일권 국무총리의 딸들이 다니던 명문 초등학교였다.
나는 청구 초등학교를 다녔다.
지금은 문화재로 지정 됐다는 13평 한옥집은 방 두 칸과 작은 마당, 마루 ,부엌으로 된 집이었다. 대문 옆에 재래식 화장실이 있었다.
남의 집에 잠깐 세를 살다 한옥 집을 사서 이사했다.
원주에 살고 있던 외할머니와 식모 언니 그리고 막내를 제외한 우리 세 남매가 서울에서 학교를 다녔다.
어머니는 같은 동네에 살고 있는 고려 대학교 법학과 1학년 남학생에게 과외를 시켰다.
과외선생님은 엄했고 자주 틀리면 회초리로 손바닥을 때렸다.
나는 성적이 놀랍게 향상되서 반에서 일등을 계속했다.
그 시절에는 성적 순으로 앉았는데 어느 때는 2등과 총점 1점 차이로 내가 일등을 해서 수 분단 분단장을 했다.
내 옆자리에 앉으며 대성 통곡을 하던 친구가 떠오른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엄마가 나 모르게 미제 화장품 세트를 선생님께 자주 선물을 했다.
그당시 모두 어렵다던 때였는데 엄마는 밍크코트를 입고 서울에 왔었다.
초등학교 졸업식 날도 담임 선생님을 모시고 중국집에서 탕수육과 팔보채 짬뽕등을 먹은 기억이 난다.
여동생은 공부에 취미가 별로 없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공부 잘하는 언니에 묻혀서 피해를 본 것 같다.
내가 중학교에 진학을 하고 동생은 6학년이 됐다.
나의 담임이 동생의 담임이 됐다.
동생은 머리는 좋으나 성적은 중위권이었다.
수업 시간마다 언니인 나와 비교 당해서 학교 생활이 즐겁지 않았다.
여동생은 집에서 가까운 학교에 성적대로 진학을 했다.
외모가 뛰어 난 여동생에게는 늘 남학생이 따랐다.
중학교에 진학한 후 예쁜 친구를 사겼는데 조숙했던 그 친구는 무슨 이유였는지 자살을하려다 미수로 끝났다.
사춘기 때 친구는 성장에 큰 영향을 미친다.
여동생은 나보다 정신연령이 더 빨리 성장 했던 것 같다.
**여기까지 여동생에게 전화로 읽어 주었다. 고교 진학을 한 후 영화배우가 되라고 많이 권유 받기도 했던 여동생의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고 싶다. 무슨 별난 일이 있어서가 아니라 여동생의 사생활이기 때문이다**
* 21살 의 여동생, 이때 영세를 받았다.세레명은 [비아]이다.
*여동생이 대전에서 집으로 돌아 온 직후 찍은 사진. 뒤에 여인은 엄마의 언니인 이모, 옆에 서있는 나,
아래에 앉아 있는 여동생, 이종사촌동생, 엄마,안고 있는 아기가 지금 51세 된 막내 동생, 큰남동생이다. 여동생이 입고 있는 빨간 원피스와 레이스가 달린 흰 부라우스, 표정에 쓸쓸함이 보인다. 학교갔다 오자마자 체육복 차림으로 사진관에 가서 찍은 촌스런 나의 모습과 여동생의 세련된 모습이 비교된다*
내가 고등학교 2학년때 우리 집은 모두 서울로 이사를 왔다.
엄마는 총명했던 막내를 사립초등학교에 전학을 시켰다.
막내동생은 형제 중에서 제일 머리가 좋은데 초등학교 때부터 눈에 띄게 공부를 열심히 했다.
지금 대기업 이사가 돼서 어머니의 소망을 이뤄 준 아들이 됐다.
엄마품에 안겨 있던 아가가 지금은 51세의 184cm,100kg 가까운 거구로 카리스마 있는 상사가 됐다.
연년생인 자매는 자라면서 서로 질투하고 경쟁하고 ,상처도 주고 같은 부모 밑에서 동일한 추억을 공유하며 살았다.
나는 동생 복이 있어서 세 동생 모두 언니,누나의 말을 존중해주고 위해 주고 있다.
뛰어나게 예쁜 여동생 으로 인해서 외모에 대한 열등감도 오래 간직했지만 그래서 공부를 더 열심히 했는지도 모른다.
나이 60 에 가까우니 모든 사물이나 사람이 전체적으로 보인다.
어느 사회나 단 한 사람의 악인도 선인도 존재하지 않고 서로 부족한 점도 알고 있고 좋은 점도 알게 됐다.
형제 자매간에 갈등이 없는 집안이 어디 있겠는가?
다만 서로를 이해하고 배려하며 도와주고 사는 집이 있을 뿐이다.
흔히, 말하는 사람이나 글을 쓰는 사람의 입장에서 주관적인 주장을 하기 때문에 피,해를 보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이제 우리 자매는 젊은 날의 순수나 맑고 고은 모습은 다 지나갔다.
서로 건강을 염려해주며 마음 속에 있는 말을 100% 털어 놓는 다정한 친구가 됐다.
가끔은 서로의 고집으로 말다툼도 하지만 두시간이 못돼서 누구든지 먼저 전화를 한다.
부모님이 일찍 돌아 가셨지만 좋은 여동생을 주어서 인생살이가 그리 쓸쓸하지만은 않다.
자매간의 애정도 서로 가꾸며 예의를 갖춰야 좋게 지속 된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