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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학번 첫 번 째 미팅 이야기

모과 2009. 3. 9. 09:09

1970년 3월에 명문이라고 불리는  E여대는 약 2,000명이 입학을 했다.

학교 뱃지가 배꽃 모양이었고 단과 대학별로 바탕의 색이 달랐다.

초록,분홍,노랑, 흰색,하늘색,...등으로 기억이 된다.

문리대학은  문과와 이과가 있었고 이과의 과는 수학과,생물학과, 화학과, 물리학과 네개의 학과가 있었다.

뱃지의 색깔은 흰색이었다.

파일:Ewhauni.jpg

 사진 출처 DAUM  검색.

 

그 시대에는 학교를 졸업을 하면 바로 결혼을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결혼을 못하는 학생들은 결혼 전까지만  직장 생활을 했고 결혼이 결정되면 사표를 내겠다는 각서를 쓰고 취업을 하던 시대였다.

E여대를 졸업하면 결혼을 잘 한다고 믿는 부모가 많아서 적성과 관계없이  대학 간판을 보고 모의고사 점수에 따라서 학과를 결정한 학생이 많았다.

이과의 한 과에 입학을 하니  서울과 전국의 명문 여고생들이  40명이었다.

재수,삼수를 한 학생들이 반이 넘었다.

 

입학한 후에 제일 기대가 되는 것이 미팅이었다.

모두 여고를 졸업을 한 학생들  뿐이어서 재수를 한 친구들이 함께 재수한 학원 남자친구들을 통해서 미팅을 주선했다.

강의가 끝나고 빈 강의실에서 칠판에  미팅을 신청한 학교와 과를 적어 놓고 찬,반 투표로 결정했다.

S 대, K대, Y대.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우리들은 모두 일류병  환자였다.

위의 세 학교  이외는 미팅을 할 의사가 누구에게도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미소가 지어지지만 대학생들도 교복을 입던 시절이었다.

많은 남학생들이 제대 후에는 군복을 까맣게 물들여서 입고 군화를 신고다녔다.

 

경기고를 나온 어느 남학생은  S 대를 입학한 것보다  경기고를 나온 것이 더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S 대 신입생은 3,000명이지만 경기고는 420명이 졸업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지금은 신림동으로 이사 갔지만 70년도엔  각 단과 대학이 흩어져있었다.

대학로가 문리대학 자리였다.현재의 S대풍경]

 

[국립 S 대 모습: 출처: DAUM 지식 검색]

 

 

미팅을 주선했던 과 친구가  번호가 적혀 있는 표를 주었다.

아마도 과친구 거의 다 참석을 했던 것 같다.

남학생에게도  역시 번호가 적혀 있는 표를 주었다.

 번호표 뒤에는 다방  이름이 적혀 있었다.

남학생은 타임지를 들고 여학생은  E여대생들이라면 모두 가지고 있는 학교 수첩을 탁자에 올려놓기로 했다.

초록색 표지에 학교 마크가 있고 뒷장에는 채플 시간에 부르는 찬송가가 있는 초록 색깔의 수첩이었다.

 

첫 미팅은 S 대 교양 과정부 1학년 O 반이었다.

그 당시 S대는 태능에 있는 공과 대학안에서 신입생들을  1년간 교육시켰다.

과들을 모두 섞어서 반을 편성했던 기억이 난다.

 

나는 유명한  중견 탈렌트가 하던 명동의  [곰다방]이 약속 장소였다.

경기 고등학교를 졸업한  물리학과 남학생이 자랑스런  S대 교복을 입고 타임지를 탁자위에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 때는 왜 그렇게 유치한 것들이 알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취미는 무엇입니까?

좋아하는 색깔은 무엇입니까?

어느 고등학교를 나왔습니까?

여고생이 머리를 딸 때 끝까지 따지 않고 왜 머리를 많이 남겨 놓고 묶습니까?

좋아하는 음식이 무엇입니까?

무슨 책을 가장 감명 깊게 읽었습니까?

어느 영화를 가장 감명 깊게 보셨습니까?

 

 지금은 이름도 얼굴도  기억이 나지 않지만 경기고를 나온 지적이고 자존심 강하게 생긴 키가 좀 작은 편인   남학생은 에프터를 신청했다.

나도 그 남학생이 마음에 들었으나 처음으로 만난 남학생과 다시 만나는 게 좀 겁도 났고 그 시대에는 여대생이   한번에 허락하면 쉬운 여자로 보인다고 믿었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사양을 했더니 몇 번 더  데이트를 신청했다.

 

사람의 심리가 이상한 것이  두 세 번 거절을 하다가 어떻게 예스를 하는 방법을 몰라서 마음과는 다르게 더 강하게 거절을 하게 된다.

 

그 남학생은 자존심이 드높은 경기고 출신이 아니었던가!

학교 과 사무실로  S 대의 학보가 오기 시작했다.

 

그래도 반응이 없자  학교 정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E여대  교문 앞 남학생들이 기다리는 곳을 후배들은 [바보 스테이지]라고 부른다고 들었다.

너무 놀란 나는 학교 앞 [캠퍼스다방]으로 데리고 갔다.

"내가 싫은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해서 왔어요. 말해주세요"

단도직입 적으로 묻는 말에  뭐라고 답할 게 없어서 이유가 없다고 말해 버렸다.

재수를 해서 입학을 한 남학생은 붉어진 얼굴로 차 값을 계산하고 돌아 갔다.

 

70 년대 초 S 대 수석 합격자는  순수 과학인 물리학과에서 자주 나왔다.

S 대를 졸업을 하면 과에 관계없이 여러 기업에 합격했다.

 결국 기업들은 면접 날짜를 같게 했다.

 

큰 아들이 신촌에 있는  S대  98학번인데  단체 미팅은 없어졌고 소개팅이 있었다.

[폭탄제거]라고 그 자리에서 [너 나가 ]하고 폭탄으로 지정된 학생을 보내는 방법을 듣고 격세 지감을 느꼈다.

소개팅 후에 연락이 없으면  여학생이  남학생의 학교로 찾아오기도 하는 시대로  변했다.

 

우리 때는 미팅에 나온 여학생이 마음에 안들어도 차타는 데 까지 데려다 주고 에프터를 신청하고 전화 번호를 묻는게 남학생의 예의라고 생각했다.

그 후 전화가 안오면 여학생은 퇴짜 받은 것으로 알았다.

 

딸이 연애 할 것이 두려워서 여대로 보낸 부모가 많았던 시절이었다.

1970년에도  E여대는 입학하기 좀 힘든 학교였다.

서울에서 여고를 나온 학생들은 대부분 대학에 진학을 했다.

 

첫 번 째 미팅에서 만나서 결혼까지 한 친구가 두명이 있다.

나는 누가봐도 전형적인 E 대생 이라는 소리를 들었고 연애 결혼을 할 것이라고 했었다.

그러나 첫 미팅과 같은 이유로 남학생을 못 사겼고 졸업 후에 중매로 만난 남편의 적극적인 대시로 맞선을 보고 3개월 만에 결혼을 했다.

 

벌써 40년의 세월이 흐른 옛 추억이다.

첫 번 째 미팅에서 만났던 그 남학생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살면서 가끔 궁금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