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맏딸인 나를 무척 예뻐 하셨다.
6.25전에 이북에서 한 번 결혼을 하셔서 아들을 두셨는데 전쟁이 나고 큰아버지와 두 분만 월남했다.
3.8선이 막히고 북으로 돌아 갈 수 없게되자 어머니와 연애 결혼을 했다.
어머니가 임신을 하자 딸이기를 바라셨는데 내가 태어 난 것이다.
얼마나 기뻤으면 이름도 이룰 성, 기쁠 희로 지었을까.
아버지는 유치원 입학 전까지 나를 목욕탕에 늘 데리고 다녔다.
지금도 가끔 아스라히 떠오르곤 하는 뿌옇고 하얀 김이 서린 남탕의 풍경이다.
나만 여자아이였고 모두 아버지같이 어른들이었는데 모두 벗은 사람들의 모습과 다리 사이가 검은 것을 보고 무척 부끄러운 기억을 아직도 가지고 있다.
아버지는 네 다섯 살 딸이 귀여워서 자주 데리고 다녔겠지만 내겐 부끄러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
이상한 것은 내가 벗은 게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그것을 본 부끄러움이라는 것이다.
두 번째 기억도 비슷하다.
아버지는 여름에는 가족들을 데리고 냇가에 가서 닭죽을 끓여 먹고 개울물에 목욕을 하는 것을 좋아했다.
어린 여자 애니까 팬티를 벗겨서 , 아버지도 벗고 나를 무릎에 안고 목욕을 시킨 기억이 남아 있다. 개울 중간에는 물살이 좀 있어서 그런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여벌의 팬티를 가지고 가면 좋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지만 아버지도 다 벗은 것을 생각하면 즉흥적으로 목욕을 한 듯하다.
아버지의 무릎에 앉아 있으며 무척 부끄러워서 얼굴이 발그레졌던 기억이 남아 있다.
나도 아들들이 유치원 다닐 때까지 여탕에 데리고 다녔는데 같은 기분이었을 것이다.
그 때는 잠시 내 어릴 때 생각을 잊고 있었고 오직 아들들을 깨끗이 닦아 줄 생각만 했었다.
아버지는 가끔 아이들 같았다.
집안에 펌푸가 있었는데 학교에서 돌아 오면 펌프질을 해서 바께스에 물을 가득 받았다.
아버지는 두 손을 허리 뒤로 돌리고 입으로 바께스의 물을 벌컥벌컥 마시며 내게도 시켰다.
나도 따라서 두 손을 허리 뒤로 돌리고 입을 바께스물 위에 대고 벌컥벌컥 마셨다.
동생들도 다 따라서 했다. 일렬로 죽 서서....하하하.
그리고 함게 웃었다.
아버지는 외모도 많이 닮은 나를 무척 예뻐해주셨다. 어깨에 무등도 많이태워 주었다.
무조건적인 사랑, 자유방임적인 교육, 그러나 철저한 여성 우대 교육을 한 것이다.
내 밑으로 여동생과 두 남동생을 두었지만 아버지에겐 맏딸이 늘 최고였다.
그 때 우리 집은 경기도 파주 용주골이라는 유명한 기지촌에서 제법 큰 식당을 했었다.
식당 옆에는 살림집이 있었는데 집이 넓어서 방 두어개는 미군부대에 근무하는 신혼 부부에게 세를 주었다.
우리 동네에는 학교가 없어서 전에 살던 법원리의 천현국민학교까지 통학을 했다.
버스로 약 20여분 걸렸던 것으로 기억 된다.
장 날이면 짐들과 손님들이 많아서 집으로 돌아 오는 버스에 타기가 힘들었다.
나는 친구들과 차비는 사탕을 사먹고 걸어서 집까지 걸어 왔다.
어릴 적에는 그 길이 가도가도 끝이 없어 보였다.
오다가 지나가는 차의 먼지를 다 맞고 ,힘들면 주저 앉아서 놀다 와서 저녘무렵 집에 도착 했을 때는 꾀죄죄하고 거지같은 모습이었다.
걱정을 하던 엄마에게 등짝을 한번 맞고 저녁밥을 허겁지겁 먹었던 나.
초등학교 5학년까지 시골에서 살았던 철없던 시절이 나의 정서에 자양분 같은 역할을 한다고 믿고 있다.
숙제라고는 해간 적이 없고 ,학교 울타리에 지천으로 피었던 아카시아 꽃도 따먹고 남자아이들과 자치기,제기차기를 하고 여자아이들과는 고무줄 놀이, 숨바꼭질, 땅따먹기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놀이를 하면 나는 제일 잘 하는 편이었다.
공부시간이면 너무 장난이 심해서 선생님은 나와 제일 말썽쟁이 남학생을 교단 바로 앞자리에 둘이 앉혔다.
그런데도 왠지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은 철부지였다.
남자는 남자끼리,여자는 여자끼리 앉았고 4학년이 되면 남반,여반으로 갈렸던 1959년도 내가 3학년 때의 일이다.
1957년도, 6살에 입학을 했던 나는 학교를 놀러 다는 것으로 알았던 것 같다.
그 때 단체로 찍은 사진을 보면 반은 한복을 입고 있었고 책가방도 없이 보자기로 책을 싸서 옆으로 걸치고 다닌 아이들이 많았던 시절이다.
나는 아버지가 서울에서 사온 책가방과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얼굴은 찡그리고 표정은 촌년의 모습을 하고 옷은 오래 입으라고 큰 것을 사주어서 전혀 예쁘지 않았다.
말썽쟁이 나 때문에 골치가 아픈 선생님은 교육 상담을 하려고 어머니를 학교로 부르셨다.
***앞으로 나와 남편의 이야기를 써 볼까 합니다.
전혀 달라서 서로 잘 어울리는 남편과 나.
31년을 함께 살아 왔고 앞으로 같이 살아 갈 세월이 20년이 더 남은 우리 부부.
노년의 가장 좋은 친구로 애인으로, 아내로 넉넉하게 늙어 가기 위해서 우리의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