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검색을 하기위해서 [아줌마 닷컴]에 들어 가니 구정에 고마운 사람에게 문자를 보내는 캠페인을 하고 있었다.
제일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큰동서였다.
[큰형님! 구정 전날 일찍 갈께요. 늘 고맙습니다]
환갑을 훌쩍 넘겼는데도 평생을 시할머니,시할아버지,시어머니의 병간호를 하면서 일주일 내내 혹은 일주일에 한번,병원에 입원을 하시면 매일을 병원에 모시고 다녔다.
시할머니는 할아버지보다 3살 연상이었고 시할아버지의 서당 스승님의 따님이었다.
할아버지가 무녀 독남이셔서 ,두 분은 3남 5녀 (시아버님 위로 누님90세 정정하신 편이다),시아버님,88세,바로 아래 시고모님 86세, 시작은 아버님(84세) 돌아 가신 시고모님 74세, 홍성시고모님 72세,,막내시고모님 68세 돌아가신 시삼촌 .
시할머니는 93세까지 정정하게 사시다가 점심 진지 드시고 쓰러지셔서 일주일간 무의식으로 계시다가 돌아 가셨다.
일주일동안 1일 3조로 시고모님들은 할머니의 소변을 하신 이불을 빨아 삶으시고 ,큰동서와 막내 고모님은 식사 담당이었다.
그전에도 지병으로 담석증을 앓고 계셨는데 항상 큰형님이 병원에 모시고 다녔다.
시어머니는 결혼하고 부터 [퇴행성 관절염]이 발병해서 50년 이상을 편찮으시다.
큰형님이 26세에 결혼을 할 때 시어머니는 36세였다.
큰 아주버님과 어머니는 8살 차이가 난다.
큰아주버님이 14살 때 친어머니가 병환으로 돌아 가셨다.
아래로 두살씩 나이 차이가 나는 동생들이 주르르 4명이었다.
17살의 고등학교 남학생이 25세의 새엄마를 맞이 하며 4명의 동생들을 바라보는 심정이 이제 이해가 된다.
큰아주버님(17세), 둘째아주버님(15세), 큰시누이님(10), 남편(,8세) 시동생(5세)
큰형님이 고3 때 담임 선생님이 시아버님이었다.
졸업후에도 해마다 은사에게 안부 편지를 보내다 인연이 돼서 종가집 종손의 큰 며느리가 된 것이다.
시어머니도 큰형님도 힘든 시기가 있었다.
같은 동네에 살고 있어서 힘든 이야기를 누구에게도 할수가 없는 형님은 당신의 몸이 차츰 병들어 간 것 같다.
시어머니도 동네의 누구에게도 집안의 문제를 말하지 않으셨다.
시어머니도,큰형님도 힘든 여건이기 때문에, 같은 동네 주택에 40년 가까이 살고 계셔서
두 분 다 힘든 세월을 보내신 것 같았다.
요즘은 어머니가 무릎에 인공 관절을 넣는 수술을 하시고 침대와 의자에서만 생활을 하시느라고 무척 불편하다.
곧 다른 쪽도 인공 관절을 넣는 수술을 해야 한다.
큰시누이와 큰형님이 한분은 병실에서 ,한분은 식사를 담당하셨다.
요즘도 일주일에 한번씩 어머니를 모시고 병원에 다니고 있다.
형님은 49세에 운전을 배우고 스트레스를 좀 벗어 났다고 했다.
정말 대단한 것은 형님은 누가 와도 잘 대해 주시는 것이다..
집안의 경조사에 대표로 장남 부부가 가신다.
내가 살림을 못하는 것을 알고 신혼초 부터 10년간을 고추장,된장을 담가주었다.
큰형님도 나도 결혼전에 엄마가 돌아 가신게 같아서 친동생 같이 대해 주었다.
내가 큰아들을 낳고 애기를 봐줄 사람이 없을 때 큰형님이 6개월간 대전에서 키워주었다.
나는 60이 다 돼가도 며느리를 보면 어떻게 대해야 할가 생각하면 조금 겁부터 난다.
서로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데 나는 지금껏 시댁의 사랑만을 받아 왔기 때문이다.
모두 대전에 모여 사는 데 나만 부산에서 오래동안 살았고 장사를 했고, 직장에 다녀서
시댁에는 남편은 자주 다녔지만 나는 뜨문 뜨문 다닌 편이다.
둘째 동서도 같은 동네에 살고 있는데 결혼 초부터 몸이 많이 아파서 힘든 일은 잘 못한다.
시할아버님은 큰동서를 정말 사랑하셨다.
차멀미가 심한 손주 며느리에게 검은 깨를 9번 쪄서 말린 민간약을 해주셨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9년을 혼자 살다 가셨는데 시어머니는 편찮으신데도 대전 집에 할아버지를 모셔서 365일 곰국을 끓어 드렸다.
99세 6월에 쓸어지셔서 한달을 편찮으시다 돌아 가셨다.
할아버님을 일주일에 한번씩 병원에 모시고 다닌 사람도 큰형님이 었다.
내가 27세에 결혼을 할 때 형님은 34세였고 시어머니는 44세였다.
나는 어머니의 친정 언니의 중매로 결혼을 했다.
어머니는 내가 밝고 맑아서 좋다고 하셨고 ,나를 보니 이제야 며느리를 보는 것 같다고 말씀 하셨다.
큰형님도 허리 디스크로 큰 수술을 작년에 했다.
시누이님도 허리디스크 3,4번이 녹아 없어져서 작년에 수술을 했다.
수술 날짜를 잡아 놓고 대전에 와서 어머니를 목욕 시켜드리고 ,아버지에게는 수술이 끝난 후에 알리라고 하는 걸 내가 바로 알려드렸다.
시댁의 효심은 유전같았다.
결혼 후 한번도 큰소리가 나는 것을 못봤다.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시고 위로 오빠가 둘, 아래로 남동생이 둘이었으니 큰시누이의 여고 시절은 너무 힘들었던 게 상상이 된다.
어머니는 재혼후에 4명의 자녀를 낳으셨는데 위로 두명의 쌍둥이 아가씨는 일찍 돌아 가셨다.
큰 시누이는 여고를 다니며 살림도 하고 동생들도 키웠다.
그때도 어머니는 몸이 많이 좋지 않으셨다고 들었다.
식구는 시부모님, 시고모님이 두 분, 시삼촌, 남편형제들 7명인데 남편과 비국으로 이민을 간 바로 아래 남동생은 예산 시골집에서 조부모님과 생활을 했었다.
교사였던 아버님이 자주 전근을 다니셔서 큰형제들만 중학교 진학을 위해서 부모님과 함께 살았다.
훗날 대전에 정착하면서 남편이 중2 때부터 모두 함께 살 수 있었다.
막내 고모님은 시아주버님보다 한살 많으셨고 여고에 다녔다.
시 삼촌은 충남대학을 다니시다 불치병으로 돌아 가셨다.
큰 시누이는 수술 자국이 완쾌 되지 않아서 2달 이상 입원을 했었다.
60세까지 회사를 다니다 갑자기 퇴직을 해서 그동안 참고 견딘 몸이 반란을 일으켰다.
남편은 거의 매주 아버님을 모시고 시골집에 간다. 큰아주버님과함게, 그리고 안산에 살고 있는 큰 시누이님 부부가 내려온다.
그형님이 어제 우리 집 동치미가 떨어졌다고 나박 김치를 만들어 보냈다. 아버님댁과 우리 집 것 , 모두 4통을.......
나보고 [발목을 완전히 고치고 출근하라면서]
인생의 긴장감이 풀려서 좀 오래 아플 거라는 위로와 함께.....
이제 나는 노후를 살기 위해서 남편의 고향으로 이사를 왔다.
그리고 첫번 째 맞는 구정이다
일을 못해도 일찍가서 형님의 조수를 해드려야 한다.
결혼한지 31년이 됐지만 시댁의 경조사나 모임에 가서 나는 큰 동서가 수저를 들기 전에 밥을 먹은 적이 없다.
설걷이는 적극적으로 했다.
그것이 늘 수고 하는 그분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이해가 좀 안될 경우에 그사람과 입장을 바꿔서 생각을 해본다.
나는 시어머니 자리에서도, 큰형님 자리에서도 ,두 분 만큼 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조용히 그 날 분위기 묻혀서 부정적인 대화를 먼저 꺼내거나 ,맞장구 치지 않는다.
그 분들 보다 못하는 사람이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이번 주는 전국의 큰 며느리들에게 지차 며느리들이 [충성]을 하는 기간이다.
명절에는 며느리만 죽어 난다는 것을 말해서 기껏 일하고 공치사 하는 일들이 없었으면 좋겠다.
큰며느리보다 좀 잘하는 것이 있더라도 이번 주 만큼은 겸손히 집안의 화목을 위해서 조용히하고 전체의 평화를 위해서 봉사의 시간을 갖었으면 좋겠다.
음식을 가지고 맵내. 싱겁네, 짜네. 말하지 말고 그냥 먹도록 하자.
우리 모두 큰며느리를 대접해주므로서 시집 가문의 평화를 만들자.
큰 며느리들이 말을 시작하면 우리들보다 더 많지만 대부분 큰며느리들은 묵묵히 자기 할 일을 하고 있다.
나 하나가 [행복 바이러스]가 돼서 즐거운 명절을 만드는 것은 마음 먹으면 할 수 있는 일이다.
대한민국 큰며느리들 만세!
충성입니다.!